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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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6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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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17-05-26 ㅣ No.112245

혼인을 앞둔 젊은이들과 면담을 하였습니다. 작은 인연으로 젊은이들의 혼인미사에 주례를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화를 하는 가운데 질문을 받았습니다. 아기에게 유아세례를 주는 것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아기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아이의 의견을 듣지 않고 유아세례를 주는 것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고, 저의 견해를 듣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선택을 하면서 살고 있지만 어떤 것들은 우리가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를 선택하지 못하고, 태어나는 장소와 나라를 선택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태어난 아기에게 묻지 않지만 엄마는 젓을 먹이고, 씻겨주고, 사랑으로 돌보아 줍니다. 그렇게 해야만 아기는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이 휴가를 갈 때, 이민을 가기로 결정할 때 아기의 의견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아기 혼자 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아세례를 받는 것은 성령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아기에게 묻지 않지만 예방 접종을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굳이 아기의 의견을 묻지 않아도 유아세례를 받게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족들이 세례를 받은 신앙인으로써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늘 기도하고, 언제가 감사드리며, 항상 기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아기가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주어진 성과 이름을 받아들이듯이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저의 설명을 들은 젊은이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유아세례를 받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시간에는 3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정했습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모두에게 같습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일주일은 7일입니다. 우리가 정한 물리적인 시간 속에 우리는 태어나고, 아프고, 늙고, 죽어갑니다. 이 물리적인 시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저 역시도 55년을 살아오면서 물리적인 시간의 흔적을 몸과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슬픔과 기쁨, 고독과 희망의 시간입니다. 헤어짐의 아픔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사랑의 기쁨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희망과 기쁨의 시간에서는 온 우주를 담을 수 있을 만큼 풍요로움과 여유가 있습니다. 고독과 절망의 시간에서는 바늘 하나를 넣을 수 없을 만큼 작고, 좁습니다. 불평의 시간을 가지면 남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감사의 시간을 가지면 남의 손을 이끌게 됩니다. 의미의 시간은 주어지는 시간이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가는 시간입니다.

세 번째는 가치의 시간입니다. 아기의 출산은 분명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곧 기쁨의 시간이 됩니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박해와 순교는 고통의 시간이며, 절망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곧 행복의 시간이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물리적인 시간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의미의 시간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치의 시간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헤어짐의 슬픔은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가난함도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아픈 것도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은총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단절과 허무입니다. 세상에서 이룬 모든 것들과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죽음도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두렵고 떨리는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며, 기쁨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걸어서 먼 길을 갔으며, 때로는 매를 맞기도 하고, 멸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처럼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읽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치의 시간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가치의 시간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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