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2008년 4월 15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스크랩 인쇄

노병규 [vegabond] 쪽지 캡슐

2008-04-15 ㅣ No.35377

 

2008년 4월 15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 요한 10,22-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거칠 것 없는 당당함의 배경>


   잔뜩 적개심을 품은 사람들 사이에 홀로 서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둘러선 사람들의 눈에는 살기가 등등하고, 위협적인 말이나 욕설이 난무하는 그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은 정말 곤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거에 아이들 사이에서 텃세란 것이 있었습니다. 다른 동네 아이들이 우리 동네에 들어와서 활개를 친다든지, 다른 구역 아이들이 우리 구역 아이들을 괴롭힌다든지 하면 즉시 ‘윗선’으로 보고가 되고, 신경전이 벌어지고, 때로 패싸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꼬마였던 저는 뭐가 뭔지도 모른 채 다른 동네 형들에게 끌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수세에 몰렸던 같은 동네 형들이 모두 줄행랑을 쳤는데, 동작이 제일 굼뜬 저만 붙잡혔던 것입니다.


   다른 동네 형들, 저를 에워싸더니 저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합니다.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니 뒤통수도 때리고, 세게는 아니었지만 발로 차기도 하고, 심한 욕설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도망가면 어디로 모이느냐, 대장이 누구냐, 이것 저 것 물어보았습니다.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수모였고, 또 위협적인 분위기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분위기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봉헌축제가 벌어지고 있던 어느 겨울 예수님께서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있을 때, 살기등등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에워쌉니다. 그리고 취조라도 하듯이 따집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주시오.”


   아직도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유다인들은 조급한 마음에 자꾸 따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주시오”라는 강요 이면에는 유다인들의 음흉한 계략이 숨어있습니다.


   따지러온 유다인들은 이렇게 생각했겠지요. 만일 예수님께서 메시아 호칭을 거부하신다면 실망한 백성들이 떠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입으로 메시아임을 선포한다면, 우매한 백성들을 선동하는 혁명가로 로마에 고발할 건수를 찾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다인들의 계책을 예수님께서 모르셨을 리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성 유무에 대한 명확한 Yes, No를 하지 않으십니다. 아직 아버지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죽음의 함정을 피하십니다. 그리고 청중들을 영적인 세계로 이끄십니다. 유다인들은 문제의 주변에서 서성대지만, 예수님께서는 문제의 본질로 청중들을 초대하십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된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빛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세상 것에 너무 매여 있었습니다. 초자연적인 것을 받아들일 준비자세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의 논쟁 중에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제대로 된 율법교육도 받지 않은 갈릴래아 시골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부를 소유한 것도, 탄탄한 가문이 뒷받침되는 것도 아닌 그저 그런 평범한 출신이라는 것을 파악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지 않습니다. 상당히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해서, 혹은 번지르르한 언변으로 예수님의 기를 꺾어놓으려고 기를 씁니다.


   예수님께 따지러 온 사람들은 당시 유다인들에게 정식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부터 율법학교를 제대로 다녔었고, 그래서 자부심도 대단했었고, 토론이나 말재주에 있어서 탁월한 사람들, 한 마디로 ‘가방끈이 긴’ 사람들, ‘이빨이 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상황은 영 딴판이었습니다.


   위협적인 분위기에서도 예수님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전혀 주눅 들지도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맞서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논리 정연했습니다. 물 흐르는 듯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자연스러웠습니다. 다양한 비유와 더불어 아주 쉽게 성서전반을 설명합니다. 토론이 시작되었는데, 단 한 번도 말문이 막히는 법이 없었습니다. 단 한마디라도 틀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런 당당한 예수님 앞에 유다인들은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적개심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이제 감정싸움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해치고야 말겠다는 증오심으로 다양한 공격을 멈추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 사명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극도의 따돌림, 지독한 왕따의 서러움을 맞보셔야만 했습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평행선을 달리는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이젠 예수님의 정체성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에 상처 입은 유다인들의 적개심에서 비롯된 1대 다수의 싸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제자들이라도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제자들 역시 유다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열악한 상황 앞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의연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의 당당함, 그 배경에는 무엇이 자리 잡고 있을까요?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진리에 대한 확신, 아버지와 나 사이의 본질적 동일성에 대한 강렬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221번 / 받아 주소서

 



888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