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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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어야 합니까? -마지막 유언-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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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 [damiano53] 쪽지 캡슐

2017-04-14 ㅣ No.111442



2017.4.14. 주님 수난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 

이사52,13-53,12 히브4,14-16;5,7-9 요한18,1-19,42(주님의 수난기)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어떻게 죽어야 합니까?

-마지막 유언-



삶이 아름답고 거룩해야 죽음도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예수님의 아름답고 거룩한 죽음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예수님의 삶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수난과정에서의 모습은 얼마나 당당한지요. 

전혀 비굴함이나 비겁함이 없습니다. 

그대로 예수님 삶의 반영입니다. 


사실 아름답고 거룩한 죽음보다 이웃에 줄 수 있는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죽음이 있어 삶이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죽음을 통해 다시 새롭게 정립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물음은 ‘어떻게 죽어야 합니까?’라는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하여 ‘어떻게 죽어야 합니까?’에 대한 답으로 저는 마지막 유언을 미리 정해 놓고 살자는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얼마전 읽은 기사가 생각납니다. 

서울대교구 신부님 한 분이 ‘아름다운 장례’를 주제로 한 강론에서 

자신이 주례한 장례미사때 퇴장 성가 402장의 감동을 전했다 합니다. 


“오 아름다워라 찬란한 세상 주님이 지었네 

 오 아름다워라 찬란한 세상 주님과 함께 살아가리라

 온 세상 만민들이여 주를 찬양하라

 그분의 위대하심을 높이 찬양하리라.”


흔히 장례때 부르는 슬픈 곡이 아닌 밝은 찬미의 곡을 부르고 들으면서 

많은 분들이 위로와 기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곡은 돌아가신 분의 애창 성가로 병자성사 때 불렀던 성가라 합니다. 

병자성사후 그분은 성가를 부르겠다고 하시며 가사 하나 틀리지 않고 또렷이 외어 부르셨다 합니다. 

일생을 지탱해준 신념을 고백하듯 얼굴은 어떤 확신에 차 있었다 합니다.


저는 내심 생각해 둔 것이 있습니다. 

제 장례미사때, 입당성가는 

성 프란치스코의 ‘오 감미로와라 가난한 내맘에 한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으로 시작되는 ‘태양의 찬가’를, 

퇴장 성가는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로 시작되는 아빌라의 대 데레사의 ‘아무것도 너를’이란 성가를 

불러줬으면 하는 생각이고, 

강론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제 자작 좌우명 애송시를 읽어 줬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어느 분은 다음 같은 동영상 육성 유언 녹음을 남긴 후 장례식에 참석후 식사하는 분들에게 보여 주도록 부탁했으며 

많은 분들이 기쁨과 위로를 받았다합니다.


“아이구, 제가 하늘나라로 간 오늘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슬픈 날이 아닙니다. 

저는 세상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다 떠나는 사람이니까 오늘 맛있게 드세요. 

여러분이 살아있는 곳이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즐겁고 행복하고 보람있게 사십시오. 

감사합니다.”


오늘 요한의 긴 수난복음 말미에서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의 두 임종어도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그대로 예수님 평생 삶이 두 임종어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1.“목마르다.”라는 유언입니다.


평생 하느님에 목말랐던, 진리에 목말랐던 예수님 삶의 반영입니다. 

이런 하느님께 대한 목마름이,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하느님을 추구하는 삶,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다음 빌라도의 물음에 대한 답변에서 잘 드러납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진리자체이신 하느님만을 찾고 하느님만으로 행복했던 예수님이요,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자유롭고 당당할 수 있음의 비결입니다. 

예수님은 또 당신 제자들이 진리를 위해 몸바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음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2. “다 이루어졌다.”라는 유언입니다.


더 이상 여한이 없다는 예수님의 고백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으로 일관한, 하루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해온  평생 삶에 대한 고백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마침내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주님의 종’의 모습이 실현됨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의 상처는 나았다.

---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바로 이런 사랑이 진리의 구체적 내용입니다. 

이런 주님의 종,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실현된 사랑의 진리요 하느님의 뜻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음도 순전히 주님의 종, 예수님을 통한 자비하신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수난예식 제2부 십자가 경배시 사제의 우렁한 십자가 경배 권고를 듣고 화답할 것입니다.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십자가 경배시 예수님의 전 삶이 요약되어 있는 두 임종어를 꼭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예수님을 통해 깊은 감동을 받고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당신 수난 예식을 통해 ‘어떻게 죽어야 합니까?’에 대한 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두 마지막 유언 임종어, 

‘목마르다.’ ‘다 이루어졌다.’를 내 유언의 임종어로 삼아 앞당겨 살아갈 때 

주님은 각자 고유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죽음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끝으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 자작 애송시를 다시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定住)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1년생 작은 나무가 

이제는 25년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언제나 그 자리에 불암산(佛巖山)이 되어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며 살았습니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행복한 산이 되어 살았습니다.

이제 25년 연륜과 더불어 내적으로는 장대(長大)한 

'하느님의 살아있는 산맥(山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기도하고 일하며 살았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며 

끊임없이 일하면서 하느님의 일꾼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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