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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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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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18-11-19 ㅣ No.125265

 

연수원에 있으면서 강의를 듣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제가 모르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아는 것도 기쁨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과 다를 수 있음을 아는 것도 기쁨입니다. 강의에서 잠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부님은 잠심을 내가 아는 것이 나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신수련 23항의 중용(불편심)과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고, 건강한 것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 있고, 부유한 것보다 가난한 것을 택할 수 있습니다.” 잠심은 나의 욕망, 나의 분노, 나의 시기와 질투를 내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나의 감정을 비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비워진 나의 마음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채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원뿔은 3차원의 도형입니다. 이것을 정면에서 보면 삼각형으로 보이고, 위에서 보면 원으로 보입니다. 정면에서 보는 사람은 위에서 보는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위에서 보는 사람도 정면에서 보는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나의 자리를 버리고 상대방의 자리에서 보면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보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버리고 새로운 차원의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전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자리에 안주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언자들을 오히려 박해하고, 공동체에서 쫓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새로운 세상,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내어 놓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곁으로 가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없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진다면,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치, 용서, 믿음에 대한 개념을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일치란 타협과 수용으로만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타협과 수용은 결국 쉽고 편한 길로 가기 마련입니다. 일치는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의 편으로 향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실현하는 것이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상대방의 입장과 상대방의 처지에서 나 자신을 맞추는 것이 일치의 시작입니다. 신앙 안에서 일치란 대상의 뜻을 알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대방을 끌어내리는 것은 일치가 아니라 강요입니다.

 

용서란 잊어버리거나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 그 사건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잠심의 개념과 비슷합니다. 알되 그 앎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입니다. 주사위는 내가 던지지만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잠언의 말씀처럼 용서도 그렇습니다. 용서했다고 하지만 내 안에 원망이 남습니다. 결국, 용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대하면서 사건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황을 만드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주체는 하느님이십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으면서 믿는 사람이 있고, 믿고 싶으면서 믿는 사람이 있고, 믿고 싶지 않으면서 믿는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절벽에서 나무를 잡고 있는 사람이 기도 중에 나무에서 손을 놓으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의 생각과 판단이 중심이 된다면 나무에서 손을 놓기 어려울 것입니다. 내 안의 주인은 하느님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는 대상이 내 안의 주인이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의 주인이 되고 있지 못합니다. 내 생각이 나의 주인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예수님이 내 안의 주인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 승강기의 게시판에서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더욱 푸르다.’ 모든 것이 푸르른 여름에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시련의 때, 고난의 때에는 유독 그 푸름이 돋보이는 나무가 있는 것처럼 주변을 보면 그렇게 자신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서 흘러가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줄 아는 용기와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흘러가는 삶은 살아지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눈을 뜬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자비를 청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살아도 결국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경은 주님께 간절하게 외칩니다. ‘주님 보게 해 주십시오.’ 주님은 소경의 간절함을 보시고, 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보아야 하는 것들은 빠르고 편하고, 쉬운 길만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느리고,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당신의 힘과 능력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세우신 질서와 법에 따라야 한다고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선택과 결정을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의 질서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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