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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일하시고 계시다 - 윤경재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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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whatayun] 쪽지 캡슐

2017-03-23 ㅣ No.110933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일하시고 계시다

 

- 윤경재 요셉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11,20)

 

 

 

 

삼성그룹을 창건한 호암 이병철 회장이 1987년 타계하기 전 절두산 성당 박희봉 신부님께 자필로 쓴 다섯 쪽짜리 질문지를 보냈습니다. 단아한 필체로 쓴 24개의 질문들 가운데 첫 번째가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입니다. 이 회장의 질문은 어투가 도전적이고 호흡이 긴박합니다. 단순히 치기 어린 호기심으로 신은 존재할까, 아닐까 하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이, 이병철 회장도 사람이 태양 아래서 이룬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에게 떠오른 첫 번째 의문이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이 회장 개인의 질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다가가는 우리 모두가 언젠가 한번은 마주해야 하는 숙명적 질문입니다.

 

그동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철학적 접근이 시도되었고 그 정점은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그의 신학대전에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다섯 가지 길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우주론적 증명’ ‘도덕론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이라고 이름 붙인 논증들입니다. 그 논증들은 일관된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1)세계에는 감각적으로 확인되는 일반적인 특성들이 있다. 2)그런데 세계의 모든 일반적 특성은 스스로 생겨날 수 없고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만 생겨난다. 3)때문에 무한히 소급해가는 모든 원인의 궁극적 원인이 없다면 이러한 일반적 특성을 가진 세계가 존재할 수 없다. 4)그러므로 세계에는 궁극적 원인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500년쯤 뒤에 칸트가 나타나 이런 무한 논리를 이해하는 데 인간적 한계가 내재함을 밝혔습니다. 모든 무한 소급은 논리적으로만 가능하지, 존재론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계를 지닌 인간의 이성은 이처럼 무한 앞에서 무력합니다. 그래서 칸트는 인간의 이성은 경험 세계에만 적용할 수 있도록 한계 지어져 있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것을 벗어나 무한한 어떤 대상을 다루는 것은 월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의 모든 속성은 무한입니다. 이로써 이성적 논증만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일체의 시도는 사실상 막을 내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이성적 논증으로는 신의 존재론적 존재 증명과 더불어 존재론적 부재도 증명할 수 없다는 말과 상통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273126일 수요일 성 니콜라스 축일 아침 미사 중에 환시체험을 했습니다. 그 후 그는 내가 본 것과 내게 계시된 것에 비교할 때 내가 쓴 모든 것은 지푸라기처럼 여겨진다.”라고 고백하며 신학대전을 완성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습니다. 자신의 글이 하느님 존재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의 존재는 증명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의 문제로 바뀌었습니다. 달리 말해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객관적 증명 대상이 아니라 내 선택의 문제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구약 성경 탈출기3장에서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를 통해 하느님을 뵙는 신비체험을 합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먼저 당신을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의 체험을 통해 우리 곁에 계셨음을 잊지 말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실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존재론적 증명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습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모세는 집요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의 존재를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확신만으로 무엇인가를 남에게 전달하고 이해시킨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80평생을 살아오면서 처절하게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이 말씀의 참 의미를 깨달으려면 쉽지 않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언어가 갖는 한계성 때문입니다. 인간의 언어는 반드시 주어와 동사와 빈사의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곧 내가 누구고 무엇인지 설명하려면 나는 ~한 이다.’라는 어떤 설명어가 붙어야만 나라는 것이 설명되고 전달됩니다. ‘나는 있다.’라는 말도 나는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에 점유하고 있다는 설명어가 생략된 표현일 뿐입니다. 단순히 ‘나는 이다라는 말은 논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성립하지 못합니다.

 

나는 ~한 나이다.’ 이처럼 주어가 술어로 설명되거나 제한되는 이런 것을 인칭적 자아라고 정의하는데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있는 나다.”라는 말씀은 인칭적 자아를 초월한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으로 설명하거나 제한 지을 수 없는 원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존재하시지만 인간의 언어를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쓴 잊혀진 질문이라는 책에서 차동엽 신부님은 노자의 첫 구절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을 들어 이 이치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도와 상, 명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필요 없이 어떤 개념 안에 실재를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그러면서 과연 신의 존재는 증명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동 책 p199~207참조

 

또 카를 힐티의 말을 덧붙입니다.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신의 본질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신이 아니며, 신을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계속 답을 내려주셨습니다. 네가 나에 관하여 네 민족과 파라오에게 전달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취하게 만들기 위해서 내가 무엇인가 하겠다. 말로만 함께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면, 너희는 이 산 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탈출3,12)

 

너는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함께 이집트 임금에게 가서, ‘주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 주 저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강한 손으로 몰아세우지 않는 한, 이집트 임금은 너희를 내보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므로 나는 손을 내뻗어 이집트에서 온갖 이적을 일으켜 그 나라를 치겠다. 그런 뒤에야 그가 너희를 내보낼 것이다.”(탈출3,18~20)

 

즉 하느님은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그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머릿속으로 증명하여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차동엽 신부는 30여 년 동안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지냈다고 고백 성사하는 어떤 교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죄가 아니라, 손해입니다.” “일단 하느님을 믿으면 시작되는 기도의 도움, 평화와 행복 그리고 은총, 이렇게 좋은 것들을 못 누리셨잖아요? 그러니까 손해죠.”

 

이렇게 질문하는 분도 있겠네요. 하느님께서 히브리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죄 없는 이집트 맏아들을 희생하신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도저히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신비에 속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철학자의 솔직한 고백을 반복할 수 있을 뿐입니다.

 

17세기 프랑스 사상가 파스칼은 그의 미완성 대작 팡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신이 모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도록 인간 앞에 나타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진심으로 그분을 찾는 사람들까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숨어 계신다는 생각도 옳지 않다. 그분은 자신을 찾는 이들에게 그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시고 명확히 나타나길 원하시는 반면, 진심으로 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감추시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분을 찾는 사람은 그분을 알 수 있고, 찾지 않는 사람은 그분을 알 수 없는 표지를 주셨다.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예수께서도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시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4,9절에서는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필립보에게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라고 반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느님의 손가락은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의 일에는 누군가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표현입니다. 탈출기와 요한복음서 표현처럼 하느님의 일하시는 모습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실재한다는 것을 체험하라는 요청입니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묻는 분이 옆에 계시면 무어라 답할까라고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질문의 의도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표현을 그렇게 한 것이라고 알아듣고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이 되어 하느님의 일을 체험하게 만들어 주면 됩니다. 그러면 내게도 그에게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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