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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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에서 신앙으로 바뀌는 과정/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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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4-29 ㅣ No.171975

 

◼마태 15,21-28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연중 제20주일입니다. 오늘은 저 혼자 미사 드리고 있습니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집안이 어둡죠.

특별히 어떤 정신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가족도 있죠.

조현병이라든지 아무튼 정신 질환도 대단히 많은데, 어떤 것은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또 어떤 것은 영적인 것도 있죠.

어떤 어둠에 사로잡혀 마귀가 그 영혼을 장악해서 정신적인 질병을 일으키는 것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구마 사제는 잘 분별을 해야 합니다.

무조건 ‘제 딸이 마귀 들렸으니까 떼어주세요.’ ‘제 아들이 이상해요.’ 그런다고 해서

함부로 ‘당신 딸이 부마자다’ 이렇게 바로 얘기하지 않습니다.

조심해야 하는 거죠.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이 사람이 정말 부마자라고 하는 것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마귀는 놀랍게도 어떤 사람의 영혼에 들어가서 있으면서 구마 사제를 만나면 자취를 감춥니다.

그리고 지극히 정상인 것처럼 그가 지배하고 있는 영혼과 육신을 위장시킵니다.

그래서 참 부마자냐 아니냐 판단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섣불리 판단해서 큰일 나지요.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도 분명히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부마자가 하는 행동처럼 보이기 때문에 부마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아닌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아무튼 집안에 정신병자라든지 부마자가 있을 때는 그 집안은 풍비박산이 납니다.

건강했던 사람마저도 다 망가집니다.

마치 맑은 물에 잉크 한 방울 떨어뜨렸을 때 퍼져나가듯이 집안이 전부 다 어두워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기 딸 병의 완쾌를 청하는 한 여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 여자는 가나안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과는 조상 때부터 그야말로 원수처럼 지내는 이방인 중의 이방인이었죠.

이런 이방인이고 유대인으로부터 멸시를 받은 처지에서 예수님께 나아간 그 여인의 태도에서

우리는 몇 가지 아름다운 모습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나아가면 내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구나.

첫 번째는 그 여인은 사랑을 가진 어머니였습니다.

사랑은 기적을 낳습니다.

자기 딸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낯선 이국인이었던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었고요. 예수님께서 침묵을 지키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더욱더 애원하고 매달릴 수 있었던 겁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다고요? 사랑입니다.

자존심, 수치심 이런 것은 사랑 앞에 아무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거절을 당해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그 힘은 사랑의 힘이었던 겁니다.

이 여인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사랑보다 더 하느님께 가까이 가게 하고, 또 강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변질되지 않게 하는 힘이 바로 사랑입니다.

 

두 번째로 이 여인은 신앙이 있었습니다.

신앙은 좀 분류가 됩니다.

첫 번째는 차가운 신앙, 다른 말로 이성적인 신앙이 있고. 두 번째는 의지적인 신앙이 있고, 세 번째는 교리적인 신앙이 있고,

네 번째는 체험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여인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신앙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신앙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이 여자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위대하고 능력 있는 기적을 행하는 자, 그래서 ‘다윗의 후손’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세상적인 권세와 영광이라는 관점에서 일종의 병만 낫게 해주는 마술사를 대하듯이 만났습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 이 여인은 기복적이고 미신적인 입장에서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신앙이 성숙지 못할 때는 하느님을 단지 해결사, 병 낫게 해주는 능력 있는 분 정도로만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기도하다 해결을 못 하면, 언제라도 신앙을 포기하고 철학관 점집을 찾아다닙니다.

가톨릭 신자 40%가 철학관이나 점집을 다녀봤던 경험이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따져보면 두 발로 가지만 않았을 뿐이지, 한번 가서 묻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신자들까지 합치면 40%뿐이겠습니까?

이것이 현 우리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이 여자의 신앙은 ‘다윗의 후손’이 ‘주님’으로 호칭이 바뀝니다.

그러면서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얘기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뜸을 들이십니다.

‘나는 병이나 고쳐주는 그런 마술사가 아니야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아들이야.’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향하는 기도로 변화하게 이 여인을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에서 참 매정하게 거절하시죠.

그렇지만 이 여인은 거절당하는 고통을 통해서도 어렴풋이나마 예수님의 신성을 느낍니다.

우리도 보면 편안할 때보다는 고통을 당할 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단지 해결사가 아니라 구세주라는

그분의 신성을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다윗의 후손이라 불렀다가 어렴풋이나마 주님이라는 신성을 깨닫고 여인의 신앙은 예배로 바뀝니다.

기복 신앙이 참다운 신앙으로 옮겨갑니다.

 

예배를 바치는 사람의 첫 번째 태도는 무릎을 꿇는 겁니다.

뻣뻣하게 서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과 무릎을 꿇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 그리고 엎드린다고 하는 것은 ‘이제부터 나는 당신의 소유’라는 표시입니다.

당신이 내 주인이시라고 하는 표시요, 겸손의 표시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의 많은 천주교회가 장궤틀을 없애고 있다는 기가 막히게 슬픈 사실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 하는 첫 번째 예배 행위는 무릎을 꿇은 것인데 이제는 성당에 가도 무릎을 꿇을 장궤틀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어찌하다 이렇게 우리 교회 안에 어둠이 들어왔는지 통탄할 노릇입니다.

아무튼 그 예배는 어떻게 바뀝니까? 간청이 기도로 바뀝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찜찜하다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도하면 불굴의 인내를 갖게 될 것이고,

모든 시험을 참아 이겨낼 수 있다고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 여인은 처음에는 간청하다가 참된 기도로 바뀌었다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느님은 우리 기도를 바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정말로 응답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보실 때가 많습니다.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여러 가지 시험을 하십니다.

여기에 걸려 넘어져 많은 이들이 기도를 중단합니다.

오늘 이 여인은 예수님이 여인 강아지 취급했습니다.

이런 취급을 당했다면 더럽고 치사하다면서 예수님께 침 뱉으면서 물러설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여인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개 취급하든 뭐 취급하든,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이제 확실히 알았습니다.

마술사도 아니고, 재주 부리는 사람도 아니고, 위대한 사람도 아니고, 다윗의 자손 중의 그냥 단순히 예언자도 아니고,

바로 주님이신 걸 알았습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한테 무슨 소리를 듣는다고 해서 화낼 이유도 없고

그게 어찌 모욕이 되겠습니까, 저한테 주님이 하시는 말인데.’

그래서 이 여인은 시험을 통과했고 딸의 치유라고 하는 은총을 받은 겁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 반드시 내 눈으로 그 응답을 확인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어쩌면 내가 했던 그 기도의 응답이 나는 못 보고 내 자식 대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불굴의 마음으로 항구하게 기도할 때 반드시 응답이 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이 가난한 여인이 딸을 치유시키는 과정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이 여인은 사랑을 가진 여인이고 신앙을 가진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신앙은 바로 자라거나 만나자마자 생긴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자라났다.

어떤 체험 그 과정 처음에는 기복적이고 미신적인 입장에서 그냥 다윗의 후손이라고만 불렀다가 그

런 다음에 호칭이 주님으로 바뀝니다.

거절당하는 그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의 신성을 느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 다음에 예배로 바뀌었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냥 달라고만 했던 간청이 참된 기도로 바뀌었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입에서 어떤 소리를 듣습니까?

‘장하다 여인아 내 이제껏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너 같은 사람 본 적이 없다.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끝내고 있습니다.

 

오늘 이 가난한 여인의 믿음을 묵상하면서 과연 현재 내 신앙은 어떤 종류의 신앙인가

차가운 신앙인가, 기복적인 신앙인가, 의지적인 신앙인가, 교리적인 신앙인가, 체험적인 신앙인가를 한번 뒤돌아봅시다.

 

여러분들 아주 많이 많이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2023년 연중 제20주일 (8/20)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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