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토)
(백)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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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방황의 여정을 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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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ystefano] 쪽지 캡슐

2003-07-25 ㅣ No.5183

7월 26일 토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마태오 13장 24-30절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일러서 가라지를 먼저 뽑아서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 버리게 하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게 하겠다."

 

 

<기나긴 방황의 여정을 접고>

 

시골에 있는 한 보육원으로부터 날아온 한 장의 편지를 받고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편지의 요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행사를 하나 계획했었는데, 수익금이 좀 생겼습니다. 수익금으로는 쌀을 좀 마련했지요. 작은 것이지만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오셔서 가져가십시오." 우리 것만 철저하게 챙겨왔던 제 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예비 수사님 두 명을 트럭을 태우고 보육원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차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더위가 보통이 아니어서 에어컨을 틀었더니 더운 바람만 나왔습니다. 할 수 없이 에어컨 대용으로 창문을 활짝 열고 140Km로 달릴 수밖에.

 

한적한 시골에 자리잡은 아담한 보육원 정문을 통과하는 순간, 제 마음이 환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정문 근처 수돗가에서 정신 없이 물장난을 치고 있던 아이들의 얼굴이 너무도 해맑아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40Kg 짜리 쌀포대를 트럭 가득히 싣고 있는 저희 곁으로 보육원 꼬맹이들이 지나갔습니다. 뽀얀 꼬맹이들의 얼굴들, 아무런 걱정도 아쉬움도 없어 보이는 아이들의 얼굴, 스스럼없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도 아이들과 함께 살아온 짬밥이 꽤 되다보니 집 안에 들어서는 즉시, 아이들 얼굴만 보면 대충 분위기를 파악하지요. 그곳 선생님들의 노고가 보통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훈훈해졌습니다.

 

너무 고마운 나머지 트럭에 실려있던 오이 두 박스를 내려 드렸더니, 그곳 총무님쯤 되어 보이는 분이 너무 감사하다며 하시는 말씀, "원장 신부님께 잘먹겠다고 꼭 전해주세요." 그 상황에서 "사실은 제가 원장인데요"하기도 뭣해서 그냥 씩씩하게 대답만 했습니다. "예! 말씀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보육원을 뒤로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제 머릿속에는 보육사업에 헌신하는 분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 살, 두 살, 세 살, 네 살 되는 아이들을 아무런 조건도 없이 받아들여서 제 밥그릇 챙길 때까지 그저 기다려 주고, 그저 안고 쓰다듬어주는 선생님들의 모습은 천사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철들기까지 그 오랜 세월 동안 그저 끝없이 인내하고 용서하고, 격려하고, 지지하며, 외로운 아이들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시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러웠습니다.

 

기다려주는 마음, 인내하는 마음, 견뎌주는 마음, 참아주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 격려하고 지지해주는 마음은 바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한없는 인내와 우리 인간들을 향해 끝없이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산다고 하지만 우리들의 생활, 뒤돌아보면 늘 부족하고 부끄러운 생활이었습니다. 때로 부끄러움이 지나쳐 비참했던 생활, 그래서 절망도 많이 했고, 좌절도 많았던 삶이었습니다. 기나긴 방황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로 돌아갈 때마다 다시 한번 받아들여주시고 따뜻한 당신의 품안에 안아주시고, 셀 수도 없이 용서를 계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한 마디로 하느님의 은총과 용서, 자비의 역사였습니다.

 

오늘도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다시 한번 용기를 내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용기를 내서 아버지께로 머리를 돌리기를, 아버지를 향해 발걸음을 한 걸음 내딛기를, 부끄럽고 쑥스럽겠지만 아버지 품에 젖먹이 아기처럼 안기기를 오늘도 한없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거창한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일도 아니겠습니다.

 

그저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일입니다. 자비 충만하신 아버지의 어깨에 우리의 머리를 기대는 일입니다. 아버지 곁에 앉아서 아버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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