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피자와 할아버지

스크랩 인쇄

박용순 [pak0827] 쪽지 캡슐

2003-07-27 ㅣ No.34

隨筆- 피자와 할아버지

 

wngok@hanmail.net

 

내가 낳아서 기른 자식은 귀여워할 겨를도 없었지만 이제 손자 놈들은 무척 귀엽게 여긴다. 미운 짓을 해도 무엇이든 사주고 싶은 것이 할아버지의 심정이다.

어느 날 손자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기에 ’할아버지가 무엇을 사줄까’ 하고 물었다. 손자들은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피자’를 사 달라고 했다. 피자란 말에 약간 씁쓰름했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며느리에게 피자 하나를 사 오라며 잔돈이 없어 5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주었다.

"이 돈 가지곤 못 사요, 아버님."

민망한 듯이 나를 바라본다.

"피자가 얼마여?"

며느리는 웃으며 작은게 1만5천 원이라고 한다. 피자가 그렇게 비싼 줄은 몰랐다. 손자에게 사준다고 말해놓고 안 사줄 수 없어서 만 원짜리 한 장을 더 꺼내 주면서 나는 속으로

’쌀 한말 값이로구나!’

얼마 후에 며느리가 두꺼운 빈대떡 만한 피자 한 개를 사서 가지고 왔다. 나는 너무 허망하게 생각했지만 내색은 않고 옛날에 배고팠던 시절을 회상하게 되었다. 해방되기 전 일본이 제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 식량 배급이 끊어지자, 도시 사람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농촌에 가서 야매(夜買=뒷거래)로 곡식을 사서 서울 집으로 가지고 올라가는 길에 검색에 걸려 빼앗기고 집에서 굶고 있을 가족을 생각하며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1960년대까지 보리고개라는게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먹을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이 많았고, 일부 지주나 벼슬아치를 제외하곤 누구나 거의 죽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었다. 그 죽이란 것도 보리 알이 미처 여물기 전에 이삭을 잘라 볶아서 맷돌에 갈아 아욱이나 쑥을 넣고 끓인 멀건 죽을 먹으며 살았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보리밥에 감자를 섞어 담은 도시락을 갖고 학교에 다녔다. 시오리나 되는 거리인 학교에 도착하면 배가 고파서 도시락을 미리 먹어 치우고 나서, 오후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 허기를 못 이겨 축 늘어져서 돌아오면서 소나무 햇순과 아카시아 꽃, 진달래꽃을 따먹었고 옹달샘 냉수로 배를 채우고 다녔다. 여름에는 보리와 밀. 또는 토질이 좋지 않은 밭에 심는 볏과 식물인 호밀로 만든 밀국수를 아침저녁으로 먹으며 살았다. 그것도 부족해서 김치 국물이나 물을 많이 부어 먹기 때문에 물로 배를 채웠다.

요즈음은 각종 해물과 닭고기, 쇠고기, 돼지고기 등 육류를 마음대로 먹을 수가 있다. 게다가 영양분이 많은 건강 식품이라고 해서 개고기, 오리 고기, 토종닭 같은 자연 식품을 선호하고, 맥주를 마시고, 고급 담배를 피우며 일터에서 휴대 전화로 커피를 시켜다 마시면서 농사일을 하지만 옛날에는 끼니를 굶으며 힘든 농사일을 했었다.

이렇듯 뼈저린 굶주림을 겪어 보았기에 쌀과 연관지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빈대떡 만한 피자 하나의 값이면, 장정 20명이 풍족하게 먹을 정도로 밥을 지을 수 있다. 쌀 한말로 밥을 지으면 지금 식당에서 먹는 공기 밥은 100여 그릇이나 되는 양이다. 그러나 장정이 혼자 먹어도 모자랄 비싼 피자를 아이들은 먹다가 맛이 없다고 버리는 경우도 있으니 배고픈 설움을 겪었던 나로서는 하느님 앞에 죄송스럽기 그지없다.

옛날에는 곡식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길 가던 나그네도, 곡식을 말리기 위해 멍석에 널어놓은 낱알이 땅에 흩어져 있으면 주워 담아놓고 가곤 했다. 그런데 그 무서운 식량난을 겼으면서 배를 주려 본 내가, 할아버지로서 손자들 앞에서 쩨쩨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말 한마디 못하고, 서슴없이 비싼 피자를 사주는 것을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다. 물론 손자들에게 그런 것을 간식으로 사줄 형편이 못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에게 사주는 것이 아까워서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사줄 수 있게 생활 형편이 좋아진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하느님께 감사 드린다.

지금 보릿고개가 없어진 것은, 우리 국민들이 지독한 배고픔의 서러움을 겪으면서 후손들에게는 그 쓰라린 유산을 넘겨주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이런 풍요로움을 자손들에게 안겨 줄 수 있어서 자랑스럽다.

그러나 가난했던 과거를 겪지 않았던 아이들에게 배고픈 것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어야 한다. 옛날 배고픔을 겪던 생각을 하지 않고 지금처럼 낭비를 한다면 그 전철을 또 밟을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나라는 농토도 적고 지하자원도 부족하고, 석유 한 방울 나지 않기 때문에 그 무서운 에너지 파동도 겪어 보았다. 그런데 지금 농촌에는 농업을 계속할 후계자가 없고, 우루과이 라운드에 의해 이농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또 전답이 도로 확장에 들어가고, 대지나 유흥지로 변해 가는 실정에 놓여있다. 식량이 모자라는 시절이 언제 또 올지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배고픈 서러움이 어떤 것인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미리 가르쳐주고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1960년대만 해도 보릿고개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을 월남에 파병했고, 중동지방에 노동력을 수출해서 외화를 벌어들였다. 아직도 외국에서 귀국하지 않고 남아있는 교포들도 많이 있다. 그때에는 우리나라보다 국민 소득이 높던 나라도 지금은 다시 후진국이 되어, 오히려 우리나라로 노동력을 역수출하는 나라들도 있다.

지금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는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또 북한에서는 일제 말기 우리가 겪어온 가난보다 더 혹독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일깨워 주는 좋은 교훈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많은 농산물과 가축의 사료를 자급자족하지 못하고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쌀이 남아도는 것 같지만 그것은 다른 농산물을 많이 수입해서 먹기 때문에 쌀 소모가 적어져서 생긴 현상일 뿐이다. 지금 우리의 중요한 양식이 되는 밀과 육류가 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우리 밀을 장려하기 위해 카톨릭 농민 회와 일부 종교단체에서 애를 쓰고 있지만 국민적 호응이 미미한 것 같다. 그런데 최근 자주 일어나는 무역 시비를 보면, 우리나라의 농촌을 살리지 못해서 황폐해 지면 식량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경제 호황을 누리고 있어서 식량 전쟁은 격지 않고 있지만 언제 위기를 당하게 될지 모른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성장한 것도 바로 그 무서운 가난을 겪었고, 그 재난을 극복해야 된다는 뼈저린 체험을 했기 때문에 이나마 잘살게 된 것은,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교훈을 바탕 삼아 노력한 대가라고 믿는다. 그런 역사를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떳떳하게 가르쳐 주지 못하고, ’오냐, 오냐’ 하면서 받아만 줄 것인가. 아니면 과거를 당당하게 알려주어 절약 생활을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인가.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손자들이 먹다 남긴 피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474

추천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