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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란 어떤 사람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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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일 [bagilhan] 쪽지 캡슐

2013-11-21 ㅣ No.1004

친일파는 어떤 사람들인가

작성자 : sysop(관리자) 2004/05/18 02:21

 

친일파(親日派)는 말 그대로는 '일본에 친한 사람들 혹은 무리들'을 말한다. 친일파라는 말을 그런 뜻으로만 이해하면, '친일파가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나 거래에서 일본과 친한 사람들이나 집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친일파를 먼저 정의할 필요가 있다.

'친일파'는 한말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침략에 협조하면서 국권을 상실케하였거나, 일제를 등에 업고 동족들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들을 총칭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현재 일본에 있는 지인(知人)과 가까이 지낸다거나 일본인들과 사업차 거래하는 사람들까지를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다. 친일파는 어느 특정한 시기에 일본의 한국 침략에 편승하여 민족을 배반하고 동족에게 고통을 가한 무리들을 이른다.

해방후 일제강점기에 친일행위를 행한 사람들을 청산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법률을 만든 적이 있다. 처음은 미군정기인 1947년 7월에 과도입법의원에서 상정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 조사위원회법'이었으나 군정의 반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정부수립 후 1948년 9월 제헌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만들어 거의 1년간 시행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다음과 같은 행위를 한 자를 친일파로 규정하였다.

첫째, 일본정부와 통모(通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하였거나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하는 자.

둘째, 일본정부로부터 작(爵)을 받은 자 또는 일본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던 자.

셋째, 일본 치하에서 독립운동한 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

넷째, 습작(襲爵)한 자, 중추원 부의원(府議院)의 고문 또는 참의, 칙임관 이상의 관리, 일정행위, 독립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그 단체의 간부된 자, 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자, 군수공업을 경영한 자, 도·부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이 된 자 중에서 일제에 아부하여 죄적이 현저한 자, 관공리가 되었던 자로서 악질적인 죄적이 현저한 자, 일본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 단체 본부의 수뇌간부로서 악질적인 자, 종교·사회·문화·경제 기타 각 분야에서 악질적인 언론저작과 지도를 한 자, 일제에 대한 악질적인 아부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등으로 규정하였다. 친일파를 역사적인 용어로서 정의할 때에는 구체적으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행위를 한 자를 가리킨다.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이 가장 먼저 시행해야 할 과제는 식민지잔재를 청산하는 일이다. 해방 후 일제가 남긴 식민지잔재에는 제도·법률·언어·문화 각 방면에 걸쳐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그 중 가장 시급히 청산해야 할 잔재는 앞에서 열거한 친일행위를 범한 사람들이었다. 인간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제도나 문화를 개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된 후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만들고 이를 시행하기 위해 국회 안에 '반민족행위처벌특별위원회'를 비롯하여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를 설치하였다. 제헌국회에는 그래도 독립운동에 참여한 민족주의자들이 다수 선출되었기 때문에 이런 법률을 제정할 수 있었다. 특이한 것은 반민법을 집행하는 기구가 모두 백성의 대의기관인 국회안에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행정부와 사법부에는 일제하의 관료 법관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 법의 시행을 그들에게 맡길 수 없었다.

그러나 반민법은 생각만큼 잘 시행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결정적인 것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이 법의 시행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환국 후에 친일파들이 제공하는 정치자금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둘러싸여 지냈다. 그 때문에 친일파들의 요구를 일정하게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반민법'대로 친일파를 처벌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여러 가지로 변명했다. 새나라 건설에는 화합이 필요하니 과거에 범죄한 자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하였고, 새나라 건설에는 경험있는 관료와 경찰, 군인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친일파들을 등용했다. 그 때문에 자신이 집권한 후 친일파를 청산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둘째, 미군정기부터 친일파들이 등용되어 정부 수립 때에는 정부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해방 직후 처음에는 처벌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은인자중하던 친일파들은, 한국에 진주한 후 일제 강점기의 관료들을 중심으로 군정을 펴려고 한 미군정에 의해 재등용되었고 정부 수립후에도 그들의 관직이 계속되자 그들은 과거의 민족을 배반한 죄에 대하여 사면받은 듯이 생각하고 큰소리치면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셋째, 해방 후의 조국의 분단상황이 법시행을 약화시켰던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반민법이 제정된 후 이를 시행할 즈음, 변신에 능하고 대세의 움직임에 민감한 친일파들은 당시 조국의 분단상황을 잘 이용하여 자신들의 보호막을 만들었다. 즉 자신들을 반공주의자로 변신시켜, 반공의 투사로 나서는 한편 민족주의자들이나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갔다. 따라서 친일파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잡아가려 할 때에는, 그 내막을 모르는 백성들은 '반공투사'를 잡아간다고 비난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친일파들은 교묘하게 이승만을 농간하여 그 법자체의 기능을 제한하게 되었다. 원래 2년 한시법으로 된 '반민법'은 제정된 지 1년이 채 못되는 1949년 8월 31일 후에는 효력이 정지될 수밖에 없었다.

1년 남짓, 이 법에 의해 처리한 친일파는 극소수였다. 총취급건수 682건에 검찰부의 기소가 221건, 재판부의 판결이 40건(체형 14건, 공민권 정지 18건, 형면제 2건, 무죄 6건)이었으나 한사람도 사형대에 올려놓지 못했고, 그나마도 그 이듬해 6·25가 일어나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일제 치하 36년간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소수의 처벌은, 불과 4년밖에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지 않았던 프랑스와 유럽의 몇몇 나라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들 나라들은 우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철저하게 나치협력자를 처벌하여 추상같은 심판을 내렸다. 프랑스의 경우, 사형선고된 자가 6,700여명인데, 그 중 760여명이 사형집행되었고, 2,700여명이 종신강제 노동형에, 10,600여명이 유기강제 노동형에, 2천여명이 금고형에, 2만2천여명이 유기징역에 처해졌고, 벨기에는 5만5천건, 네델란드는 5만건 이상의 징역형이 주어졌던 것이다.

반민법을 통해 친일파를 청산하려는 한국민의 의지는 이렇게 실패하고 말았다.

친일파 청산의 과제

해방 후 두 차례에 걸친 친일파 청산 작업의 과제는 4·19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새로운 서광이 보이는 듯 했으나 장면정권 때에는 오히려 친일파의 등장이 더욱 두드러졌다.

4·19가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회복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친일파 청산의 부담을 안고 있었지만,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우리나라에서 친일파 문제는 더 이상 과제로 제기될 수 없었다. 일본육사와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박정희는 자신의 처지도 그러하려니와 그밖에 한일회담을 성사시켜 일본의 자본을 끌어들이려 했기 때문에 친일파 문제를 더 이상 등장시킬 수 없었다. 해방 이후 친일파를 응징하여 민족정기를 세우려는 과업은 이로써 막을 내리고 말았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 사회는 일제 때에 외세에 빌붙어 민족과 조국을 배반한 무리와 그 후예들은 잘 살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헐벗고 굶주렸던 민족운동가들과 그 후예들은 독립된 나라에서도 찬밥 신세로 되었다. 이로써 해방 후 민족의 자존을 회복하여 자주독립을 완성하고 민족정기를 확립하려는 원대한 국가재건 계획은 성공할 수 없었다. 친일파들은 우리 역사의 고비마다 민주·민족 독립국가 건설에 저해되는 반동세력으로 준동하게 되었고, 사회정의를 확립하고 민족통합을 이룩하는 가치관 확립에도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30여년간의 군사통치가 끝나면서 우리 사회에는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적 요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들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 그 연원은 친일파들을 청산하지 못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친일파를 청산하는 역량과 역사적인 경험을 가졌다면 군사문화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도 그만큼 가능했을 것이다. 부정(否定)을 부정(否定)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긍정(肯定)이다. 거기에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다. 늦었지만 21세기를 맞기 전에 우리는 20세기가 남겨놓은 식민지 잔재와 군사문화 잔재 등 부정적인 요소들을 부정, 청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시점에서 친일파 청산은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할 지 모른다. 대부분의 친일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나지 않은 역사적인 심판은 아직도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민족문제연구소가 진행하고 있는 『친일파 인명사전』의 출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매우 기대된다. 지금 할 수 있는 친일파 청산은 바로 역사적인 청산이다. 그들의 행적을 역사에 분명하게 기록하여 두고두고 친일파와 같은 존재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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