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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북파간첩 7726명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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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우 세자요한 신부 [john1004] 쪽지 캡슐

1999-08-10 ㅣ No.30

한겨레21 1999년 08월 05일 제269호

 

북파간첩 7726명이 사라졌다

군 정보사 고위관계자 “실종 공작원마다 관련파일 보관중”…

지금도 북파공작부대 그대로 유지

 

6·25는 53년 7월27일 종전과 함께 마무리됐다. 사람들은 수백만의 인명피해와 동족상잔의 아픔을 낳았던 이 전쟁이 이때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남과 북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드러나지 않는 전쟁’을 벌였고, 또다시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희생의 한쪽 당사자는 바로 실종된 ‘북파 무장공작원’이었다. 이들은 분단의 시대에 사라져, 역사의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수십년을 잊혀진 존재로 묻혀져 왔다.

 

“60년 이후에도 2150명 북파 실종”

 

실종 북파공작원. 과연 그들은 얼마나 되며, 언제까지 어떻게 활동했을까.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베일을 벗겨낸 북파공작원의 규모와 운영실태는 가히 충격적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 당국에 의해 북파됐다 북한 당국에 붙잡히거나 실종·사망한 공작원의 숫자는 모두 7726명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북 정보부대를 운영해온 국군 정보사령부 고위관계자는 최근 “북한으로의 공작원 침투는 전쟁 이후 지난 70년대 초까지 계속됐으며, 이 과정에서 실종된 공작원은 확인된 수만 모두 7726명”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군은 이들 실종공작원마다 관련 파일을 기록해 보관중”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전쟁기간이 사실상 끝난 60년대 이후에도 대규모 공작원 북파가 지속돼, 72년 7·4남북공동성명 전까지 실종된 북파공작원도 2150명에 이른다고 확인했다.

 

그동안 실종된 북파공작원의 규모와 관련해서는 수천명대에 이를 것이라는 막연한 추정은 있었으나, 정확한 규모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에 드러난 북파공작 실태에서 놀라운 것은 60년 이후 실종된 북파공작원의 규모다. 휴전한 지 7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12년 동안 한해 평균 180명의 공작원이 희생된 것이다. 50년대까지야 전쟁의 여파가 지속돼 전선의 혼란이 심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60년 이후 북파된 뒤 돌아오지 못한 무장공작원이 2천명을 넘었다는 사실은 휴전 이후에도 남북한간엔 치열한 게릴라전이 이어졌다는 얘기에 다름아니다. 군 관계자도 “당시 은밀히 진행된 남북의 무력충돌 정황으로 볼 때 이런 실종자 숫자도 결코 많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처럼 많은 수의 공작원들이 사라졌는데도 그 실체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을까. 이유는 바로 종전협정이 무력도발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탓이다. 전면전을 무릅쓰지 않는 한 ‘드러나는’ 전쟁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당시 남과 북은 20년 가까이 멸공통일과 적화통일의 구호 아래 남몰래 상대를 공격하는 무장침투 첩보작전을 폈다. ‘드러나지 않는’ 전쟁을 치른 것이다. 이런 유의 전쟁은 전투에 나선 이들의 존재를 묻어둘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이들의 존재를 인정할 경우 불법을 시인하는 꼴이 되고, 그럴 경우 곧바로 정치적인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북한도 다르지 않다. ‘국가를 위해’ 젊은 피를 바친 이들이 그동안 분단이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여전히 ‘분단의 미아’ 신세를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물색조’ 6개월에 걸쳐 관찰

 

남한 당국의 북파 공작은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양상도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50년대 전쟁시기에서의 북파 공작활동과 운영 실태는 상당부분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알려져 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의 양상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60년대 후반 북파공작원을 지낸 ㄱ아무개씨의 얘기는 북파공작의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ㄱ씨가 말하는 가장 큰 차이는 실종자 규모가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당시 북파공작의 경우 실종자는 공작 참가자의 10% 정도였다고 한다. 이전에 50년대 실종자가 공작 참가자의 90%에 이른 것에 비춰 상당히 희생률이 낮아진 것이다. 그는 “옛날 선배들 때와는 달랐다. 과학적인 고도의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희생자는 많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군 관계자도 “50년대 엉성했던 조직 편제와 주먹구구식 운영은 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조직화했다”고 말한다.

 

북파공작원을 충원하는 방식도 60년대 들어서 조금씩 달라졌다. 북파공작원의 선발은 ‘물색조’라 불리는 고용담당관의 장기간 관찰 결과를 토대로 보다 치밀하게 이뤄졌다. 물색조의 관찰은 통상 6개월에 걸쳐 진행됐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선발은 일대일 면접을 통해 이뤄졌다. 60년대 말 근로재건대(넝마주이) 중대장 생활을 했던 ㄱ씨는 “어느 날 물색조가 나타나 ‘국가를 위해 보람있는 일을 하고 싶지 않느냐. 국가를 위해 한번 봉사해보라’고 말해 사흘간의 고민 끝에 입대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공작원의 출신에도 변화가 있었다. 50년대까지는 주로 혈혈단신 월남한 이북 출신이 주로 선발됐다. 60년대 이후엔 이북 출신과 함께 남한 출신의 무연고자나 깡패 건달 등도 선발됐다. 하지만 물색조로부터 체력은 물론 머리도 좋고 대공관이 투철하다는 평가를 받아야만 낙점됐다. 60년대 이후 채용은 계약방식이며 3년 또는 4년 등 일정기간을 정해 이뤄졌다. 채용 때는 상당한 보수가 약속됐고, 작전 성과가 뛰어날 경우 성과급도 지급됐다. 한번 채용되면 계약기간만큼만 일을 한다. 사회에 복귀할 때는 비밀유지 각서를 쓰게 했다. 기간을 연장하는 경우는 없으며, 당사자가 사회복귀를 원치 않을 경우 군인으로 특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제대한 사람을 재계약하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이것은 어느 나라나 똑같이 지키는 정보전의 원칙이라고 한다.

 

공작원들의 훈련 내용이나 강도도 체계화하고 좀더 과학화됐다. “하루 평균 8시간 훈련했다. 독도법과 통신 사진 등을 비롯해 홀로 살아남는 방법도 배웠다. 지금도 아무도 없는 고립된 산 속에서 1년은 버틸 수 있다. 가장 어려웠던 훈련은 30kg의 모래배낭을 짊어지고 12km의 산악을 1시간 이내에 주파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몇 미터 뛰기도 버거웠지만 6개월이 지나자 날아다녔다. 공수부대원들과 같이 뛴 적이 있는데 우리들이 20분 이상 빨랐다.” ㄱ씨의 회고다.

 

“72년 7·4공동성명 뒤 북파 중단”

 

하지만 이들이 수행했던 임무는 60년대 후반 들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북파 무장공작원들의 임무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북한 주요 관공서나 군부대에 잠입해 비밀문서를 빼오거나 요인을 납치해오는 고급 공작임무이고, 다른 하나는 휴전선 부근을 넘나들며 북한군을 교란하거나 북한군의 장비를 획득해오는 등의 일반 공작임무이다. 전자의 경우 대표적인 북파공작원으로는 58년 사망한 김아무개씨가 꼽힌다. 김씨는 51년부터 무려 51차례나 북한에 침투해 수많은 전과를 올려 북파공작계에서는 ‘영웅’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54년 5월 원산 근처에서 북한군 이아무개 대좌를 생포해온 것은 ‘북파 전과 1호’로 기록되기도 했다. 일반 공작임무의 경우는 북한군의 테러에 대해 보복을 가하거나 북한군이 새로운 장비를 갖췄을 경우 그 장비 일습을 가져오는 것 등이었다.

 

이런 형태의 임무는 60년대를 지나 72년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또다른 북파공작원 출신인 ㅂ씨는 “침투는 훈련받다가 ‘작전이다’하면 언제든지 진행됐다. 북한군 부대에 직접 타격을 가하거나, 훈련상황을 파악한다거나 새로운 무기가 나올 경우 무기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이것들을 획득해오는 것도 임무에 들어 있다. 한번 넘어가면 길게는 8일 또는 9일까지 이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위험하고도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때는 당시 중앙정보부가 작전을 지휘했다고 덧붙였다.

 

부대 생활도 일반 군인들과는 달랐다고 경험자들은 전한다. 요원들 사이엔 폭행이나 구타가 전혀 없었다. 모든 요원들은 항상 무기를 휴대했기 때문이다. 요원들이 쓰는 물건도 모두 출처를 알 수 없는 제품이었다.

 

이런 북파공작원들은 개개인별로 계약일시와 해고일시, 고향, 가족, 공작형태, 근무일지, 작전성과 등을 기록해 보관해왔으며, 전산화가 진행되면서부터는 마이크로필름에 담아 관리해오고 있다. 실종자든 제대자든 모든 요원에 대해 지금까지 기록을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 당시와 종전 직후 사라진 공작원들에 대해서는 “당시로서는 완벽한 관리가 불가능했던 게 사실”이라고 군 관계자는 전한다. 7726명말고도 어느 정도 집계되지 않은 실종자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동안 군은 파악된 모든 실종 공작원들에 대해 유가족 유무에 관계없이 위패를 만들어 보관해왔다. 지난 93년에는 실종자 위패의 전체적인 관리를 위해 60년 이후 실종자 2150명을 포함해 전체 7726명의 위패를 서울 우이동 망월사에 모신 뒤 합동 위령제를 지내왔다. 양양 영혈사나 서울 봉은사에도 위패가 마련돼 있으나 또다른 실종자들의 위패는 아니며 망월사와 이중으로 위패를 모시고 있다.

 

북파 공작부대는 현재도 강원도 ○○지역에 당시 규모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면 현재도 북파공작이 계속되고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군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다소 엇갈린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정보사의 한 관계자는 “유사시에 대비해 부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며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상호간에 피해만을 줄 뿐이니 공동성명 정신을 생각해서 서로간에 무장공작원을 파견하지 말자’고 약속한 뒤 북파는 중단됐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

 

조성곤 기자 csk@ma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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