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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4주일 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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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4주일 가해] 마태 1,18-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다른 이와 비교하며 그들을 밟고 올라서서 더 높이 올라가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삶의 의미와 참된 가치를 쫓으며 자신을 낮추고 아래로 내려가 세상에서 소외된 작고 약한 이들과 어우러져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사랑과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지요.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 우리를 향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기꺼이 자신을 낮추시어 ‘아래’로 내려오신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성탄이 코 앞으로 다가온 대림 제4주일의 성경 본문들은 세상을 초월해 계시던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는지 그 신비로운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핵심 키워드는 두가지 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순명’.
그런데 오늘 제1독서에 등장하는 아하즈 임금은 순명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가 남유다를 다스리던 기원전 8세기는 아시리아라는 강대국에 대항하기 위해 북이스라엘과 시리아가 동맹을 맺고, 남유다도 거기에 동참하라고 요구하던 때였습니다. 이에 아하즈 임금은 강력한 군사력과 외교적 수단으로 그 난국을 극복하려 하는데, 이사야 예언자가 반대하고 나섭니다. 인간의 능력과 힘에 의지하려 들지 말고 하느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시며 보살펴 주심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의탁하기가 불안하고 두렵겠지만, 그분께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도록 지켜주겠다고 하시니, 그런 당신의 약속을 분명한 표징으로 보여주겠다고 하시니 그분께 청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아하즈 임금은 승리를 약속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그럼에도하느님의 진노를 살까 두려워 그분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지는 못하고, 이렇게 답하지요.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 그럴듯한 말로 자신의 불신을 하느님을 위한 ‘충정’인양 포장하려 들지만, 이는 분명히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죄’이자 끝까지 자기 뜻대로 밀어부치려는 ‘독단’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그런 그를 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분명한 구원의 표징을 약속하십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이 그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아하즈 임금 때와는 다른 양상이 펼쳐집니다. 아하즈가 불신과 고집으로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진행되는 걸 지체시킨 것에 비해, 요셉은 전적인 믿음과 순명으로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온 세상에 드러나게 만든 겁니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약혼녀가 결혼해서 같이 살기도 전에 다른 이의 아이를 임신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녀의 불륜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개입 때문임을 믿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그 태중의 아기까지 보살핌으로써 평범한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써 누릴 수 있는 모든 즐거움까지 포기해야 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몰라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왜 나만 이토록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나’라는 생각에 억울하고 하느님이 원망스러웠겠지요. 하지만 요셉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재수가 없어서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그를 미워하셔서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즉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준비하신 그 선한 계획이 실현되려고 그런 것이지요. 내가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은 그 결과에 따라 성공과 실패로 나뉘지만, 하느님의 기준으로 보면 그건 성공도 아니고 실패도 아니며, 그저 그분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일 뿐입니다. 나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 안에 하느님의 뜻과 섭리가 스며있음을 믿고 따를 때,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돕는 그분의 협력자가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임마누엘” 하시는 것입니다. “임마누엘”(אמנוּאל)은 히브리어로 ‘우리와 함께 있다’라는 뜻의 ‘임마누’(אמנוּ)와 ‘하느님’을 뜻하는 ‘엘’(אל)이 합쳐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 되지요. 하느님은 저 멀리 하늘 끝에 홀로 계시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당신 자녀인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의 슬픔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그것을 이겨낼 용기와 위로와 힘을 주고자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어떻게든 더 많은 이들이 당신 나라에 들어오게 만들고자 하십니다.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런 뜻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지요. 그런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굳게 믿는다면 그분께서 언제나 ‘임마누엘’하심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 뜻대로 하려고 고집부리지 말고,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며 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삶 전체, 더 나아가 죽음 이후까지 나와 함께 계심을 믿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당장 힘들고 괴로워도 하느님 뜻에 맞는 것, 결국 나에게 ‘최선’이 될 그것을 선택하고 따를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가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려는’ 자기 계획을 택했다면 당장은 몸과 마음이 편했을지 모르나, 하느님의 선한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참된 보람과 영광은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대신 그것을 누리는 이를 보며 뒤늦게 스스로의 잘못된 선택을 후회했겠지요. 그래서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자기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납득하기도 힘든 하느님의 뜻을 오직 ‘믿음’ 하나로 품어 안은 것이지요. 충분히 이해되고 납득할만한 것을 받아들이는 건 믿음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인정일 뿐입니다. 믿음이란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비합리적으로 느껴지더라도, 그 과정에 고통과 시련이 따르더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기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 여기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어 나와 함께 사십니다.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며 이끌어 주시고 지켜주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 되십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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