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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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2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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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규 [vegabond] 쪽지 캡슐

2008-04-11 ㅣ No.35301

 

2008년 4월 12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 - 요한 6,60-69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영성생활의 최종적 지향점, 관상>


   신앙생활, 기도생활, 영성생활을 바탕으로 한 하느님 체험은 지극히 개별적인 체험이기에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나 상황이 지극히 다양한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 중에 자주 환시를 보기도 합니다. 은혜롭게도 어떤 분에게는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시며 말씀을 건네기도 하신답니다. 어떤 분들은 관상 기도 중에 예수님의 얼굴을 뵙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묵주기도 중에 성모님께서 바로 옆에 앉으셔서 함께 기도하시는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 체험, 하느님 체험에 있어서 주의할 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 체험은 사람마다 그 정도나 강도가 지극히 상이하기에 그런 체험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가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비체험, 영적체험 앞에 우리는 보다 진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입이 근질근질해져서 함부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발설하다가는 ‘약간 맛이 간 사람’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있는 사람’ ‘공주병이나 왕자병에 걸린 사람’으로 오해받거나 왕따 당하기 십상입니다.


   신비로운 체험이 도저히 혼자 간직하기 부담스러울 때는 현명한 영적지도자를 찾아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왜냐하면 천상적 신비체험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세상에 파묻혀 살아가는 사람들, 본격적인 하느님 체험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특별한 체험은 거북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시기심을 발동하게 만듭니다. 투덜거리게 만듭니다.


   속상하게 만듭니다. ‘저 사람은 저런데 나는 도대체 뭐냐’는 식의 열등감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거룩한 말씀, 신비로운 말씀 앞에 많은 제자들이 이런 표현을 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생활, 제대로 된 영성생활의 최종적인 지향점은 사실 관상입니다. 기도 가운데 나란 존재가 사라지고 하느님만의 충만한 현존만이 내 안에 남게 됩니다. 내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하느님 그분께서 함께 해주시니 나는 너무나 행복합니다. 황홀합니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관상이 아니겠습니까?


   한 대 영성가는 관상기도 중에 황홀한 하느님과의 만남을 자주 체험하곤 했었는데, 하루 온 종일 그런 상태에 머물러있을 수 있나요? 밥도 먹어야 하고, 일도 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 관상기도에서 현실생활로 빠져나와야 했는데, 그것이 그렇게 힘들었다고 합니다. 감미로운 하느님 현존 체험 상태에서 일상생활로 돌아오는 것이 죽기보다 힘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시다시피 예수님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거룩한 말씀, 천상적 말씀, 영적 말씀에 거북해하고, 귀를 막았습니다.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게 거룩한 천상적 말씀, 영적인 말씀들은 대체로 설득력을 상실합니다. 별로 큰 의미가 없습니다. 시시하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지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천상에 속한 천상의 시민이기 때문에 꾸준히 지상생활을 넘어서고 극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천상적 삶의 양식에 대한 비아냥거림에 대해서도 그러려니 하고 마음먹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관상기도는 다른 무엇에 앞서 묵상기도를 잘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묵상기도는 우리 인간 측의 의지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기도입니다. 무엇을 묵상할 것인가? 제일 좋은 것은 그 날 그 날 복음 말씀입니다. 성경말씀을 파고드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한 관상 기도 전문가의 증언입니다.


   관상기도 멀고도 먼 과제, 내겐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숙제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매일 그 날 그 날 주어지는 복음말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쓰고 또 썼습니다.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주해서를 찾아보기도 하고, 말씀봉사자나 신부님들께 여쭤보기도 하면서 계속 파고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 날 그 날 성경말씀과 내 삶을 연결시켜보려고 기를 썼습니다. 그렇게 의지적인 노력을 계속했더니, 말씀에 맛이 점점 들어갔습니다.


   그런 노력을 쉼 없이 계속하던 어느 순간, 이런 한 가지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서히 내 노력은 줄어들면서 주님께서 해주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 의지, 내 노력, 내 생각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그저 주님 안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관상기도는 철저하게도 수동적인 기도입니다. 우리 인간의 의지나 감정, 생각은 사라지고 하느님께서 전적으로 활동하시는 기도이기에 그 맛이 각별합니다. 황홀합니다. 신비롭습니다. 감미롭습니다.


   그러나 관상기도는 거기에 그렇게 머무르려고 해서는 망합니다. 관상은 반드시 일상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삶, 현실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관상기도를 잘 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늘 눈을 하늘로 치켜뜨고, 성당에서만 죽치고 있다면 절대로 관상기도 잘 한 사람 아닙니다. 관상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었다면 그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삶을 더 열심히 살았다면 그는 분명 잘 하고 있는 관상기도자입니다.


   성당에서 관상기도 확실히 제대로 한번 한 사람이, 집에 돌아와서는 완전히 돌변해서 며느리 쥐 잡듯이 잡는다면 그 관상기도는 헛것입니다. 관상기도는 특별히 친교의 영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박삼일 동안 관상기도 열심히 하고 돌아와서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 사람 저 사람 멱살 잡고 흔든다면 그 관상기도는 완전히 실패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219번 / 주여 몸과 맘  다 바치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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