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9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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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석 신부 / 제11회 마르 2,1-11 갈릴래아 논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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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임 [rmskfk] 쪽지 캡슐

2019-10-21 ㅣ No.133320

박기석 신부 / 제11회 마르 2,1-11 갈릴래아 논쟁 1


 

지난 시간 우리는 마르코복음 1장 제가 제목이 카파르나움의 하루라고 그랬죠. 예수님의 카파르나움에서의 첫 공식적인 활동 그 하루의 일상의 삶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온전성과 건강을 회복시켜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시고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각종 질병을 앓던 병자들과 또 더러운 영, 마귀로 사로잡힌 이로 대표되었던 이들과 그릇된 종교적 인식과 사회적 편견으로 철저히 버려져 소외되었던 이들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 나라에 함께 하게 되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또 그분이 행하신 기적들에 이끌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었지요. 하지만 아직까지 사람들은 예수님이 분명히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서는 또 그분의 사명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 새로운 구원으로 향해 가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라는 것도 우리는 보았어요. 

 

날로 커가는 예수님의 명성에 맞서 의혹을 품는 반대 세력들, 예를 들면 더러운 영이라든지 또 나병 환자의 경우는 예수님의 함구령을 지키지 않았었죠. 바로 이런 행동들 그런 것들은 바로 예수님에 대해서 기존 사회 지배 세력이 반발하는 그런 모습들로 비춰지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마르고복음 1장에 이어서 2장을 봅니다. 그런데 1장의 평온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예수님과 그분을 반대하는 적대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 이야기들이 2,1ㅡ3,6절까지 다섯 개의 이야기가 연속적으로 펼쳐집니다. 

 

그래서 1장을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라고 제목을 한다면 2,1ㅡ3,6절까지를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갈릴래아 논쟁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 논쟁은 중풍 병자를 고치고 죄를 용서해 주는 예수님의 권한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죄인들 그리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예수님. 그들 중 한 명을 또 제자로 부르시죠. 그다음에 세 번째는 제자들이 단식 계율을 지키지 않는 일에 관한 것. 그리고 네 번째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규칙을 어기는 이야기, 밀 이삭을 뜯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논쟁은 3장으로 넘어가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행동에 관한 것으로 갈릴래아 논쟁 5가지가 펼쳐집니다. 

 

* 예수님과 반대자 사이에서 일어난 '갈릴래아 논쟁' 

  갈릴래아 논쟁 ① 중풍병자를 고치고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의 권한 (마르 2,1-12)

  갈릴래아 논쟁 ②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어울리며 

                      그 중 한 명을 제자로 삼으신 예수님의 처신 (마르 2,13-17)

  갈릴래아 논쟁 ③ 예수님과 제자들이 단식 계율을 지키지 않는 일(마르 2,18-22)

  갈릴래아 논쟁 ④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의 규칙을 어기고 밀 이삭을 뜯는 일(마르 2,23-28) 

  갈릴래아 논쟁 ⑤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낫게 한 예수님의 행동 (마르 3,1-6) 

 

그 중에서 오늘은 제일 먼저 2,1-12절 바로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을 밖 외딴 곳에서 머무시던 예수님께서 며칠 뒤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돌아오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들죠.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마르 2,1-2) 

 

자, 이미 우리는 1장에서 예수님께 이렇게 몰려드는 것, 예전에 한 번 시몬 베드로의 집과 그 집 앞마당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던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마르 1,33) 그런데 이 상황이 지금 다시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다시 몰려듭니다. 마르코는 이것을 단순하지만 아주 상세하게 묘사하지요.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마르 2,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2절에서의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4절에서는 '군중'이라는 표현으로 바뀌게 됩니다. 

 

바로 이 군중의 출현은 예수님께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 1,15절에 예수님의 지상 사명의 선포인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좋은 기회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몰렸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께서 인기가, 대중적 지지도가 높았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달하셨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이렇게 몰려든 사람들에게 선포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2,1-2은 지금 마르코복음 1장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와 이제 펼쳐질 갈릴래아에서의 논쟁 사이를 연결지어주는 간단한 연결문으로써 1장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를 해 주는 겁니다. 

 

* 마르코 복음서 2장 1-2절 : 앞뒤 내용을 이어가기 위해 넣은 연결문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마르 2,3) 자, 여기서 네 명은 중풍 병자의 친구나 친척들이라고 보여져요. 그런데 중풍 병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몸이 마비된 환자예요. 몸이 경직되고 마비되었다고 한다면 그런 상태가 그 사람의 영혼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마음도 몸을 따라가겠지요. 몸의 상태가 마음을 만들기도 하지만 마음의 상태가 몸을 만드는 경우 더 심각하고 결과가 더 무섭다고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친구든, 친척이든 중풍 병자를 돕는 사람들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스스로 자기가 뜻하는 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그 중풍 병자를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죠.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갈 수 없었다."(마르 2,4) 4절입니다. 환자의 병, 몸을 마비시키는 중풍 만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께 가려고 하는 그에게 장애물이 그 몸, 중풍병이라고 하는 그 병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장애물이 있다는 거죠. 바로 '군중'입니다. 예수님께 모여든 사람들. 왜 이들이 중풍 병자에게는 또 다른 장애물일까? 이 사람들은 자기들만 구원받기 위해서, 자기들만 치료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는 것, 곧 주변을 돌아보지 않아요. 내 것만 채우면 된다라는 마음, 이것이 사람들의 욕심이죠. 

 

* 예수님께 몰려든 사람들 : 환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한 상태 

 

자기 중심에서만 생각을 하기 때문에 다른 주변의 소외된 사람, 내 주변 사람을 보지 못하는. 그래서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이 거대한 사람들인 군중이라고 하는 장벽이 또 다른 장애물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환자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한 겁니다. 아니면 그 당시 유다 사회의 사고 방식으로 병이라는 것이 죄의 결과, 죄 때문에 육체적 질병이 생긴 것이다. 그러기에 그런 사고관 때문에 중풍 병자라는 죄인이 예수님께 접근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사람들은 병을 앓고 있으면 그 사람은 죄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가까이 하면 안 된다라는 생각 때문에 예수님께 가는 거를 막고 있었다라고 볼 수도 있다는 거죠. 

 

* 당시 유다 사회에서 병은 죄 때문에 생긴 것으로 인식함 

 

그래서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지혜를 짜냅니다. 아주 독특한 방법이죠. 그들은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그 구멍으로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놓는 것이죠.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마르 2,4) 여기서 지붕을 벗겼다는 것이 우리 상식으로는 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겠습니다. 다만 당시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를 생각해 보면 납득이 갑니다. 

 

당시 일반 가옥은 단층으로 되어 있었고 지붕은 편현했어요. 그리고 집 밖으로 난 계단을 통해서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이 지붕은 나무로 된 들보를 들어 얹고, 나뭇가지나 갈대 같은 것들을 놓은 다음 흙으로 덮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을 둘러싼 군중의 벽을 뚫고 예수님께 다가가기는 쉽지 않았던 상황에서 이렇게 편편한 지붕을 벗겨낸 것이죠. 그러다 보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쉽게 뜯을 수는 있지만 흙부스러기나 나뭇가지들이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겠죠. 


* 당시 이스라엘 집의 구조 : 단층 구조, 편편한 지붕 

 

그리고 성경에서 '지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로 얘기하면 옥상이에요. 성경에서 옥상은 좀 의미가 있어요. 구약 성경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을 선발(1사무 9,25) 할 때 옥상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고, 사도행전에서도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에게 가서 세례를 주는 장면, 이방인에게 세례를 주는 장면 바로 앞서 환시의 장면들도 지붕 위에 올라가서 봤습니다. 그러니까 지붕 위에 올라갔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의미도 돼요. 뿐만 아니라 우리 가을에 마당에 고추 말리죠. 그런 식으로 곡식을 말리기도 하는 장소가 지붕, 옥상이었습니다. 

 

* 성경에서 지붕 - 옥상 / '지붕에 올라갔다' - 기도

 

여하간 지금은 사람들이 막고 있었기 때문에 중풍 병자를 도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지붕을 벗겨서 예수님 앞에 내려보냈다. 자, 이것은 중풍 병자를 도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예수님께 환자를 보내고 싶은 것이죠. 어쩌면 흙이나 나무, 갈대 등으로 만든 장애물의 두께보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편견이라는 장애물의 두께 그것이 훨씬 뚫기가 어렵다라는 것을 또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여하간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그들의 믿음을 이렇게 보고 또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가야 되겠다라는 의지가 돋보이는 그런 장면이죠. 

 

* 믿음은 마르코 복음의 기적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 2,5) 

자, 그들의 이런 행동을 보시고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어여삐 생각하시는 거죠. 사실 믿음이라고 하는 것, 마르코 복음의 기적 이야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앞으로 펼쳐지는 기적 이야기에서 이 믿음은 기적을 이끌어 내는 거예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제 기적 이야기에서 자주 나오게 되는데요. 예수님의 기적은 주도적으로 당신이 일으키기 보다는 예수님이 왠만하면 기적을 일상적으로 남발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기적을 간구하는 이가 그 믿음을 드러냄으로써 그 믿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마르코 복음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데요. 

 

* 요구되는 믿음 : 예수님의 능력을 굳게 믿고 예수님의 인격에 자기를 조건 없이 내어 맡기는 것 

 

여기서 요구되는 믿음은 예수님의 능력을 굳게 믿고 예수님의 인격에 자기를 조건 없이 내어 맡기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병자를 데리고 온 이들에게서 바로 그런 믿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다음의 이야기에요. 이제부터 펼쳐지는 이야기가 치유 이야기에서 갑자기 논쟁으로 바뀌게 됩니다. 5절에서 10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애정이 듬뿍 담긴 호칭으로 "얘야!"라고 하시죠. 이제 번역을 달리하면 "내 아들아!" 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태도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일에서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어요.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냉대하는 죄인에게 '아들아, 얘야'라는 정말 애정이 담긴 표현을 해주시죠. 자비로운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이 말씀은 이렇게 해석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너의 죄를 용서하셨다." 지금 예수님의 사죄 선언은 육체의 치유 못지 않게 정신 해방의 선언이었던 겁니다. 

 

*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 '하느님께서 너의 죄를 용서하셨다.' (육체의 치유 못지 않은 정신 해방의 선언)

 

병을 죄의 결과로 보는 유다인의 사고방식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용서의 말을 할 때 그것은 먼저 더 깊은 악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육체의 병에서 해방되는 것은 치유가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중풍 병자에 대한 용서의 알림이 마치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를 하신 것처럼, 용서의 권한을 갖고 계신 분으로 들려지고 보여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규정한 구약 성경의 절차들과 다른 방식으로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어요. 

 

* 예수님의 중풍 병자에 대한 용서 

⇒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용서의 권한을 갖고 계신 분처럼 보여진 것  

 

구약 성경 레위기 4장에서 7장과 16장을 보면 속죄 제물에 관한 규정과 속죄일에 관한 규정이 언급됩니다. 특히 성전에서 속죄 제물을 봉헌함으로써 죄의 용서가 이루어져요. 그런데 그런 규정 절차를 예수님이 지키지 않았다는 거죠.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마르 2,6) 

 

* 레위 4ㅡ7장. 16장 : 속죄 제물에 관한 규정과 속죄일에 관한 규정 언급 

 

율법 학자들은 모세의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전통을 고수하는 이들인데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예수님이 지금 구약의 레위기 절차를, 속죄 규정을 지키지 않는 것이죠. 그리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니까 그 발언이 귀에 굉장히 거슬리는 거예요. 왜나하면 율법 학자들이 말하는 용서라고 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거든요. 

 

* 율법 학자들에게 용서란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것 

 

그러기에 실제로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겁니다. 도대체 저자가 누구인데 죄를 용서한단 말이냐? 그런데 일단은 자문하고 있어요. 스스로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죠.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예수님께서 모든 적법하고 확실한 절차를 제쳐 두고 확고하게 용서를 선언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직 하느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당신도 하실 수 있다라고 주장을 하십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율법 학자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발언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죠. ""하느님을 모독하는군."(마르 2,7)이라고 생각하는 율법 학자들은 그래서 가장 혹독한 비난을 예수님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재미있는 것은 이제 오늘서부터 보시면 알아요. 2장 안에서 이런 율법 학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비난이 조금씩 발전해 나갑니다. 지금은 속으로 자기들한데 자문을 하죠. 이제 다음 시간에 살펴볼 장면에서는 간접적으로 조금 진전해서 제자들에게 물어봐요. 그다음에는 대놓고 예수님께 얘기하고요. 그다음에는 예수님을 심문하는. 결정적으로 대사제의 심문에서 예수님이 신성모독 죄로 사형 언도를 받는 겁니다. 지금 처음 단계에서는 스스로 자기들 안에서 속마음으로만 얘기를 해요.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예수님의 치유 기적 이야기가 이제 예수님의 죄에 대한 용서, 사죄권을 증명하는 이야기로 바뀌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된 논쟁점은 정말로 예수님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갖고 계시느냐? 바로 이 문제죠. 

 

유다인들은 말씀드린 대로 예로부터 죄의 용서를 하느님의 고유 권한으로 여겼습니다. 유다인들은 예로부터 이렇게 하느님의 것으로 죄의 권한을, 용서의 권한을 생각한 것은 오직 하느님 만이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리고 죄의 용서는 지금 현세에서의 일이 아니라 저승에 가서 일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는 용서를 받는다는 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고, 하느님 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지금 이 세상에는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겼던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마르 2,8) 하고 질문을 하시죠. 여기서 '영'이라는 단어에 우리가 좀 집중해야죠. 영은 직관과 정서와 의지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내면을 대표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들의 얼굴을 통해 드러난 속마음을, 숨은 뜻을 예수님이 보셨다는 겁니다. 

 

* '영'은 직관과 정서, 의지의 자리. 인간의 내면을 대표하는 부분. 

  그들의 얼굴을 통해 드러난 속마음, 숨을 뜻을 예수님께서 보신 것

 

자기들은 그냥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속마음으로 중얼거린 거를 '남이 모르겠지' 생각했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보셨다는, 알아채셨다는 거죠.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이 당신에게 있다는 예수님의 선언이 이 유다인 율법 학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고 받아들이기에는 두 귀와 마음으로 몹시 거슬리고 불편하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알아챘다는 거죠. 심지어 마르코는 여기서 다른 면도 우리에게 제공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둘러싼 사람들, 바리사이들, 율법 학자들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예요. 겉으로는 책을 읽고, 겉으로는 지식의 양은 많은 듯 보이지만 속마음, 깊이 있는 내용 안에서는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수박 겉핥기 식의 공부로 지식 나열이나 지식 자랑만 하려는 율법 학자들. 깊은 성찰 없이 단순히 주어진 규정을 행동으로만 옮기려고 하는 바리사이들의 무모한 용기. 이것과는 급이 전혀 다른 바로 그런 사고와 관찰력으로 예수님이 사람들의 모든 거를 꿰뚫어 보고, 심지어 죄의 용서의 권한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 예수님과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을 비교하는 마르코예요.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마르 2,9)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 그들이 속으로 자기를 비난하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비난에 있어서 다음의 방법으로 반박을 하세요. 이 반박은 여러분들이 좀 기억을 하셔야 됩니다. 

 

* 마르코 복음서의 특징 

⇒ 예수님께서 불일치의 상황에 답하기 보다 오히려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응수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논쟁을 펼치는 사람들,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바로 답변을 안 해요. 그들이 질문을 던질 때 그 질문에 답변을 하시지 않고 예수님이 다시 역으로 질문을 하셔서 답을 하신다는 거예요. 그들이 답하게끔. 그러니까 그런 장면이 계속해서 반복이 돼서 나옵니다. 지금 2장도 그렇지만 3장에 가서도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이렇게 역으로 질문을 하시고요. 

 

11장에 가서도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마르 11,30) 세례자 요한의 세례에 관한 권한에 대해서 질문을 할 때도 예수님이 답을 안 하시고 역으로 질문을 하십니다. 12장에서도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마르 12,37) 이렇게 곤란한 질문을 받으실 때, 양자택일의 질문을 받을 때, 역으로, 거꾸로 답을 해서 그들이 딜레마에 빠지게 하신다라는 거죠. 그런 방법을 여기서도 사용하고 계시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 당신을 비난하는 이들에게 용서하는 권한이 당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들, 이제 또 다른 방법은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방법과 함께 또 다른 방법을 하나 쓰시는데, 이 장면에서 이거를 제일 많이 질문을 하세요. 예수님이 사용하신 방법이 뭐냐 하면, 당시 유다인들의 어떤 사실에 대한 증명 법칙인데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에로'라고 하는 법칙이 있어요. 유다인들이 어떤 논쟁을 펼칠 때 큰것에서부터 작은 것에로라고 하는 원칙을 가지고 사실 증명을 합니다. 

 

*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에로' : 유다인들의 법칙에 따라 증명 

 

예수님이 이 유다인들의 법칙을 그대로 사용하셨다라는 거예요.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에로' 그러니까 큰 거를 하나 예로 들면 나머지는 다  따라온다는 거죠. 만일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하실 때 더 큰 것 즉 관찰할 수 있다고 확인할 수 있는 육체적인 치유를 이뤄낸다면 이보다 작은 거, 사제 선언 그러니까 말로 "너 용서받았어!"라고 하는 것이 당연스럽게 헛말이 아니라는 게 확증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치유의 말을 하셨고 그 사람은 병이 나았던 겁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이 휘두르던 무기로 율법 학자들을 친 셈이죠. 

 

그러니까 처음에 예수님이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니 사람들이 의심을 가질 거 아니에요. 그 권한이 저 사람에게 있는 거야?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이 생각하는 원칙대로 "그래, 그러면 병이 낫는 거를 보여 주면, 기적을 보여 주면 내 말이 헛된 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겠지." 하고 이 방법을 쓰셨다는 겁니다. 그래요. 중풍 병자는 죄를 용서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바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율법 학자들에게 반문하셨고 또 그들의 비난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가를 이렇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신 것 

⇒ 예수님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이 증명된 것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자, 여러분들 마르코 복음서에서 이제 처음으로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쓰셨어요. 이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이 마르코 복음서 뿐만 아니라 마태오, 루카, 요한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부르실 때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을 씁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예수님한테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아요. 예수님 당신이 자신을 얘기할 때 사람의 아들, 인자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사실은 유다교 묵시문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어요. 다니엘서 7장 13절에서 14절입니다.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3-14) 

 

원래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 신과 구별되는 일반적인 표현을 가리켰는데 유다교 묵시문학, 이 다니엘서 7장 13절에서 14절에 오면서 이 사람의 아들이 '메시아',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현이 됐어요. 그래서 그냥 보통의 사람을 가리키는, 신과 대조되는 평범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메시아를 가리키는 표현, 전능하신 하느님의 권한을 갖고 오실 분으로 바뀌게 됩니다. 유다교 묵시문학 안에서. 


이것이 예수님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고 예수님이 이 말을 즐겨 사용하신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 메시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그리스도, 다윗의 후손이시여 등 이런 직접적인 메시아를 가리키는 당신 자신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그러니까 그것이 맞는데 그것이 잘못 이해되면 하느님께서 생각하셨던 올바른 메시아 상이 아닌 정치적 메시아, 나의 어떤 바램을 이루어 주시는 분, 이런 식으로 오해될 수가 있어요. 그래서 그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면서 밝혀 주고 싶었던 참된 메시아 상은 제가 이제까지 강의하면서 어떤 모습이라고 그랬죠? 십자가를 통해서만.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마자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하고 신앙 고백을 하죠. 십자가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다른 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제 몸 값을 지불하는 그런 메시아 상이거든요. 

 

그런데 잘못된 메시아는 그런 희생이 없는, 십자가가 없는 메시아를 가리킬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신 하느님 뿐만이 아니라 메시아를 동시에 언급할 수 있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셨다는 겁니다. 그 표현이 지금 처음 나오는데 다니엘서에서 '사람의 아들'은 인간과 다른 모습이지만 그래서 이제 하느님으로써 전능하신 분의 힘을 받아 오시는 분. 그런데 거기에는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 그런 표현이 없었죠. 

 

* 마르코 복음서의 예수님 

⇒ 스스로를 '지상에서 활약하는 사람의 아들' , '고난을 겪을 사람의 아들' , '종말에 다시올 사람의 아들'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이 '사람의 아들'에게 어떤 권한이 있다는 거예요? 하느님 만이 갖고 계시는 죄의 용서의 권한도 갖고 계시다는 거. 그러기에 이제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지상에서 활약하는 '사람의 아들', '고난을 겪을 사람의 아들' , '종말에 다시 올 사람의 아들'로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즉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이 땅에서 이루여졌음을. 바로 예수님이 그런 용서의 권한을 갖고 계시는 하느님의 특별한 대리자라는 것이 여기서 선언되고 있는 것이지요. 

 

* '사람의 아들' 

⇒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권한을 행사하는 하느님의 특별한 대리자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일어나다' 곧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다, 부활하다라는 표현이 되는 거죠. 뿐만 아니라 '들것을 들라.' 이것 역시 오랫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누워만 있던 중풍 병자가 새롭게, 더 이상 누워있지 않음, 병자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집으로 돌아가거라." 곧 다시는 죄 짓지 말라는 얘기지요. 다시 죄에 있던 상태로 가지 말고 새로운 삶,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새로운 구성원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고 하는 것. 그러기에 실질적으로 중풍 병자에게 죄의 용서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일어나다" ⇒ 죽은 자의 부활에서 다시 사용되어짐 

* "들것을 들라" ⇒ 죽은 듯이 누워있던 병자에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음

* "집으로 돌아가라" ⇒ 당신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

 

그리고 12절 마지막에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어요. 이제까지 1장에서도  지난 시간에 회당에서도 그렇고 시몬 베드로의 집에서도 그렇고 예수님의 말씀과 구마 기적, 치유 기적에 사람들이 반응했어요. 아, 새로운 가르침이다. 더러운 영도 복종하는구나. 이런 사람들의 반응이 있었습니다. 지금 중풍 병자의 치유에도 이제 반응이 드러나죠.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마르 2,12) 

 

앞서의 반응과 조금 차이가 있어요. 물론 병자도 1장에서 제자들이 그러신 것처럼 '곧바로' 일어나서 자기 삶으로 돌아가죠. 예수님의 말씀대로. 죄 짓지 않는 새로운 삶으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반응도 이전과 달리 조금 더 확대돼요. 어떻게 표현합니까?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왜 하느님을 찬양했을까요? 죄에 대한 용서의 권한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음을 보았기 때문에. 

 

앞서 1장은 사람들의 반응이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거는 없었어요. 그냥 놀라기만 하죠. 지금은 이제 예수님에게서 죄의 용서의 권한이 있다는 걸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이 드러났기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는 모습. 그래서 조금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 모습을 우리는 오늘 보았습니다. 

 

그래요, 이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사명을 갖고 계신지 우리는 조금 더 진전된 모습 안에서, 상황 안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내용들인데요. 예수님의 권위가 새롭게 증명되는 사건들 속에서 이렇게 하느님을 찬양하고 놀라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을 더 불쾌하게 여기고 예수님께 적대심을 갖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도 서서히 늘어난다는 것. 이런 모습도 우리가 살펴보게 되는데요. 다음 이어지는 두 번째 논쟁 안에서 우리는 구체적인 모습을 더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 이 시간 갈릴래아 논쟁 두 번째 장면 여러분들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http://cafe.daum.net/bible100weeks/UJbt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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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석신부, 마르코복음, 갈릴래아, 갈릴래아 논쟁, 사람의 아들, 다니엘서7장, 묵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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