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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 만주의 친일파와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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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선 [inuit-_] 쪽지 캡슐

2012-06-23 ㅣ No.1555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89980

박정희, 만주 그리고 '친일'

 

역사문제연구소, '식민지 경험과 박정희 시대' 토론회




 
▲ 5일 세종문화회관 컨프런스홀에서 역사문제연구소 주최로 <식민지 경험과 박정희 시대> 학술토론회가 열렸다 ⓒ 오마이뉴스 최유진
 
 
 






'교사 박정희'의 '만주행'과 뒤틀린 한국 현대사


'교사 박정희'의 사적이면서도 돌연한 '만주행'은 결과적으로 보면

우리 현대사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할만 하다.

그가 만주행을 택하지 않았다면 '군인 박정희'는 없었을 것이며,

연장선 상에서 '5.16 군사쿠데타' '3공' '유신' '10.26' 등과 같은 단어는

우리 현대사에 등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930년대 후반 만주는 일면 신천지이자 '희망의 땅'이기도 했다.

근대사 이후로만 봐도 만주는 우리에게는 예사롭지 않은 땅이었다.

국권 상실 후 1910, 20년대 무장항일세력의 근거지이기도 했고,

이곳으로 터전을 옮긴 조선인 망명지사, 이주민, 유민들의 애환이 서린 서러운 땅이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가 찾아간 만주는 당시 일본의 괴뢰정부가 통치하던 땅이었고

단연 그는 개인적 출세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는 청와대 시절 만주행의 동기를 묻는 한 비서관에게 "긴칼 차고 싶어" 갔다고 밝힌 바 있다.




그 만주땅에는 이미 그와같은 세속적 야망을 가진 조선인이 없지 않았다.

그런 자들이 모여든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만주국 군관학교였다.

만주시절을 겪은 인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 시절의 경험을 떳떳치 못한 경력으로 여긴 탓인지

증언을 꺼리는 것은 물론 기록으로 남기는 것조차 흔하지 않았다.

정일권(국회의장, 국무총리)과 신현준(초대해병대 사령관, 교황청 대사) 정도가

'자기고백'을 했을 뿐이다.



'군인'을 꿈꾼 박정희..."긴칼 차고 싶어 만주 갔지"



만주국은 1931년에 발발한 '만주사변'에서 승리한 일본이 전리품으로 얻은 이듬해

중국 북동부 지역에 세운 일본의 괴뢰정부다.

수반은 영화 '마지막 황제'의 황제 부의(溥儀)로, 공식직함은 집정(執政)이었다.

당시 만주국 군대는 지역내 항일무장세력을 소탕하는 동시에 소련과 대치하고 있던

관동군의 보조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군대라기 보다는 경찰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신생국이 다 그러하듯이 만주국 역시 신속한 안정 확보를 위해 속성교육을 통해

장교를 양성하고자 했다. 건국 이듬해인 1932년 11월 만주국은 중앙육군훈련처를 세웠는데

그 위치가 옛 수도인 만주 봉천(奉天, 현 瀋陽)이어서 흔히 이 학교를 '봉천군관학교'라고 불렀다.

정일권 전 총리, 백선엽 전 육군대장 등이 이 곳을 제5기, 9기로 각각 졸업했는데

이 학교는 9기로 막을 내렸다. 1939년 만주국은 군대가 경찰기능을 넘어

국군으로서의 기능까지 수행할 필요를 느끼자 보다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위해

신경(新京, 현 長春)에 새로 육군군관학교를 문을 열었다.

흔히 이곳을 '신경군관학교'라고 불렀는데 박정희는 이한림 등과 함께 이곳 2기생으로 졸업했다.




만주 군관학교 출신들은 박정희처럼 체제순응적인 교육을 받았거나 (일본제국주의)체제내

출세지향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절대 다수였다.

'5족협화(協和)'(여기서 5족은 일본족, 한족, 만주족, 조선족, 몽고족을 지칭함)를 건국이념으로 내건

만주국의 군관학교는 엄격한 규율과 황민화 교육이 강조되었다.

이들 사이에 민족감정이 없진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체제 내에서의 경쟁차원에 불과했을 뿐

체제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런 동질성은 이곳 출신들이 박정희 쿠데타를 전후해

한일 양국에서 선후배 인연으로 뭉친데서 확인된다.


만주 군관학교 출신들은 박정희 정권의 창출의 주역 가운데 하나로,

또 초창기에는 버팀목 역할을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들이 도리어 정권의 걸림돌이 돼

'알래스카 토벌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제거되는 비운을 겪기도 한다.

다만 이들 가운데 정일권은 몸을 낮추고 산 까닭에 천수를 다했다.

한국, 일본, 중국 3국을 통털어 구시대의 만주인맥은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했다.




식민지 조선인의 '만주 경험'과 그 부정적 유산들



박정희가 생도시절(일본육사 2년 포함)과 보임시절을 통털어 5년여 청년기를 보낸 만주땅에는

군인들만 득실거린 것은 아니었다. 명색이 정부가 수립돼 있던 그곳에는

각 분야의 엘리트들이 자기만의 '희망'을 일구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에 만주국은 고급 행정관리 양성을 위해 관립대학(건국대)이나 양성소(대동학원) 등을 세웠으며,

또 일본의 고등문관시험을 본딴 만주국 고등고시제도를 운용했다.



건국 초기 만주국에는 전체 인구의 1%도 안되는 일본인들이 요직과 고위직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조선인 이민자(유민 포함)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조선인들의 진출도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초창기 만주국에서 고위관리를 지낸 조선인으로는 동경제대 출신으로 총무청 참사관을 지낸

박석윤(육당 최남선과는 처남매부간임)을 비롯해 간도성 성장을 지낸 이범익,

간도성 차장을 지낸 유홍순, 언론인 출신의 진학문(총무청 참사관) 등이 있다.



만주시절의 '경험'으로 박정희 정권과 인연을 맺은 사람 가운데는 군관학교 출신이 제일 많았다.

정일권(봉천5기, 총리 국회의장), 백선엽(봉천9기, 육참총장), 이주일(신경1기, 감사원장),

이한림(신경2기, 건설장관) 등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비 군출신자로는 대동학원 출신 가운데

최규하(외무장관), 황종률(재무장관, 국회의원), 고재필(보사장관, 국회의원) 등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그 외 이선근이 박 정권에서 문교장관을 역임했다.



이선근은 박정희와의 인연에서 특기할만한 사람이다.

그는 만주국 국민동원조직이자 일면 국회랄 수도 있는 협화회(協和會)에서

협의원(국회의원 격)을 지내면서 만주땅에서 명성을 날린 인물이다.

1941년부터 빈강성 오상현 안가촌분회 대표협의원을 지낸 그는 회의석상에서

만주국의 농산물 가격정책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발언을 두고 논문 발표자는 "이선근 단순히 일제의 주구로서

'외과적' 협력을 했던 것이 아니라 한 차원 높은 '내과적' 협력을 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즉 고차원의 친일파였다는 얘기다.


 
▲ 1967년 6월 동국대 총장시절 고려대장경 영인본을 가지고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을 찾은 이선근.
 
 
 


결론적으로 이선근이 "만주국 소수민족으로서 사상전(思想戰)을 했던 인물로 해방후

정훈, 국방사학, 국민교육, 정신문화의 각 영역에서 '결실'을 보게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이선근이 만주에서 경험한 반공태세, 총동원 국가체제 등은

박정희 시대에 와서 꽃을 피웠다는 얘기인 셈이다.


실지로 이선근은 사학자로 활동하면서 '화랑도'를 독자적으로 연구, 국민 정신운동으로 보급했으며,

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 초대 원장을 맡기도 했다. 동국대 총장시절 그는 대학생들 교련시간에

만주군(일본군) 군복차림으로 교내를 휘젓고 다녔다는 당시 동료교수의 증언이 있는 데

이는 박정희 역시 청와대에서 그와 유사한 행동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의 국민동원운동체계를 본딴 '새마을운동'



한편 박 정권의 대표적 성공사례이자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농촌 새마을운동 역시

따지고 보면 그가 만주에서 경험했던 총동원체제를 준용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위로부터의 동원체제 확립, 군대식 운영체계와 실천방식 등이 바로 그런 것이다.

특히 새마을운동이 농촌문제를 사회구조적인 이유에서 찾지 않고 농민의 나태,

농민정신의 결여 등에서 찾은 점도 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과 유사한 점이다.



조선총독부는 1932년 7월부터 1940년 12월까지 소위 '조선농촌진흥운동'이라는

관제 농민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총독부는 '자력갱생'을 통한 '농가경제 갱생'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경제갱생보다는 농민들의 체제부정적 변혁운동을 통제할 목적으로 입안한 것이었다.

이 무렵 박정희는 대구사범에 입학, 졸업 후 문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주목할 점은 박정희가 3년간 교사로 있던 이 학교는 경상북도 농도훈련소 가운데

'문경갱생농원'과 '신북갱생농원'의 경영주체 학교였다는 점이다.



즉 총독부는 농촌진흥운동을 지도하면서 학교 직원을 총동원하였는데

박정희가 부임한 학교는 지정학교였다.

바로 이러한 체험이 박정희가 농촌 새마을운동을 구상하고 전개하는데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이 크다. 당시 새마을운동은 대통령과 청와대가 주도하고

내무부가 실무 추진체였다. 또 사업 집행단계에서는 내무부 산하 지방행정기관이 중심역할을 맡았다.

즉 새마을운동의 근면 자조 협동은 농민들의 것이라기보다는 동원된 것으로,

관(官)에 보이기 위한 협동이었다. 새마을 지도자 가운데 군경력 출신자들이 마을단위 사업성과,

상부포상.지원 등에서 상대적으로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은 점도 특기할만 하다.





한일 양국의 '만주인맥'이 이뤄낸 한일국교 정상화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는 당시 야당과 학생들이 '굴욕외교'라며 거칠게 저항했음에도

박 정권은 이를 몰아부쳤다. 박 정권이 이를 강행한데는

대외적으로 한미일 3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진데다 여러 가지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성사시킨 주역들은 한일 양국의 '만주인맥'이었다.


일본측 카운터파트랄 수 있는 기시 노브스케 수상을 정점으로 시이나 에쓰사부로, 이시이 미쓰지로,

야쓰기 가즈오, 고다마 요시오 등 막전 막후의 인사 모두 만주국 관리나 관동군 출신으로

만주시절의 '경험'을 가진 자들이었다.



최고회의 의장 시절인 1961년 11월 11일 일본을 방문한 그는 유창한 일본말로

일본측 인사들을 감동시켰으며, 만주 군관학교 시절 교장, 동기생들을 만나 옛 인연을 되살렸다.

기시 수상 앞에서는 "명치유신의 지사라는 각오로 일해 나가겠다"는 얼빠진 맹세를 하기도 했다.


1963년 12월 대통령 취임식 경축사절로 방한할 예정이었던 오노 반보쿠가

일본 현지 기자회견에서 "나와 박대통령과의 관계는 부자(父子)의 관계와 같은 것이어서

아들의 경사스런 날에 아버지가 가는 것은 더없이 즐거운 일"이라며 망언을 늘어놓은 것도

이같은 배경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한일간의 만주인맥은 비단 정계 뿐만이 아니라

경제계 등에도 폭넓게 포진하고 있었다.


일제시대 이후 새로 형성된 소위 '신친일파'랄 수 있는 한일인맥의 원류는 이처럼

양국의 만주인맥이 터전을 마련했는데 이들에겐 몇 가지 사상적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미국을 정점으로한 동북아체제 형성에 복무하고 있었고,

둘째, 반공주의와 우익적 성향이 두드러졌으며,

셋째는 정치 경제적 이해가 서로 일치했다는 점이다.


이른바 '부산적기론'(부산이 적화되면 일본의 적화도 멀지 않다, 위험하다) 등의 양국 의존관계는

일본측에는 박 정권 경제원조를, 박 정권에게는 일본의 각종 원조의 필요성을 정당화 시켜주었다.

이런 와중에 삼성그룹은 양국의 인맥들을 이용, 차관도 받고 금수품을 밀수하여 폭리를 챙기기도 했다.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은 이 와중에서 불거진 것이었다.




'거민' 지속시켜...박정희 시대의 역사적 성격



1960년대 초입부터 70년대가 문을 닫을 때까지 무려 20년 가까이 지속된 박 정권은

단순히 기간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가장 변화가 컸던 시기에

한국사회를 지배했다는 점에 주목할만 하다.

이 무렵 한국사회는 경제성장에 걸맞게 민주주의의 성장도 갈망했으나

이같은 진보성은 좌절되고 말았다.

특히 식민지와 분단체제 하에서 '민(民)'의 의식은 성장이 제약을 받거나 왜곡되었다.


특히 분단체제 초창기 '비국민'이 제거된 후의 '국민'은 단순히 거주자로서의 '거민(居民)'에 불과했고

박 정권은 50년대 중반 이래 4.19를 통해 급격히 확산된 '민주적 민족적 국민'으로서의 자각 흐름을

이전 '거민' 수준으로 통제하고 동원하기 위해 창출된 권력의 성격을 지닌다고 평가했다.

결국 박 정권 당시의 경제성장정책은 이같은 흐름에 조응한 지배권력의 대응이었다.

한국사회에서 부자에 대해 존경심보다는 '천민자본주의'가 운위되는 것도

한국의 부르조아가 민주주의 성장과정에서 언제나 적대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의 정신적 유산은 지금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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