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성지순례ㅣ여행후기

순교자들을 직접 보고 느낀 호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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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임 [kr3217] 쪽지 캡슐

2012-07-23 ㅣ No.747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순교자들의 순교 장면을 목격한 목격 증인(?)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해미는 내포 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진영(鎭營)이 있던

군사 요충지로 해미 진영은 179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100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무려 3천명이나 국사범으로 처결한 곳으로 전해진다.

수십 명이 이름을 남겨 놓고 있지만 그 외의 수천 명은 무명 순교자다.


 

해미 읍내에는 순교 기념지가 여러 곳이 있다. 그러나 공식 형장은

서문 밖이엇던 것 같다. 다음은 성내에 있던 옥터인데 여기서 많은

교우들이 옥사 또는 교수형을 당하였다.



 
해미의 첫 순교자는 1797년 정사박해로 체포되어 1800년에 순교한

인언민(印彦敏, 1737~1800, 마르티노)과 이보현(李步玄, 1773~1800,

프란치스코)이다.

 
 

이어 1814년에는 김진후(金震厚, 1739~1814, 비오)가 해미에서 옥사로

순교했으며, 그 외에도 1811~1838년의 중기 박해 기간 동안 민 베드로

첨지(?~1839)등 9명이 해미에서 신앙을 굳게 증거한 뒤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866년 이후로 진행된 병인박해 때에는 모두 122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해미에서 탄생하였다. 이는 순교록에 나오는 57명, 관변 기록인

<<공충도사학죄인성책>>에 나오는 70명 중에서 중복된 것으로 추정되는

순교자 5명을 제외한 숫자이다.



 

 이처럼 모든 기록을 통해 성명이나 세례명 중 적어도 하나를 확인할 수

있는 해미의 순교자는 132명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무명 순교자 47명

이상의 수를 더하면, 기록으로 확인되는 박해기의 해미 순교자 총수는

179명 이상이 된다.



 

교회의 순교자 증언록을 통해 볼 때, 박해기의 해미 순고자 67명 중에는

교수형으로 순교한 33명의 경우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참수와 옥사가

각각 5명, 병사가 4명, 생매장이 3명, 그리고 장사가 3명, 미상이 14명

으로 나타난다.

 
수령이 3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입니다.

약력을 자세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순교자들의 순교를 지켜본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그 도구로 쓰임을 받았던

증인이랍니다. 그런데 말이 없습니다....

해미 읍성에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순례하던 날 비가 온 후에 날이 많이 흐려서 사진이 선명하지 못합니다.
사진 기술이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사진을 찍은 신랑이 기뻐하지
않을까봐 날씨 탓을 합니다. ㅎㅎㅎ

제가 울산 장대 성지에 갔을 때 그곳에서도 수령이 제법 돼 보이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를 끌어 안고서,
"너는 보았니? 그날의 숭고한 순교의 현장을...!"
그러면서 가슴에 뭔가 끌어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호야나무는 보호를 하고 있어서 만지지도 못했습니다.
순교 성인을 직접 자신의 몸으로 느꼈던 그 호야나무를 보면서
더욱 순교자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http://paxkorea.kr/   <<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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