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 (수)
(백)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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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 하느님은 교회보다 크고 교리보다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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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영 [lby00523] 쪽지 캡슐

2017-01-09 ㅣ No.211983

[교회를 떠나야 교회가 산다-22] 한상봉 | isu@catholicnews.co.kr

하느님은 교회보다 크고 교리보다 넓다

 

깨어기도하여라 (루가 21:34-38)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 데 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닥쳐 올 이 모든 일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 '요한 복음 17장은 모든 사제의 공통된 기도'입니다.

(http://cafe.daum.net/lby00523/9LvK/571)

 

미래사목연구소(소장 차동엽 신부)의 <나의 신앙 우리 공동체-3단계/나의 인격다지기> 교재의 1과 첫 장을 넘기면 큼직하게 담긴 그림이 나온다.

 

가톨릭신자인 거복이가 불빛 아래서 성철스님, 법정스님, 틱낫한 스님의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 등 뒤쪽에 걸린 십자가와 성경 주변엔 거미줄이 쳐진 그림이다. 불교에 빠져 정신 못 차리는 가톨릭 신자들을 겨냥해서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것은 "교재를 만든 사람들이 불교에 대하여 어떤 열등감을 느끼고 있구나!"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의 본래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교가 정말 음습해져서 지나치게 방어적이 되고, 나중엔 아예 무분별하게 공격성을 드러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서적을 보면 배신한 애인처럼 되는가

 

한마디로 그림이 자못 병(病)적이다. 만일 거복이가 한사코 불교 책만 읽다가는 ‘배신한 애인처럼’ 모진 참변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원수조차 사랑하라던 스승 예수의 말씀이 이럴 때 더욱 절박하게 들린다. 원수도 아닌데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그분이 참 슬퍼할 것 같다.

 

이 교재는 1과를 마무리하면서 더 엄청난 이야기를 하고 있다. 21세기를 ‘자기계발’ ‘자아실현’의 시대라고 하는데, 이런 경향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처럼’ 되고자하는 오류에 빠지게 하기 쉽다고 말한다.

 

교재의 필자는 자기계발을 마법사가 되려는 허망한 능력 배양으로 여기고, 자아실현을 통해 스스로 신이 되어 정작 하느님을 경배하지 않게 될까봐 염려한다. 그러나 염려도 지나치면 병이 된다.

 

내가 예전에 만났던 이들 가운데는 더러 축지법 등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는 이는 있었지만, 아무리 이리저리 들어봐도 문선명 같은 교주가 아닌 다음에 스스로 ‘신적 위치’를 주장하는 사람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자아실현은 ‘스스로 충분히 기쁘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자 하는 것이고, 불교든 뭐든 따져보면 실천적으로 걸림 없이 자타(自他)를 묻지 않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 말만으로 이야기하자면, 하느님이 사랑 그 자체이신데, ‘하느님처럼’ 사랑의 사람이 되려는 게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 어떤 종교의 교리가 문제가 아니라 그 종교를 사는 사람의 삶을 살펴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교재에서는 자기계발을 단죄하고 있지만, 정작 미래사목연구소의 소장인 차동엽 신부는 오히려 자기계발서로 명성을 날리고 있기 때문이다.

 

<무지개원리><바보 존><뿌리깊은 희망><꿈의 성취를 향하여><자기경영의 지혜>< 행복코드쉐어링북> 등 무수한 자기계발서 위즈앤비즈 등의 출판사를 통해 펴냈다.

 

이 자가당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론 이 책에서도 '하느님' 이야기가 빠지지 않지만, 여기서 하느님은 자칫 자기성장을 위한 도우미 역할 정도로 머물 가능성이 높다.  

 

수행 없이, 교리를 강요하는 종교

 

한편 교재의 필자는 마태오 복음(11,25-27)을 인용하면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하느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자연종교에 빠져든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와 같은 교조적인 종교가들을 지목한 것이다.

 

저들이 종교전문가로서 하느님을 독점하려고 하였고, 예수께서 이를 비판하신 것이다. 인간의 삶과 자연적 성정(性情)을 거슬러 율법을 강요하는 이들의 완고함이 복음선포의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도자용’ 교재에서는 하느님 말씀을 “강론, 강의, 교회의 가르침”과 등치시키면서 이를 “철부지 아이들처럼” “편견 없이 순수하게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한다.

 

만약 2천년전 유대의 모든 백성들이 한결같이 종교지도자들의 발언을 철부지처럼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면, 예수도 없고 그리스도교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우매한’ 평신자들을 염려하는 성직자들의 심정은 알겠지만, 평신자들이 진리를 얻기 위해 모험에 나서는 것은 성숙한 신앙을 위해 ‘절대’필요하다. 합리적 이성도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고, 그 지성으로 유치한 신앙에서 어른다운 신앙으로 발전하는 것 역시 ‘하느님의 섭리’다.

 

여기서 한 번 더 기억하자. 하느님은 인간이 세운 교회보다 크고, 교리보다 넓으며, 인간 자체를 능가한다. 교회와 세상은 모두 역사와 인생을 통하여 하느님을 배워 나가는 학생에 불과하다. 즉 완결된 진리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음을 깨닫자.

 

 

  한상봉(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승인 2011.08.09 10:27:54)

가난한 자입니다

 


☞ 교황, "교회도 거리로 나가라. 불평등과 맞서 싸워라."(루가 7장 12-17) ▶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 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규정 ▲ "… 교회와 관련된 모든 일에 있어서 평신도는 성직자에게 무조건 순명해야 된다는 생각은 어리석고 틀린 생각이다 " ▲ "이렇게 생각하는 성직자는 사목직이 봉사직이라는 교리를 모르는 사람이고, 이렇게 생각하는 평신도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와 의무를 모르는 영구한 미성년자이다.” ▲ “원시종교에서 그들이 숭앙하는 신과 인간을 중개한다고 하는 무당이나 도사를 숭배했듯이 신자들이 성직자를 숭배해서는 안된다.” ▲ "이러한 신앙 행태를 '무당 숭배 잔재'라고까지 규정한다." ▲ 무당 : 귀신을 섬겨 굿을 하고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는 일에 종사하는 여자. 한자로는 ‘巫堂’으로 쓴다. ▲ 숭배 : 훌륭히 여겨 우러러 공경함. ▲ 잔재 : 과거의 생활 양식이나 사고방식의 찌꺼기 ▲ "결국 성직중심주의를 조장하는 책임의 절반은 미성숙한 신앙의식을 지닌 미성년자인 평신도에게로 돌아간다."(정하권 몬시뇰) ☞ 가톨릭대학교 백운철 신부는 ▲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는 사회에서 누구나 늑대처럼 영악하게 살고자 하지만 교황은 골리앗과 다윗의 예를 들며 양으로 살라고 권고한다” ▲ “사제들은 성장 추구형 관리자가 아니라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떠나는 착한 목자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 방문해 주심을 감사드리며 머무시는 자리마다 고운마음 피우시길 바랍니다. 지팡이 로벨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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