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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성서묵상(1)-요셉은 왜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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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 [aravis] 쪽지 캡슐

2008-04-18 ㅣ No.3014

'꿈장이 요셉' 이야기는 주일학교 다닐 적부터 참 재미있게 들었던 이야기다.지금 다시 읽어보아도 요셉의 인생 역정이 장편소설마냥 다이나믹하고 드라마틱 한 것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들을 잘 갖추었다 싶다. 그런데 아무리 재미가 있으려고 해도 그렇지, 에집트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형제들을 가나안으로 돌려보내고 그들과 화해하는 과정은 이야기의 구조가 좀 복잡하고 자잘한 트릭들이 많아 보인다.
 
요셉은 왜 형제들을 보자마자 받아들이지 않고 베냐민을 데려오라며 가나안 땅으로 되돌려 보냈을까? 형제들 몰래 돈을 주어 보내고, 결국 베냐민을 데려오게 하고,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숨기는 행동 등을 해서 일을 굳이 복잡하게 만든 이유는 뭘까?
 
요셉이 자신을 찾아온 형제들을 만나고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결국 형제들과 화해하게 되는 창세기 42장~45장을 읽다보면 성서 저자의 해석이 도드라지게 드러났다 싶은 구절이 나온다. 베냐민을 데려가겠다는 형제들의 말에 이스라엘이 "동생이 또 하나 있다는 소리는 왜 해서 나를 이리도 괴롭히느냐"라고 반문하자(창세 43,6) <그들은 이렇게 변명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형제들이 간첩 의심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가족사항을 밝혔음에도 상대(요셉)가 먼저 다른 동생은 없는지 등을 낱낱이 캐물었다고 거짓말을 하는 상황을 소상하게 알려준다.
 
형제들은 요셉에 한 짓을 세월이 흐른 후에도 철저히 회개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요셉 앞에서도 "동생 하나는 없어졌다"(창세 42,14)고 뻔뻔스럽게 시키지도 않은 거짓말을 한다. 자신들의 신원을 제대로 밝히지 않으면 간첩으로 의심받게 되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다. 요셉에게 한 짓 때문에 그 벌로 곤경에 빠졌다고는 생각하지만(창세 42,21) 다시 한 번 동생 베냐민을 자신들의 희생제물 삼는 일에 그리 큰 고뇌를 느끼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달려가 베냐민을 내놓으라고 막무가내로 다급하게 요청하는 모습이 그렇다. 그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한다고 종용하는 이유는 잡혀있는 또다른 형제 시므온을 구출해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기근이 심해가고 에집트에서 가져온 곡식이 떨어졌기에(창세 43,2)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에집트로 다시 가야하는 상황에 내몰린 것이었고 베냐민이 그 일에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결국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요셉을 찾아가고 베냐민의 자루에 요셉이 몰래 숨긴 은잔으로 도둑 누명을 쓴 베냐민은 종의 신분으로 에집트에 잡혀있게 될 난국을 맞는다. 그런데 그 때 아버지에게 베냐민을 꼭 데려오겠다고 말해 결국 이스라엘의 승낙을 받아낸 바 있는 유다가 나선다. 자신이 베냐민 대신 종이 되겠다고 나선 것이다. 유다는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할 때 상인들에게 팔아 돈이나 받자며 결국 죽음을 모면하도록 형제들을 설득한 인물이다. 르우벤이 제일 처음 요셉의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고 나서고 나중에 베냐민을 데려와야 할 상황에 이르자 자신들의 죄를 참회한 도덕적인, 그러나 무능한 인물인데 반해 유다는 다른 형제들을 설득하며 죄를 짓는 상황을 피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유다는 베냐민을 다시 보지 못하게될 "아버지에게 닥칠 불행을 차마 볼 수가 없"(창세 44,34)어서 자신이 베냐민 대신 종으로 남겠다고 하는 것이다. 요셉의 형제들이 죄와 탐욕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선한 행동을 하는 이 대목에서 그제서야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신이 바로 요셉임을 밝힌다.
 
나는 이 대목에서 요셉이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 비로소 자신을 드러내는 까닭이 혹시 형제들의 회심을 위해서가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요셉은 어쩌면 애초부터 그들을 용서해줄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그가 직접 "나를 이 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마음으로 괴로워할 것도 얼굴을 붉힐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형님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나를 이 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입니다"(창세 45,5-8)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요셉이 형제들을 만나자마자 용서해주었다면 형제들의 사이는 그의 말처럼 서먹했을 것이다. 형제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 스스로 정화하고 뉘우치는 과정을 겪지 못했으므로 그를 대하기가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형제들은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뉘우치고 결국 선한 행동을 하게 되기에 이른다. 유다가 아무리 아버지에게 약속을 했기로서니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죄를 속죄하는 심정으로 유다는 그러한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요셉과 형제들의 관계를 통해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돌이켜본다. 인간으로서 나약한 나는 늘 하느님을 저버리는 죄를 짓는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언제고 용서의 문을 열어놓으신다. 하지만 그 용서는 결국 하느님께서 나의 삶에 보여주신 복잡다단한 일상들을 통해 통렬하게 나를 참회하고 스스로 선한 행동으로 옮겨나아갈 때에 진정한 은총의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용서의 은총은 언제고 나에게 내려질 것이지만 항상 끊임없이 삶의 과정들을 반성하고 회심할 때 우리는 그 은총을 누릴 수 있을 것임을, 성서를 통해 다시 한 번 깨닫는다.
 
 
* 요셉 입장에서는 감정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을 것이다. 복받쳐흐르는 눈물 때문에 자리를 피해 홀로 엉엉 울고 나왔다는 이야기가 두 번이나 나온다. 매우 사실감있게 묘사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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