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2일 (수)
(녹)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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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경을 정성껏 / 오두막의 라파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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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자 [tjfgnl8801] 쪽지 캡슐

2008-05-18 ㅣ No.36206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는 기도 아시죠? 

특히 성호경을 긋는것은(머리와 가슴과 양 어깨에 긋죠.) 가톨릭 교회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잖아요.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성호를 긋습니다.

기도 전후와 식사전후, 미사의 시작과 끝, 그 외에도 많은 일에 앞과 뒤에 가톨릭 신자들은 성호를 긋습니다.

가톨릭 신자가 가장 많이 바치는 기도가 아마도 "성호경"일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성호경"은 어떤 의미를 지니며 또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요?
왜 우리는 수도 없이(하루에도 몇번씩) "성호경"을 그면서 살아야 할까요?

그 이유에 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머리 찍고, 가슴 찍고(어떤분은 배를 찍기도 하던데...ㅠㅠ),

양 어깨를 찍는... 무슨 춤도 아니고...

어떤분은 눈깜짝할 사이에 허공을 찍기도 하죠(머리에 손도 안대고... ㅠㅠ),

그런데 문제는, 그럴때  굴러들어오는 복을 발로 뻥 차듯이 풍부히 내리는 은총을 자신도 모른채 거부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성호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얼마나 풍성하게 내리는지 몰라요.

그러니까 '성호경'의 뜻을 잘 파악해서 소나기 보다 풍성히 내리는 은총을 듬뿍 받도록 합시당^^


- 우선, 간단히 "성호경"은,
1.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기도입니다

(신앙고백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기 때문)

2. 가톨릭 교회의 가장 큰 기도이며 핵심인 "미사"는 성호경으로 시작해서 성호경으로 맺습니다.

3.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가장 위급할 때, 그리고 가장 중요할때 도저히 상상할 수없는 힘과 은총을 받게 하는 기도입니다.


- "성호경"은 삼위일체 신비에 대한 신앙고백으로서 가장 중요한 기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알아볼 수 있겠지만, "미사"와 "성서(요한4:7-16)"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성서를 보자구여...^^
요한 1서 4장7절부터 16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면서 읽는다면 더 좋을지도...^^)

성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7-16)

( 7절)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 8절)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9절)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10절)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11절) 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절)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13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절) 우리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하고 있습니다.

(15절) 누구든지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계십니다.

(16절)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고 또 믿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자, 가슴에 새기면서 읽으셨나요?
그저 눈으로만 읽으셨다면 다시 한번 더 읽으세용.


그럼.. 위 성서의 내용을 알아보기 전에 우선
'미사' 안에서의 성호경을 알아볼까요?


(미사 안에서의 '성호경')- 성호를 그었을때 일어나는 상황(?)

우리는 미사를 시작하며 성호를 긋습니다.
사제의 입당과 아울러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호를 긋죠.

이렇게 성호를 긋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것이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이신 하느님께 신앙고백을 함으로써...)

성호를 그으면 마치 미사가 시작되었다는 신호를 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신자들이 숙연해지고 집중하게 되는데,

한편 이 때 하늘이 열리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신자들이 미사 전에 웅성거리는 것이
마치 하늘에서 하느님 삼위(성부,성자,성령)께서
"우리 중에 누가 내려가서 저들과 함께할까"라고 의논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대요.^^

하느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주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면서 우리를 하늘나라로 불러들이시는
기분도 들고요.


자, 그럼 성서의 내용을 통해서 좀 더 살펴볼까요?

(1요한4:7-16)
우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 이신 하느님이시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고통받고 죽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분,
즉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고 고통을 받으셔야만 했나요?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셨을텐데...

왜그랬죠? 왜? 왜? 왜?

(여기서 잠깐) 우리는 가끔...
아니 자주 하느님을 우리 안에 가두려고 합니다.
우리의 관념과 생각의 차원에서 그분을 판단하고는 하죠
.

그래서 바로 위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죠.
하느님은 우리 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공의로우신 분이시죠
.

인간을 사랑하지만 댓가없이 인간의 죄를 무작정 용서해 주실수는 없죠.

어떻게든 인간이 그 댓가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공의로우신 법칙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 댓가를 지불할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사랑은 극치를 이루게 됩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으로서 인간의 죄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는 거죠.

이 얼마나 기가막힌 사랑의 기적입니까?
아무런 헛점도 없이 공의로움(정의로움)에 위배되지 않으면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의 극치를 보이시는 것...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으니 '얼마나 깨끗하고 고결한 인간'이겠습니까?
그런 인간만이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사랑의 차원 안에서 하느님께서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사랑을 실천하셨고, 또 성령(역시 하느님이신분)께서 성자 다음으로
세상에 오시어 인간을 보살펴 주시니...
이 같은 사랑이 어디있겠습니까
?

이러한 사랑은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성부, 성자, 성령)
아버지 하느님은 지상으로 당신의 아들을 내려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외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권한을 다 주셨습니다.
아들은 그 권한을 다 받고도 자랑하거나 뻐기거나 남용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남김없이 주시는 데 다 써버리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결실로 얻은 영광은 아버지께로 또 다 돌리시죠.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항상 바라보고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일치하게 되고 또 일치의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피어납니다.
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아버지와 아들을 계속 한 마음 한 몸으로 만드십니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로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고
아버지가 원하시는 바로 그대로 다 이루십니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제물이 됨으로써
사람들의 죄값을 갚으시는 것까지인데도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마다하지 않고 따르시고 다 이루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인간에 대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호경이 특별히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냥 습관아녜요?"

"사람들 많이 보는 데서 성호를 그으려면 왠지 쑥스러워서 못하겠어요."

"성호 긋기가 두려워요. 내가 성호를 그을 때 누가 옆에서
'저는 잘 살지도 못하면서…', '저런 주제에 신자인체 한다.'고
흉보는 것 같고, 또 한편 오히려 주님께 누를 끼치는 것 같아요."
라는 생각을 갖거나 말을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혼자 있을 때나 무슨 일이 있을 때, 성호를 그으면 무서움이나
두려움이 없어지고 편안해져요."

·"성호를 그으면 주님께서 내게 오시는 것 같아서 힘이 생겨요."

·"어떤 때는 너무 습관적으로 바쳐서 그었는지 안 그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안 바치면 너무나 허전해요."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성호를 긋기도 하고 피하기도 한다면...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성호경의 은총이 풍부하다 하더라도,

1. 의식하지 못하면, 그저 건성 건성 바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누군가 그대에게 보물이 숨겨져 있는 곳을 알려준다해도
그대가 듣지 않는다면 도저히 알 수 가 없죠ㅠㅠ.)

2. 죄의식 때문에.. 또는 남의 이목 때문에... 창피해서... 주님 또는 천주교 신자들을 욕먹일까봐 바치지 않는다면... 역시 자신의 판단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우리가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신앙을
고백하면 분 역시 우리를 알아 주십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성호경을 바칠 때마다,
성호를 그으며 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가 받은 그 사랑으로,
아니 그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며 하느님 그 사랑에 참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1요한4:11-12)

나는...


성호를 자주 긋습니까?
성호를 그을 때 옆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까?
성호를 그을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긋게 됩니까?
성호를 그을 때 어떤 느낌이나 기분이 들 때가 있었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외면하면...
그분 역시 우리를 외면하실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분을 알고 인정하고 믿어야만 그분 역시
우리를 인정하실 것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두막집의 라파엘 신부님

 








 

 

+ 삼위일체 기도문 (이노주사 노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께 찬미와 감사와 경배를 드리려 여기 왔나이다
주님께 찬미와 감사와 경배를 드리려 왔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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