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8일 (수)
(백)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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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데레사 성녀와 쌍벽 이루는 ‘위대한 신비가’ 십자가의 성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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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kimhh1478] 쪽지 캡슐

2015-05-12 ㅣ No.614377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십자가의 성 요한.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데레사 성녀와 쌍벽 이루는 ‘위대한 신비가’
3. 십자가 성 요한의 생애 ① 위대한 신비가 십자가의 성 요한

가르멜의 성인들 가운데 성녀 데레사와 쌍벽을 이룰 만큼

 영성사에 큰 획을 그은 성인이 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라는 분으로

교회 역사상 ‘위대한 신비가’ 중에 한 사람으로 불리는 분입니다.

 

성인은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비 체험을 하신 분이자 이 체험을 체계적인 철학적,

신학적 개념을 바탕으로 전해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분이 쓰신 작품들, 예를 들어「가르멜의 산길」「어두운 밤「영혼의 노래」 같은 책들을 보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세상과 자신에게서 이탈하고,

또 어떻게 정화되어 가는지, 그리고 정화된 다음

어떻게 하느님과 신비적으로 합일하는지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흔히 가톨릭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회자되는 분이

13세기에 활동하셨던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입니다만,

그건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고,

 

영성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적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으로 위대한 성인으로 주저하지 않고

십자가의 요한 성인을 꼽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비 체험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른 사람들도 이해하고 자신들의 영적

여정에 적용할 수 있는 영성생활의 중요한 원리들을 주옥같은 작품들을 통해

체계적으로 소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십자가 성 요한의 영성에 대해 나누기 전에,

먼저 그 영성이 피어난 그분의 생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톨레도 출신의 개종 유다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1542년 6월 24일 스페인의 중부 지방인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인의 부모님은 본래 스페인의 중심지인 톨레도 출신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곤잘로 예페스이고 어머니는 카타리나 알바레스로,

아버지는 톨레도의 유력한 가문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집안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성직자로 혹은 거상으로 지내면서 상류 계급에 속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집안은 개종한 유다인 혈통이었습니다.

당시는 가톨릭 신앙만이 절대적인 사회 규범이었고 순수 스페인 혈통만이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개종한 유다인, 아랍인들은 그 출신 성분 때문에 사회에서

불이익을 많이 당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다계 혈통 집안이었던

십자가 성 요한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이러한 가문의 비밀을 숨기고

상인으로 열심히 살아서 마침내 성공한 부자 반열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요한의 조부모께서 일찍 돌아가신 탓에 아버지 곤잘로는 부모 슬하에서

유복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숙부댁에 얹혀살면서 숙부님을 도와야 했습니다.

장사 일을 도와야 했기에 자연히 많은 출장을 다녀야 했고,

중부 지방의 작은 마을인 폰티베로스에도 들르곤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장차 아내가 될 카타리나 알바레스를 만나게 됩니다. 카

타리나 역시 톨레도 출신인데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친분이 있던

폰티베로스의 한 부인을 도우며 얹혀살던 차였습니다.

지극히 어려웠던 유년 시절

결국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일생을 함께 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성인의 아버지 집안에서는 두 사람의 결혼을 심하게 반대했다고 합니다.

아내가 될 카타리나의 집안이 이슬람계 노예 집안 출신이었는데,

결혼 때문에 두 집안의 신원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면 결국 출신 성분이 드러나

가문이 위기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집안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1529년 폰티베로스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이 결혼으로 인해서 곤잘로는 톨레도의 자기 집안과 완전히 관계가 단절됐습니다.

곤잘로 부부는 폰티베로스에서 당시 그 지방 여인들이 쓰던 챙 없는 모자와

머릿수건 짜는 기술을 배워 근근이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합니다.

1529년에 결혼해서 1542년까지 이 부부는 아들을 셋 두었는데 요한은 그중 막내였습니다.

성인이 어린 시절 아버지 곤잘로는 친척으로부터의 소외, 생계에 대한 부담으로 인한

과로와 영양실조로 결혼 생활 15년 만에 중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어린 요한은 병환으로 누워있던 아버지 대신 어머니를 도와 베 짜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요한이 8살 되던 1549년 폰티베로스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성인의 실질적 고향 메디나 델 캄포

생활고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성인의 어머니는 자기 가족에게 보다 나은

가능성을 줄 수 있는 좀 더 번화한 도시로 이사할 것을 결심합니다.

그래서 폰티베로스 근처의 아레발로로 이사를 하게 되는데 그곳에서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1551년 보다 큰 도시인 메디나 델 캄포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살던 당시의 메디나 델 캄포는 대도시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번영을 구가하던 곳이었습니다. 특히 이 도시에는 상업이 번성했으며

일 년에 두 차례 5월과 10월에 국제 무역 시장이 열렸습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런 도시의 분위기를 한껏 만끽하며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성인은 10살에 이 도시로 이사해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해서 서원하는

21살까지 지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중·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질풍노도의 시기인 사춘기를 여기서 보낸 셈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비록 성인이 태어난 곳이 폰티베로스이긴 하나,

성인의 실질적인 고향은 메디나 델 캄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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