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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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성모님의 평생 동정성 [Re : 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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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경 [h2kfr] 쪽지 캡슐

2001-08-16 ㅣ No.567

+ 찬미 예수님 !!!

 

   다시 한번 강조드리고 싶습니다.  성모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하느님의 어머니, 동정잉태, 평생 동정, 무염시태, 몽소승천 등)은 믿을 교리 혹은 믿어야 할 교리로서, 모두가 그리스도론과 교회론과 구원경륜적 관점에서 나온 교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성모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그것이 비록 성서에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것이라고 할지라도)을 믿고 고백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인간이시면서도 하느님이심을 우리가 믿고 고백함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가르침은 결코 성모님을 미화하기 위해 교회가 단독으로 또 억지로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참 인간이시면서 하느님이시라는 만고의 진리에 그 뿌리를 두고서 거기로부터 파생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교회를 배제한 성모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고, 성모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 고백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1. 성모님께서 평생동정이시라는 성서의 언급이 없다.

   예 맞습니다.  성서에는 분명히 그러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오히려 보기에 따라서는 성모님의 평생 동정성을 의심할만한 언급이 더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성모님께서 평생동정이 아니시라는 언급 또한 성서에는 전혀 없습니다.  하여 성서에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평생동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똑같이 성서에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성모님께서는 평생동정이셨음을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2."예수의 형제"(마르3,32; 6,3; 마태13,55; 요한2,12; 사도1,14; 1고린9,5; 갈라1,19)

   여기서 "형제"라는 말이 곧 성모님에게는 예수님말고도 다른 아이를 낳으셨음을 의심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첫째; "형제"라는 단어의 히브리적 의미에 대해서는 제가 답변을 했던 <성서 묻고 답하기>란의 "# 549번"을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즉 "형제"라는 단어가 꼭 친형제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촌을 비롯한 전혀 혈연 관계가 없을지라도 친분이 매우 두터운 이웃에게까지도 적용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형제"라는 문구가 꼭 예수님에게 친 형제가 있었다라고 이해할 수만은 없습니다.

   둘째; 마르코 복음 6장 3절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 형제들"이란 구절을 마르코 복음 15장 40절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구절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르코 복음사가가 오직 한권뿐인 자신의 복음서에서 성모님에 대해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두 가지의 표현을 사용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다른 두 사람의 마리아에 대한 각각의 표현이라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셋째 첫째와 둘째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예수의 형제"로 나오는 "야고보"와 요셉"은 성모님이 아닌 다른 마리아의 아들로서, 그 당시의 언어 풍습으로 보아 예수님의 사촌 형제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3."첫아들"(루가2,7)

   예수님을 "첫아들"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예수님 다음으로 동생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회의론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유다 지방의 언어 관습을 도외시한 결과로 빚어진 오해입니다.

   첫째; 당시의 언어 관습으로는 처음으로 태어난 아들은, 그 다음 아들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무조건 "첫아들"로 불렀다고 합니다(히브16장; 델 엘 이예도의 비석 문구 참조).  즉 독자(獨子)라고 하더라도 무조건 "첫아들"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맏배"의 중요성은 구약성서 곳곳에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첫아들"이라는 표현은 특별히 장자(長子)의 특권과 권리를 나타내는 말로 흔히 사용되는 일종의 상용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이 꼭 성모님께서 다른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루가 복음 2장 7절에 대한 공관 복음서의 병행구인 마태오 복음 1장 25절에는 "첫아들"이 아닌 그냥 "아들"로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첫"이란 단어는 후대에 루가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서에만 따로 삽입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루가 복음사가가 자신의 신학적 의도에 따라 "아들"을 "첫아들"로 수정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첫"이라는 형용사적 용법에 꼭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3."같이 살기전에"(마태1,18),"아들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고"(마태1,25)

   물론 회의론자들의 주장대로 이 두 문구를 언뜻 보면 "그 후에 동침을 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기록한 것이라고도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일정한 때까지 부부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것"이 꼭 "그 이후에는 육체적 관계를 맺었다"라는 의미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첫째; 복음사가가 이런 식의 표현을 한 것은, 이 구절들을 집필할 당시의 마태오 복음사가의 관심은 오직 "동정 잉태"와 "예수님 탄생"에만 있었을 뿐, 그 후의 일(예를 들면 예수님 탄생 후의 성모님과 성 요셉의 관계 등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사가들의 저술과 편집에 대한 여러 특징들 중에서 수집한 자료 중에서 신학적으로 자기가 관심이 없는 사항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수정하거나, 생략하거나, 탈락시켰다는 점은 님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위 두 글에 대한 회의론자들의 주장은 옳은 주장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둘째;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에서 "~~~때까지 ~~~하지 않았다"라는 표현은 그 후에 꼭 그런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라틴어의 "~까지"를 의미하는 단어는 단지 과거에는 그러하지 않았음만을 의미할 뿐, 미래에 발생할 일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의미의 단어라는 것입니다.

   셋째; 앞뒤의 문맥으로 보면 마태오 복음사가의 의도가 성 요셉은 예수님 탄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런 표현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간략하게 줄여서 설명을 한다고 용을 쓰기는 하였으나 워낙 문장실력이 없어서 산만한 답변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쪼록 잘 이해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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