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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성지순례ㅣ여행후기

하부내포성지 11월 11일 도보순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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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관 [gabie] 쪽지 캡슐

2014-11-21 ㅣ No.858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을 하부내포성지 도보순례의 이모저모

 

하부내포성지의 주관으로 지난 11월 11일에 도보순례가 있었습니다. 함께 걷는 즐겁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러나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지나는 마을길과 산길과 들길과 냇가의 길을 믿음으로 이어서, 옛 교우들의 비장했던 그 길을 걸어가는 도보순례였습니다. 이 도보순례의 길은 148년 전 ‘서짓골’과 인근에 살던 신자들 일곱 명이 ‘갈매못’에서부터 뱃길로 그리고 이어서 ‘완장포’에서 내를 건너고 산을 넘어서 ‘서짓골’에까지 치명성인 네 분의 유해를 모셔오던 경로입니다.

 

▲ ‘완장포구’의 하류

과거에는 여기까지 서해바다물이 들어왔다.

그러나 현재는 방조제로 바다와 끊어졌다.

 

1866년 봄에 ‘갈매못’에서 다섯 분이 함께 군문효수로 치명하셨지요. 그 다섯 분 중 성 루카 황석두 회장님의 유해(시신)는 그분의 조카들이 ‘홍산 삽티’의 교우촌에 모셔 안장하고, 다른 네 분의 유해는 그해 여름에 ‘서짓골’과 인근 마을의 교우들이 합세하여 ‘서짓골’에 모셔 안장했습니다. ‘서짓골’에 안장해드린 네 분의 유해는 성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님, 성 루카 위앵 신부님, 성 베드로 오매트르 신부님과 성 요셉 장주기 회장님의 시신입니다. 사람들 눈을 피해 밤중에 이 네 분의 유해(시신)를 모시고, ‘완장포구’에서부터 내를 건너 산을 넘어 헐떡이는 숨을 죽여 가며, 은밀히 조마조마 비장한 마음으로 지나왔던 그 옛 교우들의 그 경로를 11월 11일의 순례자들께서 함께 걸었습니다. 완장포구에서 ‘서짓골’에 이르는 9㎞의 경로입니다.

 

 

▲ <갈매못성지-완장포구-서짓골성지>의 경로와 순례길 안내 표지판(완장포구에 있음)

  

▲ 도보순례 전 경로설명 청취하는 순례자들

 

11월 11일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순례자들은 오전 10시에 ‘완장포구’에 모여, 148년 전의 사연과 순례 길에 대한 설명을 청취하고 숙연한 기도를 바친 후 10시 10분부터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 도보순례 시작한 순례자들의 행렬이 웅천 읍을 향하여 벌판길을 걷는다. 

 

 

1백여 명 순례자들의 경건한 대열이 벌판길을 지나 웅천 읍내를 통과하면서 호기심어린 주민들의 눈길을 모았지요. 혼잡한 국도와 읍내 상가의 이면도로를 지나면서 차량과 행인들에게 불편을 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걸었습니다. 옛적의 신자들이 성인들 유해를 모셔가다가 들키지 않기 위해 야음에 숨죽여 지났던 태도를 닮은 모습으로 조심조심, 그렇게 순례자들은 걸었습니다. 읍내를 벗어나 철길 건널목에서 마침 지나는 열차의 통과를 지켜 본 후 한적한 마을길로 접어들었습니다.

 

 

▲ 웅천 읍내를 지나는 도보순례자들  

 

 

읍내의 뒷마을을 지날 때는 길가의 야생화와 민가의 돌담 옆 노란 국화가 순례자들의 얼굴들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격려하는 듯 햇볕에 반짝이는 미소를 던져주었습니다. 순례자들은 둘씩 셋씩 묵주기도로써 그 가을꽃들에게 화답을 하면서 걸었습니다. 정겨운 이름의 ‘한내마을’을 지나면서 길가 밭의 탐스런 무배추가 곧 김장철이 다가옴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마을 끝머리 산비탈에는 들깨 수확 끝난 밭들이 가을 끝자락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산길로 접어드는 고갯길 모퉁이에서는 흐드러진 쑥부쟁이 꽃들이 소리 없는 수다로 순례자들을 응원하듯 가을 햇살을 흔들어대고 있었습니다.

 

 

▲ 웅천읍 뒤 산자락의 '한내마을'을 지나는 도보순례자들  

 

 

비탈길 오르는 순례자들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갑자기 함성으로 터집니다. 절정으로 상기된 단풍이 순례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스마트폰 카메라가 바쁩니다. 노랗고 붉은 단풍들이 파란 가을 하늘의 햇볕에 찬미를 올리는 듯합니다. 그런 단풍들의 현란을 꾸짖는 자세인 듯, 짙푸른 소나무들이 쭉쭉 뻗은 위용으로 당당하게 도열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모습이란, 높고 파란 하늘을 향한 기개로써 옛 치명자들의 믿음을 고백하는 기도를 순례자들에게 들려주는 엄숙함 그 자체였습니다. 걷는 순례자들의 행렬은 문득 앞에서 뒤에서 성가를 이어주고 있었습니다. 그 성가는, 울긋불긋 단풍의 합창을 우뚝 선 소나무가 지휘하여 이어주는 연주인 듯, 그렇게 순례자들은 노래하며 숲길을 걸었습니다.

 

 

▲ 숲길을 걷는 도보순례자들

 

   

▲ 소나무 숲길을 걷는 도보순례자들

 

 

▲ 단풍길 따라 걷는 도보순례자들 

 

 

▲ 산마을길을 걷는 도보순례 

 

숲길을 지나온 순례자들을 다시 아늑한 산마을이 맞이합니다. 마을 어귀 밭에서 구부려 양파 모종을 심고 있던 서너 분 할머니들이 허리 펴 일어나면서 순례자들의 행렬을 향하여 뭐 하는 사람들이냐고 묻습니다. 이런 외진 곳에도 관광 오느냐고 캐묻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라는 대답에 이상한 사람들 보았다는 듯 갸우뚱 머리를 흔들다가 할머니들은 다시 구부려 일을 하십니다. 산마을 가운데 길로 담 넘어 늘어진 가지에 주황색 감들이 달려 있습니다. 마을길 구부러진 끝자락 고적한 농가의 대문 밖에는 토실한 모과 열매가 가지 부러질 듯 위험스럽게 주렁주렁 달려서 지나는 순례자들의 코에까지 향긋함을 전합니다. 혹 고향 마을에 온 듯, 순례자들은 착각하면서 두리번두리번 걸어갑니다.

 

 

 ▲ 산마을길에서 만난 주렁주렁 모과 열매 

 

그러다가 문득 벌판이 펼쳐집니다. 추수가 끝나가는 논 사이를 걷게 됩니다. 벌판의 황량함 사이를 걸으면서 순례자들은 옛 사람들이 생각나는 위령성월을 지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벌판 저지대엔 쪽파를 뽑아 트럭에 쌓고 있는 사람들이 일손 멈추고 순례자들 행렬을 쳐다봅니다. 어딘가 도시의 농산물 도매시장으로 향할 트럭에 쪽파 단이 실려지고 있습니다. 웅천 지방의 쪽파 집산지가 바로 여기 ‘웅천천’을 끼고 있는 들녘입니다. 이 들녘을 구불구불 흐르는 ‘웅천천’의 상류를 향해서 순례길이 이어집니다. 그 ‘웅천천’의 냇둑에 올라서서, 지나온 산마을을 뒤돌아 바라보면 걸어온 길이 옛일의 추억처럼 이어져 보입니다. 그 옛적 신자들이 치명성인들 유해를 모셔오던 사연처럼 이어지는 길입니다.

 

 

▲ 산마을 지나서 들길을 걷는 도보순례자들  

 

 

 ▲ 뚝방길을 걷는 도보순례자들 

 

 

냇둑의 길을 따라 물 흐름의 상류를 향하여 걸어가면 ‘웅천천’ 은 문득 호수로 변합니다. 전설을 간직한 ‘배챙이 못’이라는 호수입니다.

 

  

▲ 중간쉼터에 이르며 만나는 호수 - 전설을 간직한 '배챙이 못' 

 

호숫가에 이르면 휴식의 정원처럼 가꾸어진 음식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음식점 정원을 순례 길의 중간 쉼터 삼아 잠간 머무르게 됩니다. 화장실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순례자들은 휴식하기보다는 아스라한 호수 건너에 마음들을 던지게 됩니다. 그래서 또한 카메라를 들고 소란스러워집니다. 늦가을의 이 정원 주변 은행나무 아래 노란 잎 떨어져 깔린 길바닥과 어우러진 호수는 건너편 산의 울긋불긋 단풍을 거꾸로 담아서 순례자들을 현혹합니다. 봄철의 순례자들은 호수에 비친 건너편 산의 진달래와 벚꽃들의 반사에 취해, 길 재촉의 안내자 말을 듣지 않습니다.

 

 

▲ ‘배챙이 못’의 초입 낙엽 깔린 길  

 

 

▲ ‘배챙이 못’을 바라보는 자리에 마련된 쉼터에서 쉬는 도보순례자들 

 

▲ 순례자들의 발을 묶어두는 ‘배챙이 못’의 가을 풍광 

 

갈 길을 재촉하여 냇가 길을 다시 걷기 시작합니다. 억새 사이를 걸어갑니다. 하얀 억새꽃들 사이에서 또한 발걸음이 더딥니다. 카메라와 함께 그렇습니다. 그러다 문득 울퉁불퉁 물돌들이 깔린 길을 만납니다. 발목을 삘 수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물돌들은 그 표면이 옛 사연을 말하고픈 얼굴들입니다. 흐르는 물과 함께 한 세월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치명성인 유해를 모셔 업고 가던 발길이 이 물돌들 사이를 지났던 사연을 간직한 그 세월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돌들 사이를 흐르는 냇물은 오늘 걷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에 맞춰서 소곤소곤 옛 사연을 되뇌는 속삭임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 냇가길을 걷는 도보순례자들 

 

 

▲ 억새 사이 물돌 깔린 길을 조심조심 걷는 도보순례자들 

 

  

▲ 물돌길 

 

▲ 물돌길 끝나가는 지점에서 보를 건너기 전에 억새길 둑을 오르는 도보순례자들 

 

  

▲ ‘배챙이 못’의 상부보를 건너기 전 물꼬 앞에 이르는 도보순례자들 

 

그런 물 흐름소리를 조심조심 들으면서 걷다가 순례자들은 요란스레 떨어지는 물소리를 만나게 됩니다. 콸콸 떨어지는 물꼬를 건너뛰어야 하는 보를 건너게 됩니다. 그러면서 뛰어오르는 물고기에 놀라던 순례자들은 싱싱함 푸르른 물풀을 보게 됩니다. ‘크레송’이라는 수본식물입니다. 맑은 물 흐르는 곳에서 자라는 풀입니다. ‘서양미나리’ 혹은 ‘물냉이’라 하는 ‘크레송(Cresson)입니다.

 

 

▲ 웅천천 곳곳에 자라는 ‘크레송’

 

  

 

▲ 채취한 ‘크레송’ 

 

 

옛적 박해시기에 이역만리 프랑스에서 조선 선교사로 오신 사제들이 숨어 지내며 고향의 맛으로 식용하기 위해 가져다가 산골 물가에 심었던 ‘크레송’입니다. 그 줄기와 이파리가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다가 돌 틈에 끼이게 되면 곧 뿌리를 내려 자라게 되는 ‘크레송’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이러한 ‘크레송’ 자라는 물길 거슬러 올라가면 옛적의 교우촌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선교사 사제들 머물렀던 옛 교우촌이 그런 곳입니다. 이 하부내포 산골 지역들이 그렇습니다. 그런 산골 마을들 가운데 하나인 ‘서짓골’에 순례자들이 오늘날 이렇게 찾아갑니다. 순례자들을 위해 그렇게 ‘웅천천’에서 길안내 표지처럼 ‘크레송’이 자라고 있습니다.

 

 

▲ 보를 건너 다시 만나는 벌판길을 걷는 도보순례자들 

 

‘크레송’이 확인해준 순례 길은 이제 보를 건너 냇둑을 넘어가 다시 산 밑 냇가의 논둑길로 이어입니다. 여기 펼쳐지는 논들의 벌판은 ‘웅천천’이 U자로 휘도는 곳입니다. ‘웅천천’ U자의 안쪽에 꽃이 많이 핀다는 ‘화산(花山)’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이 산은 순례자들이 쉼터 앞 호수 ‘배챙이 못’ 건너편에 시선을 빼앗겼던 그 산입니다. 이 산의 양지바른 남쪽 품속에 자그마한 마을이 자리 잡아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름이 ‘화산리’입니다. ‘꽃산마을’이라는 이름이지요.

 

 

▲ ‘화산리’ 마을 앞길을 걷는 도보순례자들 

 

 

▲ 고적한 화산리(꽃산마을) 

 

이 고적한 ‘꽃산마을’을 지나면 그 또한 같은 이름인 ‘화산교’라는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이 다리로써 U자의 ‘웅천천’과 헤어지는 그곳에는 1.5㎞ 더 가면 ‘서짓골’에 이른다는 표지판이 시골버스 승강장 옆에 서있습니다.

 

 

▲ ‘화산교’를 건너가는 도보순례자들

 

 

▲ ‘화산교’를 지나서 만나는 시골버스 승강장 - 여기서 ‘서짓골성지’까지 ‘곰재’를 넘어 1.5Km 

 

그리고 곧 오르막 찻길로 접어듭니다. ‘곰재’를 넘어야 하는 길입니다. 순례자들은 곰이 넘던 고개라는 곳을 향하여 곰처럼 헐떡이는 숨소리로 가파른 길을 오릅니다. ‘미산면’이라는 면계 표지판을 만나면 그게 ‘곰재’의 정상부입니다. ‘곰재’를 넘으면서 옛적 ‘서짓골’ 신자들이 치명성인들 유해를 업어 모시고 이렇게 넘어갔구나 하는 감회에 젖으면서 순례자들은 헐떡거리는 자신들의 숨소리가 부끄러워집니다.

 

 

▲ ‘곰재’를 오르는 도보순례자들  

 

 

숨 가쁘게 ‘곰재’를 넘자마자 순례자들은 곧 환호성을 지릅니다. 아스라하게 펼쳐지는 ‘보령댐’의 호수가 확 나타나거든요. 거기 정자 앞에서 순례자들의 카메라가 또 바빠집니다. 호수 건너편 바로 앞에 우뚝 선 ‘양각산’ 그리고 저 멀리 북쪽의 ‘아미산’이 호수에 거꾸로 비친 장관을 연출합니다. 양의 뿔처럼 생겼다는 ‘양각산’과 이름이 아름다운 ‘아미산’으로 어우러진 ‘보령호’를 바라보는 순례자들의 감회는 어떤 느낌이어야겠습니까? 물속에 잠겨 사라진 옛 마을과 더불어 그보다 더 옛적의 이 산골에 숨어살던 신자들이 바라보며 올리던 기도소리를 품은 저 산들이 오늘의 우리 순례자들로부터 같은 기도소리를 들을 것인가? 그리고 호수 동편의 저 멀리 이어진 산마루 너머에로는 최양업 신부님을 생각하게 하는 ‘도앙골’과 황석두 루카 성인의 안장지 ‘삽티 마을’로 가는 산길이 이어집니다. 옛 신자들이 은밀히 오가며 넘던 산길입니다.

 

 

▲ 곰재 - 곰이 넘어다니던 고개라는 ‘곰재’

이 ‘곰재’ 아래를 휘돌아 흐르는 강의 이름이 ‘웅천천’ 이다. ‘곰내’'라 한다. 순례자들은 그 ‘곰내’를 따라 걸어왔다.  

 

  

▲ ‘곰재’를 넘자마자 확 나타나 아스라하게 펼쳐지는 ‘보령호’

호수 건너 바로 앞에 솟은 산이 ‘약각산’

호수의 북동편으로 저 멀리 이어지는 산마루는 ‘아미산’을 중심으로 하부내포지역을 감싼다.

그 산줄기들 사이사이 옛 교우촌들이 있다.

옥가실, 거칠, 만수리 북두머니, 내대마을, 고갈마을, 도앙골, 삽티마을 등등... 

 

  

 

‘곰재’ 넘어 보령호의 장관에 취해 피곤함을 덜게 된 순례자들은 이제 한달음으로 ‘서짓골’에 이르게 됩니다. 호반 도로를 500m 휘돌아 가면 ‘서짓골’입니다. ‘보령호’의 남단에 솟은 명덕산 아래 오목한 품속에 옛적 신자들이 숨어살던 ‘서짓골’입니다. 그 신자들이 ‘갈매못’에서 치명하신 성인들의 유해를 뱃길로 ‘완장포’까지, 그리고 산길과 냇가 길로 여기 ‘서짓골’에 모셔 안장해드렸습니다. 그 ‘완장포구’에서 ‘서짓골’까지 걸어온 순례자들은 ‘사성제대’ 앞에 이릅니다.

 

 

 

 

  

▲ 사성제대(치명성인 4위의 무덤제대) 

 

그리고 ‘서짓골’의 여기 ‘돈이원’에 세워진 치명성인 4위의 무덤제대(사성제대)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순례자들은 가슴에 감동을 새깁니다. 우뚝 선 기념비에 새겨진 감동을 새깁니다.

 

광영위주치명

光榮爲主致命

‘한빛이어라, 임께 다다른 숨’

 

 

 

여기 숨어 기도하며 살다가 치명성인들의 유해를 모셔오던 비장함으로 역시 장렬한 치명의 길을 간 그 옛적 ‘서짓골 신자들’의 모습을 오늘의 순례신자들이 닮지 않았는가? 주님께 이르기까지 목숨을 다함이 광영(한빛) 아니겠는가! 하여, 옛적 그 신자들의 비장한 믿음 고백을 오늘 똑같이 고백하는 사람들, 여기 모여온 순례자들 아니겠는가?

 

바람 한 점 없어 따사로운 햇살 아래,

파란 하늘과 매한가지로 파란 호수를 배경으로,

푸른 소나무와 울긋불긋한 단풍 속에서,

11월 11일 ‘서짓골’ 순례미사 중에,

걸어와 경건히 기도하는 순례자들이,

다음과 같은 강론을 들었습니다.

 

‘광영위주치명’을 가슴에 새기며 미사를 봉헌하던 도보순례자들의 귀에 그날 11월 11일의 ‘사성제대’에서 들려온 강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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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장포구’에서 먼 길을 열절한 마음으로 걸어온 순례자들이여,

여기 ‘서짓골’에 당도하여 무엇을 보았는가?

여기 묻힌 치명자들의 무덤을 보고자 하여 고달픔 마다 않고 걸어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과연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성인들의 치명 증표를 여기서 보고 싶지 않은가?

보고 싶은 것이 찾아지는가?

 

순례자들이여,

그대들이 확인하고픈 그것이 여기 지금 눈에 잡히는가?

그러나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그대들은 막달레나의 처지나 같지 않은가?

 

‘골고타 언덕’을 허겁지겁 올랐던 부활주일 새벽의 막달레나와 같이 그대들은 실망하고 있지 않는가?

 

찾아와 확인하려 한 것이 없으니 그렇지 않은가?

죽어 묻히신 분의 시신이 없으니 그렇지 않은가?

 

순례자들이여,

여기 ‘서짓골’을 찾아온 그대들은 막달레나들이 아닌가?

‘빈 무덤’을 보는 그대들이잖은가?

그대들은 결국 ‘빈 무덤 체험’의 막달레나가 된 처지이지 않은가?

 

하지만 순례자들 그대들에게 익숙한 음성이 문득 들리지 않는가?

그대들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믿음의 사람아!” 이렇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그 목소리 들으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11월 11일을 기억하는가?

 

이 날은 ‘뻬뻬로 데이’라는 날인가?

아니, ‘보행자의 날’이라는 기억 때문에 걷지 않았는가?

 

1자가 1자로 겹쳐지는 날이라서 그렇단 말인가?

1자가 두 개의 1자로 겹쳐지길 두 번이라서 이 날의 사연이 그렇단 말인가?

 

그보단, 1이 쪼개져서 두 개의 1이 되는 사연은 모르고 있지 않았던가?

 

‘마르티노’라는 이름을 아는가?

 

11월 11일은 ‘성 마르티노 축일’이란 걸 기억하는가?

 

서기 338년 프랑스 ‘아미앵’ 읍에서 있었던 일을 들어보진 않았는가?

그 읍의 젊은 치안 사관 ‘마르티노’에게 일어난 일을 기억하는가?

그 사관이 말 타고 순찰하던 길에 얼어 죽어가던 거지를 만났다는 얘기 들어보진 않았는가?

 

사관은 자기 망토를 벗어서 단칼로 베어 그 거지를 입혀주었다는 얘길 들어보진 않았는가?

이것이 1을 잘라서 또 하나의 1이 된 것 아닌가?

 

그 1을 덮고 얼어 죽지 않은 거지가 누구였는지 아는가?

그 거지가 ‘마르티노’에게 나타나서 그 1 때문에 얼어 죽지 않았다 하잖아?

그리고 얼어 죽지 않아 감사하다는 말을 한 그 거지의 이름이 뭐였는지 아는가?

 

그 이름 ‘예수’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마르티노’는 수도자가 되고 주교가 되고 프랑스의 국가 수호자 되었다 하잖아?

 

해서 ‘마르티노’의 그 1이 또 다른 하나의 1이 된 사연을 오늘 기억해야 할 게 아닌가?

 

그 1이 두 개로 겹치고 또 다른 두 개의 1로 곱해지는 날까지 걸어가야 할 것 아닌가?

‘사람이 사람 살리는 그날’까지 걸음 멈추지 말아야 하지 않는가?

‘그날’이 어느 날인가?

하느님이 사람 되신 날, 그날을 아는가?

 

강생의 날’ 그날이라, ‘성탄’이라 하지 않는가?

 

그래서 ‘성탄’까지 그 1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하는 ‘마르티노의 날’이라 하지 않는가?

이 ‘마르티노의 날’은 그래서 가톨릭 관습의 ‘성탄 준비 시작의 날’이라 하지 않는가?

 

이 ‘마르티노의 날’에 걸어서 여기 ‘서짓골’에 온 순례자들의 사연은 무엇인가?

 

오늘 여기 걸어온 순례자들이여,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여기 ‘서짓골’의 ‘사성제대’ 앞 묘비에 한 성인 출신지 읍의 이름 ‘아미앵’ 보이지 않는가?

아미앵’ 그곳, ‘마르티노’의 1나누기가 1곱하기로 변한 그곳 ‘아미앵’에서 온 분이 누군가?

이역만리 조선까지 와서 1목숨(일생) 바친 ‘아미앵’의 사람 그분의 이름 아는가?

 

 

 

아미앵’에서 자란 기간과 같은 기간, 생애의 반절을 조선에서 바친 분의 이름 아는가?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주교, ‘갈매못 치명성인’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를 아는가?

반생을 조선에 바친 그 하나 밖에 없는 목숨 오늘까지 그리고 영원까지 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아미앵’과 마르티노의 프랑스, ‘아미앵’과 안토니오의 조선, 매 한가지 아닌가?

그 ‘마르티노’와 ‘안토니오’의 ‘아미앵’의 사연 따라 11과 11로 오늘 우리는 걸은 게 아닌가?

 

우리의 걸어온 사연은 그래서 오늘부터 성탄의 날까지 1을 또 1로 곱해가야 하지 않은가?

하여, 오늘 우리가 바치는 봉헌은 반절 뚝 잘라 성탄절에 완전한 또 1이 될 수 있잖은가?

 

그런 1의 또 다른 1로의 꿈을 결심하고 싶지 않은가?

그런 결심이라면, 여기 ‘서짓골’의 빈 무덤에서 들리는 목소릴 들어야 하지 않는가?

 

“믿음의 사람아!” 하는 목소리 들리지 않는가?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믿음의 귀로 듣는다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대들 순례자들은 여기 ‘서짓골 사성제대’ 앞에서 ‘막달레나들’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순례자 그대들은 세상에 달려 나가야 하지 않는가?

치명 성인들을 만났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돌아가는 사람들, 그대들 아닌가?

 

‘빈 무덤 체험’ 후 마리아 막달레나가 사람들에게 가서 뭐라 했는가?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 18)

 

순례자 그대들이여,

막달레나들’이여,

세상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말하라! “치명자들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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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강론을 들으면서 ‘서짓골’의 순례미사를 봉헌한 11월 11일의 도보순례자들 가운데, 단체로 오신 강경 본당 순례자들께서는 미사 헌금 반절을 자청하여 맡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강경 본당 주임신부님은 하부내포성지의 전담신부에게 전화하셨습니다. 그 헌금으로 성탄절에 ‘이웃사랑실천’을 위해 본당 공동체가 그보다 몇 갑절 준비하기로 했다면서…

 

빈 무덤 같은 ‘서짓골 사성제대’에서 지난 11월 11일은 이렇게 순례자들의 성탄절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고달픔을 마다 않고 걸었던 순례자들께서 ‘보이지 않는 것’ 을 본 것입니다.

 

 

 

 

 

▲ 순례자들께서 떠난 후 서짓골 성지의 뒤산 '명덕산' 너머에로 기우는 늦가을 해는

이렇게 성지 아래 보령호 물결 위에 고요히 석양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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