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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떠남!...[감곡성당 김웅열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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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옥 [mo-1002] 쪽지 캡슐

2009-04-12 ㅣ No.363974

                                                                  
                  
 

 

      매괴 성모님 순례지 김웅열 신부님

  

 

†찬미예수님

저는 어제 밤에 밤새 얻어맞았습니다.

저게  무슨 말인가!

감기, 몸살로 온 몸이 아파요....그러니 밤새 얻어맞은 거죠?
감기 조심하시고~~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멍해서~~

정신 차리고 강론을 해야 하는데~~

‘주님, 이 미사 잘 마칠 수 있게 해 달라고....저를 향해서 화살기도 쏘아 주세요!’


부제님께서 부제서품 받고 오늘 처음으로 복음강론을 읽으셨는데

부제발을 받아 가지고 목소리가 쩌렁쩌렁하죠?

저 목소리가 사제가 되어 복음을 읽을 때도 천천히 또릿또릿해야 하는데~~

나중에 세월이 지나면 우물우물...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자꾸 직업이 되어버립니다.


여러분, 사제는 직업입니까?

직업이 아니죠?

사제생활이 내년이 은경축이고 올해가 24년째인데.....

세월이 가면 갈수록 제일 어렵고 힘든 것이 자꾸 직업화 되어 간다는 의식입니다.

그냥 미사 드리는 기계!

성사 집행하는 기계!


사제는 절대 직업이 아닙니다.

늘 깨어서 정신 차리지 않으면 직업인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서 영성이 없어지고 기술, 테크닉만 남기 시작하죠~~

사제에게서 영성을 바라보지 못하고 거룩함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 사제는 시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교님이 사제들을 인사발령 할 때 전해 내려오는 불문율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 출신 고장에는 절대로 파견을 하지 않지요..

예를 들면 감곡본당 출신 신부님들은 절대로 감곡본당신부가 되지 않습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


자기 고장 사람들에게는 떠들어봐야 솔직히 폼이 안 납니다.

권위가 안 섭니다.

동네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내 살아온 꼬라지를 다 알고 있거든요~~

‘아유~~ 저 자식 코 찔찔 흘리고, 맨 날 소금 얻으러 다니더니

어떻게  신부가 돼 가지고~~아이구~~ 출세했어~~ ’

아무리 얘기해 봤자 말발이 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2000년 동안 내려오는.....글로는 남겨 있지 않지만 불문율이 뭐냐?

자기출신 본당에는 절대 사목을 못 합니다.

저야 고향이 인천이니까 청주교구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감곡출신은 죽었다 깨도 감곡본당신부를 못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 고향 나자렛에 왔을 때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아주 어렵고 혹독한 시련을 겪으시는데~~

내 어릴 적, 소년 시절, 아버지, 어머니, 나의배경을 알고 있는

바로 그런 곳에 가서~~

어떻게 보면 발가벗겨지는 겁니다.

그리고 용서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랍비로 오셨는데 랍비로 보지 않습니다.

오늘 회당에 가셔서 가르치셨죠.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랑이요, 존경과 놀라움의 가르침이 아니라~~

경멸로 받아들이고 분개합니다.

'예수 같은 저런 배경을 가진 저 인간이 감히 우리를 가르쳐?

네 집안을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첫 번째 이유>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이 말은 뭐겠습니까?

요셉의 직업은 목수요~~.

다시 말하면 하찮은 노동을 하는 비천한 노동자로 봅니다.

‘저것 목수 아들 아냐?’


지금은 손재주가 좋으면 출세합니다.

TV에도 나오고, 돈도 많이 벌지만.....

옛날에 유다땅에서 목수는 하층민, 천민이며~~

나무를 가지고 일거리를 얻어~~

닭장서 부터 집 짓는데 가구까지 고쳐주고~~

밥 한 끼 얻어먹고 살아가는~~

아주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노동자였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경멸한 이유>

예수님이 당신 아버지 요셉처럼 목수, 노동자로 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존경할래야 할 수 없었던 겁니다.

말의 내용 보다 말하는 사람이 누구였느냐!

하는 것이 고향사람들에게는 더 중요했던 겁니다.


물론 그 사람의 출생 가문, 그 사람의 재산....

이런 것은 인격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절대로 이런 유혹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사람들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집안 배경이라든지 또는 외부적인 것....

사람을 평가하고 싶다고 하는 그 유혹 앞에 우리는 늘 직면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인격을 보다는 출신 성분을 많이 보고 판단합니다.


“아이구 저거~~ 쟤 아버지 우리 집에서 머슴을 살았어...참 어디 가서 공부하고 오더니 그 자식 출세해 가지고~~ 우리동네 경찰서장으로 왔으니...

지금은 행세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형편없던 집안이었어~~

저 할머니가 밥 얻어다가 손주 키웠던 집안이야....”

그 사람의 참된 됨됨이를 알지 못합니다.


<두 번째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던 이유>

오늘 복음과 비숫한 복음이 마르코 복음 6장 1절 이하

“저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요셉은 이미 죽었음을 나타냅니다.


이래서 수수께끼가 하나 풀립니다.

이것으로 왜 예수님께서 30이 넘도록 고향을

떠나지 않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20세부터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메시아노릇을 했다면

3년 공생활 하다가 죽으시지 않을 것이요~~

10년 넘게 공생활을 하셨을텐데~~

30세까지 고향 나자렛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양아버지 요셉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머니를 돌봐 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이 30세 될 때까지 어머니를 모시다가

30이 되어서야 당신의 사명을 다하기 시작했죠!

 

마르코복음 6정 1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이거 과부의 아들이 아니야~~

저런 가문에서 어떻게 똑똑한 자식이 나올 수 있겠나!”

과부를 경멸하고 조롱하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노동자 출신이기에 거절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아들이라는 당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이 사건 이후에는

나자렛에서는 어떤 기적도 하지 않으시고 어떤 치유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서 묵상해야 할 것은

첫째, 본인자신이 중병환자인데도 불구하고 본인이 병 낫기를

거부한다면 아무리 훌륭한 명의가 온다 하더라도

“ 나 아픈 데 없어요!”

하면 어떤 병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선입견이라고 하는 중병을 앓고 있었지만

본인들이 중병에 걸린 지 모르고 예수님이라고 하는

명의가 왔는데도 무시했고~~

오늘 복음을 보면 달려 나가서 벼랑에 끌고 가 떨어트려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환자가 살려고 하지 않을 때, 의사는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한 고향인이고 친척들이라고 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고 한 고향 나자렛에 산다고 하는 것이

천국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제의 부모라고 하는 것이 천국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신학생의 부모라고 하는 그 자체가 구원의 표시는 아닙니다.

수녀의 부모라고 하는 것 그 자체가 구원의 표시가 되지 않습니다.

성모순례지에 산다는 그것 하나만으로 구원 받았다고 하는 표시는 아닙니다.

왜?
예수님과 한 고향 사람들도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병 낫기를 거부하는 환자는~~

의사를 거부하는 환자는~~

고통을 당하다가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나자렛에서 쫓겨난 이후

단 한 번도 자기고향으로 가지 않으십니다.

갈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사랑했고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은혜를 베풀고 싶었던 것이

자기 고향사람들이요, 친척이었지만~~

나자렛 사람들은 문을 잠그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겁니다.


오늘 우리들이 두 번째로 묵상해야 할 것은 나쁜 분위기 속에서 강론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사제들이 절감합니다.

기대에 가득 차 있는 곳에서는 적은 노력으로도 성령에 불을 붙입니다.


미사 때 교우분들의 얼굴을 봅니다.

이제 사제 생활 20년 넘게 하면 딱 제대에 올라서면 교우들의 얼굴이 보입니다.

새 신부들은 앞이 하얗고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누구의 눈이 오늘 사제의 강론을 들으려고 두 눈이 똘망똘망한가!

저 사람은 샤터가 내려왔네!

속으로 졸고 있구나!

저 형제 얼굴은 나를 쳐다보고 있지만 머릿속은 다른 데를 헤매고 다니는 구나!

얼굴을 보면 대략 감이 옵니다.


뭔가 얻으려고 하는 그런 기대가 가득 차 있는 곳에서는 사제의 그 말이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쫘~악~쫙~~ 빨아들이는 것을 사제도 느낍니다.

철야기도나 피정 때라든지 가보면 뭔가 얻으려 기대가 가득 차서 바라보니까~~

본인이 갈급해서 온 사람들이다 보니까~~

7~8시간 강론을 해도 숨을 죽이며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온 신경과 귀를 사제의 강론에 기울입니다.


그러나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그런 무관심한 분위기 속에서는

어떤 박력에 찬 설교도 생명이 없이 그만 땅에 떨어져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안 들었던 겁니다.

하느님 자체이신 메시아가 강론을 하는데도~~

회당에 있는 나자렛 사람들은

 ‘신통하게 얘기를 하기는 하는데 좋은 얘기다...’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머리로 받아 들였고~~

‘어, 똘똘한 얘기 하네~~그런데 저것 요셉의 아들 아니야~~ 하긴...

아이구~~참 출세했다~~ ’


나쁜 분위기 속에서는 평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저는 군종신부도 오래 했고 교도소 사목도  6년 정도 했습니다.

교도소에서 가면 교도소장이 마이크를 잡고

“여러분들, 오늘 귀한 신부님 모시고 인격지도 받습니다. 자, 졸지 말고 차렷! 열중 쉬엇! 신부님 얘기 하시죠~~”

푸른 죄수복을 입고 수백 명이 앉아 있는데 살인범, 강간범, 조폭... 전과자들 쳐다보는 그 가운데 서면 쫄아 붙습니다.

인상이 험악한 조폭이 째려보면 말이 나오려 하다가도 쑥 들어갑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아무리 강하게 마음을 먹고 해도 말이 결코 먹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제가 군종신부 때 연병장에 일개 대대가 대열해 있는 곳에서 천주교신자

손들어 보라 하면 7~8명 손 들까 말까~~

개신교, 불교, 무종교....

그런 아이들을 불러 놓고 2~3시간 강론해야 합니다.

그 곳에서 처음부터 하느님, 성모님 찾다가 졸기만 하지....들은 척도 안합니다.

그 아이들과 싸이클을 맞추어 가면서 결국 하느님 쪽으로

씨앗을 뿌려줘야 하니까~~쉽지 않죠!

그게 바로 미쎠네리 선교사입니다.


아예 설교를 거부하는 곳에서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서로 미워하면~~

그들이 서로 이해하기를 거부하면~~ 서로가 오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마음의 문을 크게 열어 드릴 수도 있고

예수님 면전에서 문을 닫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내 집에서 예수님을 끌어다 벼랑으로 떨어트려 죽일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나자렛을 영원히 떠나서 다른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업적은 고향 사람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길 가에 버려진 돌 하나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영세 받았다는 것으로 우리는 절대 안심하지 못합니다.

세례 받은지 6~70년 되었다고 천국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성직자, 수도자 부모라고 천국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성모순례지에 교적이 있다는 자체가 천국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여기가 비록 성모성지이지만 우리 감곡신자들이 서로 반목하고 불신하면서 평화의 분위기를 깬다면 성모님은 저 위에서 걸어내려오셔서 다른 곳으로 가실 겁니다.

이곳에 성모님이 사시지만 우리 신자들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성모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내려오셔서 딴 곳으로 가실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처럼....

 

 

사도행전 13장 46절의 말씀을 끝으로 오늘 강론을 마칠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당신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그 영원한 생명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으니 우리는 당신들을 떠나 이방인들에게로 갑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사제의 입술을 통해서

잠시 후에는 성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오십니다.

우리들이 예수님께 가는 것과 비교가 할 수 없을 만큼

간절하게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문을 닫았을 때는 예수님은

다른 곳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

나자렛 고향에서 예수님은 많은 상처를 받고 떠나셨습니다.


여러분의 집안, 여러분의 마음, 영혼도 성체를 모실 때마다 

우리들의 삷이 신앙인답지 않을 때......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나에게서 떠나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주님, 저희들은 부족합니다. 죄 덩어리입니다. 늘 결심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약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저희들 버리지 마시고 성체로써/ 말씀으로써/ 저희를 성화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아멘

 

♧느티나무신부님ㅡ2007. 1. 28   연중 제4일 강론 말씀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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