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토)
(백)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MBC 다큐 - 너는 살고 내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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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선 [son1148] 쪽지 캡슐

2011-06-11 ㅣ No.1472

 

 

 

 

 

 

 

 

1987년 6월 26일 부산에서 벌어진 민주화 요구 시위 현장에서

한 청년이‘최루탄을 쏘지 말라’며 달려오는,‘6월 항쟁’의 상징과도 같은 장면

 

 

 

 

 

 

한홍구교수님(성공회대학)/ 다시, 젊은 그대여

 

 

 


6월항쟁이 일어난 1987년에 태어난 사람들이, 이제 대학생도 되고

남자들은 군대에도 가고 하는 그런 나이가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학생운동이 퇴조했다고 걱정을 합니다.

그러나 그게 꼭 걱정할 일인가요?

오히려 지나치게 큰 짐을 져야했던 학생운동이, 그리고 그 주체인 학생들 개개인이

그 짐을 벗은 것을 축하해 주어야지요.

격동의 70-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세대는,

미래의 젊은이들이 우리처럼 민주화다, 자주다, 통일이다, 민중해방이다 하는

커다란 목표에 자신을 희생시키지 않고, 젊음을 즐기고,

대학생활의 낭만을 만끽하고, 미래를 설계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 친구들은 그 때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꿈과 낭만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취업 걱정에 찌들고, 토익 점수에 가슴 조리고, 학점을 따지는 80년대 생,

젊은 친구들을 보면서  80년대를 떠올려 봅니다.

질풍노도와도 같았던 그 시절을..

 

 

낭만을 빼앗긴 질풍노도의 시대

 

 

 

6월항쟁을 가져 온 80년대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젊은이들이 낭만을 빼앗긴 시대였습니다.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고, 유신독재가 끝나면서 잠시 우리는 민주화의 꿈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유신독재가 키운 정치군인들은 권력을 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정상적인 선거 등 민주주의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을 혼란이라 부르며,

그들은 군대를 동원하여 시민들의 가슴에 총을 겨누었습니다.

광주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2천 명 이상이 죽었다는 등 소문은 흉흉했습니다.

어떻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에서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할 국군이

시민의 가슴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단 말입니까? 광주의 초등학생들은 너무나 놀라서

“저 사람들은 국군아저씨가 아니고 인민군들이죠?”라고 했답니다.

       
전두환, 노태우 등 광주학살을 자행한 정치군인들은 국회도 해산하고,

법도 제멋대로 만들더니 대통령 최규하를 끌어내리더니 전두환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박정희의 낡은 유신헌법을 그대로 쓸 수 없으니까 전두환 등은

이른바 제5공화국 헌법이란 걸 만들어 대통령 선거를 치렀습니다.

유신공화국을 5공화국으로 간판만 바꾸어 신장개업을 한 셈이지요.

그러나 본질은 똑같았습니다. 대통령을 국민들이 직접 뽑는 것이 아니라,

어용인사들이 체육관에 모여 자기들끼리 뽑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마침 미국에서 새로이 대통령이 된 레이건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광주에서의 학살을 묵인하고 방조한 미국이

전두환을 승인한 것입니다. 전두환과 레이건이 서로 부둥켜안은 사진은

천 명 가까운 언론인이 쫓겨난 주요 신문사의 1면 전체를 장식했습니다.

 

김남주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박정희 시절부터 옥중에 있던 분이지요. 그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가

외적의 앞잡이이고 수천 동포의

학살자일 때 양심있는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전선이다, 무덤이다, 감옥이다”라고 절규했습니다.

 

특별히 “양심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그 때 그 시절, 정식으로 출판될 수도 없었던 그의 시를 돌려 읽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한 번 쯤 번뇌하지 않은 젊은 영혼은 없었을 것입니다.

멋있는 이성 친구를 만나는 것도, 좋은 옷을 입는 것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소주나 막걸 리가 아니라 맥주를 마시는 것도 무언가 ‘죄’를 짓는 것 같아

떳떳하지 못한 그런 느낌을 주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80년대는 광주로 시작되어 광주와 함께 뜨거워져갔습니다.

 

 

상처받은 대학, 상처받은 젊음

 

 

가장 자유로운 공간이어야 할 대학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 시절과 80년대 초반,

대학에는 귀에 리시버를 꽂은 짭새(형사)들이 득시글거렸고,

중세의 기사처럼 갑옷을 껴입은 전투경찰들이 버스를 대놓고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교내 시위를 할 때 먼저 “학우여!”하고 외쳐 사람을 모으게 되는 데

바로 옆에 짭새가 있는 것을 모르고 “학우여!”를 외치려다 “학”까지 외치다

입은 틀어 막히고 허리가 꺾인 채 끌려가는 일도 종종 있었고,

짭새가 없는 곳에서 데모를 시작하겠다고 도서관 난간에 밧줄을 타고 내려가다

떨어져 죽고 다친 학생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1983년 12월의 소위 학원자율화 조치 이후 전경들은 교내에서 철수하여

교문 앞을 지키고 서 있게 되었지만, 학원 내에서의 사찰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대학생들이 학생운동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입학정원은 늘리고,

학점이 나쁜 사람은 중도탈락시킨다는 졸업정원제를 도입하였습니다.

그 결과 정원이 크게 늘어나 같은 과 학생들끼리도 서로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많았졌습니다.

이런 환경은 군사정권의 정보기관이 학원사찰을 위해 ‘프락치’라고 불리던

가짜 학생들을 무수히 투입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지요.

혹시 우리 내부에 저들이 잠입시킨 프락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번져갔고,

과나 동아리에서 한 번 씩 프락치 문제로 홍역을 앓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삭막한 불신과 의심이 캠퍼스에 깔리게 되었지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정부가 국가예산으로 대학교에 프락치를 심어 정보를 빼내고 학생들을 잡아갔다고요?

지금으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당시의 군사정권은 왜 그렇게 학원을 철저히 감시했을까요?

사실 미완의 혁명이 되어 버린 1960년의 4월혁명과 이듬해의 5ㆍ16군사반란 이래

한국현대정치사는 군부와 학생의 격돌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전쟁으로 모든 사회운동 세력이 파괴된 우리 사회에서

학생들은 유일하게 조직된 잠재적 정치세력이었습니다.

국가기구의 탄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왔던 대학에서

학생들은 곧 반독재민주화운동의 보루로 떠올랐지요.

그 때는 민주노총도, 민주노동당도, 한겨레신문도, 전교조도,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도 존재하지 않던 때입니다.

자연히 학생운동에 너무나 많은 짐이 지워지지 않을 수 없었고,

청년학생들은 버거워하면서도 그 짐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장관 등 정부 고위직이나 국회의원의 30-40%는 군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국영기업체나 각종 공기업의 고위직도 마찬가지고요.

전두환 일당은 정권을 잡으면서 ‘정의’를 내세웠고

- 학살로 권력을 잡은 가장 불의한 집단이 자기네 이름을 민주정의당이라 부친 것이지요 -

사회를 ‘정화’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5ㆍ16군사반란 세력이 그랬던 것처럼,

부정부패 일소를 부르짖던 자들은 장영자 사건을 비롯하여

상상을 초월한 규모의 부패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전두환 등은 김종필, 이후락 등 박정희 정권 18년의 핵심인물들을

백억 원 대의 부정축재자로 몰아 잡아넣었는데, 자기들은 집권 3년이 안되어

수천억 원 대의 부정부패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전두환, 노태우 등 정치군인들은 이른바 정치정화법이란 것을 만들어

고분고분하지 않은 야당 정치인들은 선거에 나올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중앙정보부가 이름을 바꾼 안기부를 동원해서

민한당과 국민당이라는 관제야당을 만들었습니다.

민한당은 안기부가 낙점한 사람들로 짜여졌고,

국민당은 아예 중앙정보부 퇴물들이 핵심당직을 차지했지요.

당시 민정당 출신으로 지금도 수구 세력으로 버티고 있는 자들이 가끔 씩

현재의 여당이나 민주노동당을 가르켜 북한 노동당의 1중대, 2중대라고

터무니없는 비난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원래 1중대, 2중대란 말은

민한당과 국민당이 자신들의 처지를 민정당의 1중대, 2중대라고 자조적으로 부르던 말이지요.

       

1985년도에 2ㆍ12총선이라고 국회의원선거가 있었습니다.

김대중, 김영삼 등 양김씨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정치정화법에서 풀렸지요.

이들은 관제야당인 민한당 대신 신민당이라는 전통 야당의 부활을 선언했습니다.

군사정권이나 언론의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국민들은 민한당을 배척하고 신민당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신민당은 개헌을 국민들에게 약속했습니다.

더 이상 체육관에서 자기들끼리 대통령을 뽑는 광대놀음을 묵과하지 않겠다고요.

신민당과 재야단체들이 힘을 합쳐 각지에서 개헌추진운동본부 현판식을 열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정치, 경제, 사회적 쟁점들은

개헌을 중심으로 모아지기 시작했습니다.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이 있었고, 그보다 앞서 1986년에는 아시안게임이 서울에서 열렸지요.

광주학살이라는 원죄를 안고 출발한 군사정권은 이 두 행사를 멋있게 치러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싶어 했지요. 1986년 아시안게임을 마친 뒤

군사정권은 88올림픽을 위한 정지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거추장스러운 재야민주화운동세력을 싹쓸이해버려,

조용한 가운데 88올림픽을 치르겠다는 것이었지요. 수많은 공안사건일 일어나고

급기야는 1986년 11월 말, 건국대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건국대에서 열린 학생집회를 경찰이 포위해서 학생들이 집에 가지도 못하게 하고

건물로 몰아넣어 3-4일 간 가둬놓고는

이를 공산폭력혁명분자들의 점거난동이라 부른 것이지요.

군사작전을 방불케하는 진압작전이 벌어지고 무려 1,200명의 학생들이 구속되었습니다.

학생운동의 씨를 말리겠다는 거였지요.

 

 

 

 

6월항쟁 촉발에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역할이 컸다

 

 

 

종철아, 잘 가그레이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군 고문살해 사건은 이런 분위기에서 터진 것입니다.

남영동 전철역 옆에 지금도 남아 있는 시커먼 건물, 치안본부 대공분실, 바로 그 곳이었습니다.

자기가 한 학생운동 때문도 아니고 선배의 소재를 아는지 참고인으로 불려온 대학생이

고문으로 죽은 것입니다. 80년대에 공안기관의 밀실에서 일상적으로 고문이 자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여러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 됩니다만,

- 수많은 의문사 사건의 상당수가 이런 사건이 아닌가 의심이 됩니다 - 

박종철 군 사건처럼 딱 밝혀진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충격이었지요. 80년대에는 자식이 대학에 들어가면

모든 부모들이 데모하지 말라고 당부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보내는 이상,

친구나 선후배 사귀지 말라고야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박종철 군을 보니, 본인이 조심한다고 해서

체포나 고문이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들로서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지요.

사건 발표를 한답시고 치안본부장이 나와서 아무런 가혹행위도 없었고,

신문과정에서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더라고 말할 때,

이 땅의 모든 아비, 어미들과 모든 자식들의 억장은 무너졌습니다.

“종철아, 잘 가그레이, 이 애비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란 박종철 군 아버님 말씀에

이 땅의 모든 애비들은 속으로 울었습니다.

       

전두환이 나쁜 줄은 알지만, 서슬퍼런 독재에 입도 뻥끗 못하던 사람들도

저런 억울한 죽음을 보고만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민주단체에서도 시민들의 그런 정서를 놓치지 않았고,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그 전에야 민주단체에서 시위를 계획해도 하도 은밀히 해서 일반시민들은 참여는커녕

그런 시위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대부분이었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의 추도식이 거행되는 날 10시에

각 교회와 사찰, 성당에서는 타종을 하고 행인들은 검은 리본을 달고 묵념을 올리고,

차량들은 추모의 경적을 울려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시민들은 생각했지요.

전두환 정권이 아무리 무시무시하다 해도 이 정도는 못할 것이 없겠다라고요.

경찰이 이 정도 갖고는 시비 걸지도 못하겠지만,

시비를 건다 해도 충분히 할 말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2월 7일 추모식이 열리던 날, 거리거리에서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운동권만의 운동이 아닌 문턱이 낮은 운동,

6월항쟁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지요.


경계를 넘어 - 6월항쟁의 시작

 
80년대 내내 거리에서 시위가 끊이지 않았지만, 6월항쟁은 달랐습니다.

무엇보다도 6월항쟁은 모두가 하나 될 수 있는 그런 운동이었습니다.

사실 박정희, 전두환 같은 군사독재 아래에서 민주주의나 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해

투쟁에 나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죠. 감옥에도 가고, 얻어맞기도 하고,

싸우다보니 자연히 과격해지기도 하고요. ‘운동권’이란 말이 상징하듯

저들은 일반 시민들과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 선을 그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6월항쟁에서 그 벽을 넘었습니다.

자기 사무실에서 최루탄에 눈물콧물 흘리는 시위대를 향해 던져 준 두루마리 휴지가,

“최루탄 좀 그만 쏴”라는 동네 상인의 한 마디가,

고생한다며 마시라고 주고 간 음료수 한 병이 그 벽을 넘었습니다.

자기가 선 자리에서 조그마한 힘을 더한 것이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나 하나 한 마디 더 한다고, 나 하나 거리에 나간다고 세상이 바뀔까...

이런 마음을 떨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한 마디 해야겠다고 하자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큰 걸음이 아니라 반 발짝 앞으로 나갔습니다.

서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니, 수많은 요구가 있었겠지만,

우리는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민주쟁취” 그 열여섯 글자에

우리의 소망을 담고 꿈을 실었습니다.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을 우리는 그 때 실감했습니다.

철옹성 같았던 군사독재가 흔들렸고, 성벽에 큰 구멍이 났습니다.

비록 우리가 군사독재를 말끔히 허물지는 못했지만,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 헌법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를 사회과학계에서는 흔히 ‘87년 체제’라고 부릅니다.

이 87년 체제는 바로 6월항쟁의 직접적인 산물입니다.

6월항쟁은 절반의 성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절반의 실패를 경험한 것이 6월항쟁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었기에 군사독재를 흔들 수 있었지만,

분열되었기에 그 생명을 연장시켜주었습니다.

우리가 분열되어 지역감정의 함정을 피하지 못한 탓에, 직선제를 쟁취했건만

1987년에 군사독재를 바로 종식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본격적으로 시작된 민주주의의 제도화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인터넷에 자유롭게 댓글을 달고, 휴대전화로 마음 놓고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통화를 하고, 그리고 거리낌 없이 대통령 욕을 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것도

6월항쟁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직선제 쟁취를 당면목표로 내걸었던 6월항쟁은

그 자체가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7월, 8월, 9월이 되자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독재권력이 물러서면 그동안 억눌렸던 민중들의 경제적 욕구가 분출하게 마련입니다.

3ㆍ1운동 때도 그랬고, 해방 직후에도 그랬고, 4월혁명 때도 그랬더랬습니다.

산업화의 주역이었던 우리 노동자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 그 때까지 결성된

노동조합 숫자 만큼인 3천 여 개의 노동조합을 1987년의 석 달 동안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나 직선제를 한다고 민주주의가 금방 구현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3천 개의 노동조합이 더 생겼다고 일하는 사람들의 처지가 바로 좋아지지는 않았습니다.

 


       
87년 체제와 잃어버린 기회


       
6월항쟁 20주년을 맞으며 지난 20년을 돌이켜 보면 87년체제가

정말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 두 번의 기회를 우리가 흘려보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첫 번째 우리가 놓친 기회는 1997년말에 닥친 외환위기였습니다.

위기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정말 무엇이 잘못되어

우리가 이런 상황에 빠졌나 반성하고 문제점을 고쳐야 할 기회였습니다.

이 때 재벌과 관료집단에 대한 철저한 개혁을 했어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와환위기가 닥쳤습니까?

서민들이 달라를 빌려서 외환위기가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앞뒤 가리지 않고 돈을 빌린 재벌들,

그리고 방만하게 이를 승인한 관료들에게 책임을 물었어야 합니다.

국제금융자본의 대표 격인 IMF조차 한국의 재벌과 관료는 통상적인

시장경제의 기준에서 볼 때 너무 문제가 많다며 대수술을 권유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위기 탈출의 강박감 속에서 우리는 그 기회를 놓쳤고,

재벌과 관료들은 오히려 신자유주의 개혁의 전도사로 부활했습니다.

       

또 한 번의 잃어버린 기회는 탄핵 직후입니다.

또 다시 선거에서 진 수구세력은 의회권력을 이용해

시민들이 선출한 대통령을 끌어내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탄핵 직후의 4ㆍ15총선으로 탄핵세력은 참패하고,

47석의 여당은 152석으로 세 배 이상 의석을 늘려 과반수를 넘기게 되었고,

여기에 민주노동당 10석을 포함하면 162석으로

개혁세력이 국회의 다수의석을 점하게 되었습니다.

여당이 정치를 잘못했을 때 야당이 의석수를 세 배 늘리는 경우는 있어도,

여당이 세 배나 의석수를 늘리는 경우는 사실 보기드믄 일입니다.

       

그 결과 이제 과거의 군사정권과 연결된 기득권 세력은

행정부에 이어 입법부까지 내놓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한국사회에서 선출되는 권력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러나 사법부를 비롯한 선출되지 않는 국가권력이나 재벌, 언론, 학원, 교회 등

세습되는 봉건적 기득권 세력은 비록 정권은 놓쳤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의연히 유지하면서 선출된 권력과 아니, 기득권 세력 대신

새로운 권력을 창출한 시민들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두 차례의 개혁의 기회를 흘려보낸 탓에 절반의 성공에 불과한 ‘87년 체제’는

본격적인 진화의 기회를 놓친 채 이제 성년을 맞이하려나 봅니다.

그러나 민주진영과 반민주진영의 타협의 산물로 출현한 ‘87년 체제’가

그냥 정체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변태에 변태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문제를 낳아왔지요.

       

청년들을 무한경쟁과 불안에 빠뜨리는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그렇구요,

취업을 해도 안정된 직장생활을 꿈꿀 수 없는 비정규직 문제가 그렇습니다.

70년대 중후반 이후 민주진영은 민중생존권 문제를 핵심과제로 삼아왔건만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양극화는 갈수록 심화되고,

부동산 폭등은 서민들의 희망을 앗아갔습니다.

80년대 이래 주권 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 홨건만, 우리 사회 주류세력의 대미 의존심리는 더욱 강화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상황은 1987년 6월항쟁 때보다 더 나빠지기만 한 건가요?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헤쳐 온 길을 돌아보십시오.

험난했던 한국현대사를...

한국전쟁의 참혹한 학살과 파괴 속에서

7년 만에 우리는 다시 일어나 4월혁명을 이루었습니다.

유신독재의 얼어붙은 동토에 봄을 가져오려던 노력은

광주에서의 학살로 좌절되었지만,

우리는 또 7년 만에 6월항쟁을 통해 5월 광주를 살려냈습니다.

       

2차대전 이후 제국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를 세운 나라 중에

대한민국처럼 민주화, 산업화, 세계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과거의 독재정권은, 그리고 미래의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오늘의 수구세력은

민주주의냐 경제발전이냐를 택일하라고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잘못된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배타적인 목표가 아니라

동시에 이루어야 할 과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민주화 이후에도 경제발전을 지속해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닌 나라가 되었습니다.

       

 

다시, 젊은 그대여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요즘의 젊은 세대는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 세대라고요.
 

80년대의 젊은이들은 ‘독수리 오형제’ 마냥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불의와 싸워야 했던 세대였지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나쁜 것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싸우면서 남을 돌보지 않는 것,

어떻게 하면 나와 남들의 이익을 같이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려 없이

내 것만 찾다가 자기 것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부동산 투기의 근절과 집값 안정화,청년실업 근절을 위한

사회적 일자리 창출,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 교육재정의 확충 같은 일들은

바로 여러분들의 이익을 보호하거나 실현하는 것인 동시에

사회의 정의와 진보에 기여하는 일이겠지요. 
 


 

2008년 6.10 촛불집회 거리에 늘어 선 촛불의 염원

 

       
이런 거창한 일들이 과연 바뀔 수 있을까?

내가 참여한들 달라지는 게 있을까?

오늘의 젊은이들도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될 겁니다.

예, 확실히 달라집니다.

6월항쟁이 우리에게 확실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너와 내가 참여할 때 세상은 바뀐다는 것을.

       

엄청난 6월항쟁도 작은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박종철 군이 고문을 당해 숨을 거두었을 때 고문경찰들이 그래도 살려보려고

의사를 데려와 박종철 군을 보였습니다. 뭔가 낌새를 챈 기자들이

그 의사를 찾아가 어떻게 된 것인가 물었습니다. 그 의사는 박종철 군이

고문을 당해 숨졌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현장에 물이 흥건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기자들은 그 말을 기사로 썼고 데스크는 그 말을 자르지 않았습니다.

의사가 모른다고 잡아뗐더라면, 기자들이 못들은 척 했더라면, 데스크에서 깔아뭉갰더라면

6월항쟁은 도화선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독재타도를 외친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친 게 아닙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이거 하나 말한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생각했는데,

진짜로 달라졌습니다.

나의 작은 행동이 내 옆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최루탄에 눈물콧물 범벅이 된 청년을 향해 누군가가 두루마리 휴지를 던져 주었을 때

휴지는 하얗고 긴 선을 하늘에 그리며 땅에 떨여졌습니다.

청년은 휴지로 눈물을 훔치고 다시 대열로 들어갔습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한 발 더 대열로 다가갔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박종철이 죽어가던 가장 암울했던 시대를

한국현대사의 가장 빛나는 시대로 바꿔놓은 6월항쟁,

한국현대사에서 비록 반쪽이었을지언정

돌이킬 수 없는 최초의 승리를 기록한 6월항쟁은 이런 작은 행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군사독재 정권은 우리의 낭만을 빼앗아갔지만,

우리는 6월항쟁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경험은 20년이 지난 오늘, 아직도 우리 모두를 지탱해주는 사과나무입니다.

 

 

 

한홍구교수님(성공회대학)/ 다시, 젊은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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