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4일 (수)
(자) 12월 24일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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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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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corenelia] 쪽지 캡슐

2025-12-23 ㅣ No.187002

[12월 23일] 루카 1,57-66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이제 성탄도 이틀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어제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참된 기쁨이 어디서 오는지 그 ‘원천’에 대해 살펴보았다면,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을 받아 누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마음가짐’에 대해 살펴보게 되지요. 오늘 복음의 배경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가 아기를 얻은지 여드레 째 되는 날, 온 가족이 모여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고 이름을 지어주는 자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름’이란 단지 다른 사람과 구별하여 부르기 위한 ‘호칭’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일생동안 살아내야 할 ‘사명’을 부여하는 일종의 ‘예언’으로서의 성격을 지닙니다. 그래서 아기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주는가가 참으로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가문일수록,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가문의 전통과 정신이 깃든 공동의 이름을 그대로 전승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아기가 가문의 이름인 ‘즈카르야’를 물려받는 대신, ‘요한’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어야 한다고 고집합니다. 심지어 즈카르야는 혀가 묶여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판에 직접 글씨까지 써가며 아기 이름을 반드시 요한으로 짓겠다고 강하게 주장하지요. 즈카르야의 혀가 묶인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불신한 것에 따른 ‘벌’이었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좋은 일이었습니다. 입을 닫음으로써 섣불리 판단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천천히 곱씹어보는 ‘묵상’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고, 제 고집과 뜻을 꺾지 못하고 아기 이름을 ‘즈카르야’라고 지었겠지요.

 

하지만 즈카르야는 아기 이름을 요한으로 지음으로써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였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옭아매던 세상의 기준과 가치관, 편견과 선입견, 상식과 전통이라는 모든 고리를 끊어 버리고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되어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된 겁니다. 우리도 즈카르야처럼 되어야 합니다. 나를 세상에 옭아매는 모든 고리를 끊어버리고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하느님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을 함께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시선의 노예’가 된 상태로는 하느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인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을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그건 내가 속한 세상을, 내가 관계 맺고 사는 사람들을 싸그리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과 삶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며, 내가 마주하는 모든 일들과 내가 관계맺는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의 뜻 안에서 대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좋고 싫음’이라는 개인적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을 주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으로 여기며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주님께서 참으로 내 안에서, 나를 통해 세상에 태어나시게 됩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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