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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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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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20-02-21 ㅣ No.136210

 

오늘 복음의 제일 첫머리에 나오는 말씀이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많은 분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진짜 아무리 신앙에 문외한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건 몰라도 이 말의 의미 정도는 다 알며 신앙생활을 할 겁니다.

 

사람이 어떤 가르침을 행하려고 하더라도 어쩌면 어려운 것보다 평범한 듯해 보이지만 기본을 실천하기가 힘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기본이 더 어렵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내 뒤를 따른다는 게 무엇이 될까요? 저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봤습니다.

 

바로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 설정과 예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관계인 부모와 자녀의 관계 설정 두 가지로 묵상해봤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할 때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근데 오늘 복음 말씀을 잘 살펴보면 이 말씀 앞에 전제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버리고가 먼저 등장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다는 게 무엇일까요?

 

흥미로운 건 이 말씀 뒤에 따르는 내용이 좀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자녀가 되는 길을 설명해 주시면서 갑자기 목숨이야기를 하십니다. 무거운 주제를 언급하십니다. 저도 아침에 이 부분만 한 30분가량 집중 묵상해봤습니다. 왜 갑자기 난데없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제 상상으로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또 자녀가 되는 길을 선택한다면 그 길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고 그걸 각오해야 한다는 말씀이라 내 뒤를 따르르면 그걸 알아야 한다는 걸 말씀해 주시는 뜻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 위험 중에 하나가 바로 목숨까지도 잃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역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합니다.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듯하지만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찌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 목숨이라는 존재가 어느 시점인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잃는 시점은 이 세상이고 구하는 시점은 바로 우리의 영혼이 나중에 가게 되는 그 공간과 시점에서 목숨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이해를 해야 이 말씀이 논리에 맞을 것 같습니다.

 

비근한 예로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사도들이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 바오로, 야고보 등 많은 사도와 그 제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종말에 가서는 예수님께서도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내 말이 무엇일까요? 저는 아마 이 말씀이 복음이라든지 계명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하고 말씀하시는 걸로 봐서는 예수님의 말씀인 하느님의 말씀을 천금 같이 여기려면 절개를 지키고 소신이 있어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저는 그렇게 묵상을 해봤습니다.

 

이 말씀은 어쩌면 복음의 핵심 정신인 황금률을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더 재확인 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가 없을 것이고 그러면 어디 감히 제자라고 말하기가 참으로 무색할 것입니다.

 

천금 같이 여기면 나중에 우리의 영혼도 천금 같이 여겨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한편으로 달리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바로 그 길은 예수님의 말씀인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믿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믿음이라는 건 무엇인가를 단순히 믿는다는 마음이 믿음일까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는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로 아브라함을 언급하십니다. 아브라함하면 어떤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를까요? 바로 믿음의 조상이며 또한 믿음의 대명사로 불리어집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느님께서 번제물로 바쳐라고 하셨을 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생떼 같은 자식임에도 눈물을 머금고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순종을 해야 하겠기에 기꺼이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바로 말씀에 순명하고 행함으로 몸소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했기에 야고보 사도는 그의 믿음이 완전해졌고 또한 하느님께서도 그의 믿음을 의롭게 여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이것으로 하느님의 벗이라는 영예까지 얻은 것입니다. 참으로 가슴 벅차지 않습니까? 그저 한낱 하느님의 피조물인 신분에서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하나만으로 하느님의 벗이라는 영예로운 신분까지 신분상승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시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보겠습니다. 믿음에는 실천이 뒤따라야 하고 그걸 실천하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천금 같이 귀하게 여겨야 되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는 그걸 실천하려고 하려면 지조와 절개로 소신을 가지고 그 마음에 변절이 없어야 될 것이며 그런 와중에 죽음이 설령 뒤따른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마저도 내어드리겠다는 마음으로 따라야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이고 또한 자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비로소 그렇게 되었을 때 그때의 그 영광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별이 되어 빛날 겁니다.

 

바로 그게 이루어지려면 예수님의 말씀인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에 해답이 있다고 봅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게 그럼 과연 무엇일까요? 많은 것이 있겠지만 비근한 예로 자신을 부인하는 것일 겁니다. 자신의 아집이라든지 고집과 같은 것 말입니다.

 

아집과 자아로 가득 찬 상태에서는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건 다른 의미에서는 그 상태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으로 들어올 수가 없는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이해할 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버렸을 때 하느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다는 것일 것이고 그런 조건에서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것이라면 결국은 우리 스스로가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보이는 듯하지만 실제는 자아가 버려진 상태에 있는 우리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하느님과 같이 십자가를 마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오르는 것과 같은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이런 생사의 고락을 함께 한 영광의 역사 또한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지워지지 않는 영광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영광을 입게 되리라는 상상을 한번 하게 되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무수한 십자가를 고통의 십자가로만 여기지 않고 사랑의 십자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신앙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묵상을 해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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