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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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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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규 [vegabond] 쪽지 캡슐

2008-07-24 ㅣ No.37602

 

                           

아내의 편지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그는 허름한 작은 방에서 아내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아내가 긴 병마를 이기지 못해 세상을 등진 지 1년, 사무치는 그리움에 절망 속을 허우적대던 남자는 마침내 결심했습니다.


아내를 따라가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엉망으로 어질러져 아내의 빈자리를 더 휑하게 만드는 집안을 말끔히 정리했습니다.


"여보, 나 너무 못났지? 미안해, 더는 버틸 힘이 없어. 흑흑……."


그는 빈 방에서 아내 사진을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잠들어 있던 아들이 눈을 비비며 깨어났습니다.


"아빠 뭐해?"


아빠의 흐느낌에 선잠을 깬 아들이 아빠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이제 겨우 여섯 살, 아빠의 절망을, 그리고 절망 끝의 선택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아들입니다.


"상우야,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아빠 보고 싶어도 꾹 참아야 한다. 그래야 착한 아들이지."


아이는 착한 아들이 되고 싶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단단히 다짐을 받은 뒤 출장을 핑계로 아이는 외가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와 상우는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마음이었습니다.


"상우, 할머니한테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그러나 그의 슬픔을 읽기라도 한 듯 하늘에선 비가 억수 같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맡기고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그는 마음속으로 아내를 불러봅니다.


'여보! 조금만 기다려. 당신한테… 당신한테 갈게.'


약병을 들고 남편은 속엣말을 하며 아내 사진 앞에 앉았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끝낸 뒤 아내의 흔적들을 치우려던 그는 장롱 속 깊숙한 곳에서 아내의 체취가 묻은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일기장을 펼치려는 순간 툭 하고 편지가 떨어졌습니다.


편지는 아내가 죽음을 예감한 뒤 그에게 남긴 유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상우 생일이 되면 동네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한 장 찍어 주세요. 그리고 화장대 서랍에 꼭 맞는 액자가 있으니까 거기에 넣어 거실에 걸어 줘요. 똑같은 걸 스무 개 샀는데 열 개가 남았으니까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그렇게 해달라는 거예요. 찬장에 둔 와인은 당신 마시면 안 돼요. 우리 아들 태어나던 해에 담은 건데, 신혼여행 갈 때 싸서 보내 주세요.'


'여름에 출근할 땐 선크림 바르는 거 잊지 마세요. 안 그러면 피부가 상해서 나이보다 늙어보일 거야.'


'봄 가을엔 꼭 구충제를 먹어야 해요. 당신도 상우도 강아지도 같이요.'


'그리고 하루에 한 번은 아이를 안고 사랑한다고 말해 주세요.'




여기까지 읽고 나서 남자는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아내의 당부는 계속됐습니다.


'영구치가 나면 치과에 가서 불소치료를 받게 해 주세요.'


'새 친구가 생기면 어떤 아인지 꼭 만나 보세요.'


남자의 자살 결심을 돌려놓은 건 편지의 맨 마지막에 쓰여 있는 구절이었습니다.


'내가 가장 바라는 건 당신이 행복하게 지내는 거예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남자는 아내의 편지를 품에 안고 한참을 울다가 눈물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울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남자는 아내의 편지를 가슴 속에 소중히 접어 넣은 뒤 상우를 데리고 사진관부터 찾았습니다.


사진사 아저씨가 상우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게 했습니다.


"고개를 왼쪽으로, 좀더, 더 좋아, 그대로."


남자는 앞으로는 약한 마음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거실 벽에 상우 사진을 걸며 환하게 미소 지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내가 미주알고주알 당부한 일들을 들어 주어야 하니까요.


남자는 상우와 그 사진을 보며 두 손을 꼭 잡았습니다.



-『TV 동화 행복한 세상 2』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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