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8일 (수)
(백)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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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훈 [hooncfcm] 쪽지 캡슐

2001-06-05 ㅣ No.1257

T.V.에 출연한 김수환 추기경과 도올의 대담을 보고;

김수환 추기경님께

 

  얼굴을 직접 뵌 적은 없으나 지면을 통해, 언론매체를 통해 추기경님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추기경님과는 종교적 진리에 대한 견해가 다르긴 해도, 나라가 어지럽고 사회가 흔들릴 때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셨던 여러 모습에 때로 감동을 받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역시 그 때와 다를 바 없는 혼돈의 시대라고 보면서, 이러한 정신적 혼란기를 맞이하여 금번에 출연하여 한 말씀 해주신 것에 대하여 감히 몇 글자 올리오니,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개인적인 자리에서 대화를 했을 경우 그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건, 또는 무슨 관점으로 논의하고 어떤 태도를 보이 건, 그런 것은 다른 사람이 참견할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그 내용들이 지극히 사적(私的)이고 일상적(日常的)인 것일 때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이며 일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공적인 매체를 통하여 대중(大衆)들에게 알려지게 될 때에는 사정이 다르다는 것쯤은 이해하리라 생각이 듭니다. 더구나 그 공적인 매체를 통하여 전파되는 내용이 단지 한 범부(凡夫)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고민(苦悶)하면서 배우기를 원하며 터득하고자 하는 진리(眞理)에 관한 일이요, 더구나 진리(眞理)의 길에 서있음을 확신하면서 생사(生死)를 건 헌신과 희생을 통하여 자신들이 믿는 바의 도리(道理)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내용이라면, 그 때의 대화와 논의는 매우 신중하고도 깊은 의미를 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2001년 4월 27일 방영된 도올 김용옥의 T.V.강연에 출연한 추기경님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은 촌각을 곤두세웠습니다. 자신의 기(氣)철학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의 존재(存在)를 인도의 유식(唯識)사상과 불교의 공(空)사상으로 해석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되는 신(神)의 존재를 거침없이 부정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기독교 종교를 일종의 샤머니즘으로, 그리고 예수를 막스와 더불어 무당(巫堂)으로 보는 입장을 밝힌 도올 김용옥과의 T.V.를 통한 대화에 추기경께서 응한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단 출연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추기경께서 도대체 어떤 입장을 어떻게 밝힐 것인가에 대하여 궁금해했습니다. 일찍이 유교의 제례의식에까지 참석하여 유교의 제사에 대하여 일언(一言)하신 바 있는 분이었기에, ’그분은 절간에 가서 합장하는 것조차 꺼릴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볼 때, T.V. 출연은 추기경께는 일석이조(一石二鳥)라고 볼 수 있겠지요.

 

  추기경께서는 T.V. 프로그램의 원래의 의도에 적절하게 맞추어나가면서, 김용옥씨의 이러한 고전소개와 그 해석이 오늘날 오락과 춤과 무의미한 노래들로 퇴폐화 되어가며 정신적인 방황을 겪는 청소년들에게 그 얼마나 유익한가를 칭찬하셨습니다. 물론 이 대목 역시 일반적으로는 공감할 수 있다고 하겠으나, 과연 젊은이들이 한때 빠지는 오락과 춤과 노래에 비해서 김용옥의 고전을 이용한 기독교 비하 발언과 그가 중심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기(氣)철학 사상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인지요? 언뜻 생각해볼 때는, 추기경님의 그런 발언이 그런 대로 의미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나가면 그만이겠지만, 실상 정신의 세계에서 무신론 내지 반기독교 사상을 펼치는 도올의 사고방식이 과연 ’청소년들의 퇴폐적인 것보다는 낫다’는 그러한 판단이 어디에 근거하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무신론에서 출발하는 인간중심의 사고가 진리의 규범을 잃게 되면 결국은 허무와 절망으로 빠져들어 결국은 인간성파괴로 나타나는 역사의 흔적을 혹시나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서구의 현대인들이 동양을 흠모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는 것에 대하여 추기경께서도 부정하시지는 않겠지요. 그래도 어떤 면에서 한국 역사상 정신적인 지주(支柱) 역할을 하셨다는 평가를 받으시는 종교인인 추기경께서 과연 김용옥의 사상을 청소년들의 ’희희낙락’하는 태도보다는 낫다는 평을 하는 것을 들을 때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추기경께서, ’공자님’의 모든 말은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고전을 통한 배움이 주는 유익에 대하여 말할 때 역시, 과연 종교인으로서 인간의 모든 사상들이 ’인간을 위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종교를 사람들과 사회에 유익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일반론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 역시 꼬리를 물고 질문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추기경께서 생각하는 ’인간을 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깊은 생각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는 중에, 특별히 무신론자이면서 반기독교 사상가임을 자처하는 김용옥 앞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논하는 대목에서는 매우 의미 있는 일침(一針)을 놓으셨습니다. 즉, 모든 인간을 비롯한 만물(萬物)을 기(氣)의 집합(集合)과 흩어짐으로 설명하는 김용옥씨 앞에서, 추기경께서는 모든 만물과 인간은 ’하느님’의 소생(所生)이요, 모든 생명의 기원(起源)이 ’하느님에게서’ 나온다는 말씀을 했을 때, 시청자들 중의 많은 신앙인들은 그처럼 고마울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추기경님의 말은 지극히 초보적이며 원칙론적이긴 하지만, 워낙 오늘의 빗나간 세대가 신(神)의 존재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낳아준 부모조차 내팽개치는 그러한 배도(背道)의 시대이기 때문에, 추기경님의 말씀은 도올에게는 참으로 황당하고도 어리석은 맹신(?)으로 들려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초대한 손님에 대한 예우로, 가만히 지켜보는 모습을 보인 것은 그런 대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기에 그는 추기경의 말씀 뒤에 사족을 달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요. ’하느님’의 존재를 설명하는 추기경님의 말씀은 오늘의 시대에서 ’하나님을 추구한다’거나 그 하나님에 대한 ’은혜’니, ’섭리’니, 또는 그 ’사랑’이니 하는 말들을 상실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무언가 잠시라도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동안 계속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김용옥씨 앞에서 한 차원 높게 ’하나님의 사랑’을 일괄하신 추기경님의 말씀에 도올은 할 수 없이 인내로써 침묵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속으로는 쓰라림을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청자들 중에는 뒤이어 참으로 어이없는 말들에 적지 않게 당황했으리라 봅니다. 도올 김용옥은 추기경께 질문했습니다: ’어째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이나 다른 진리관을 향해서는 그렇게 배타적인가?’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이어서,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도 이 땅에 하나님은 있었던 것이 아닌가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 추기경께서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착하게(善) 생활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기에, 구태여 기독교 신앙에만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추기경님의 말씀은 이랬습니다: "불교를 믿든지 다른 종교를 믿든지 인간으로서 참되게 사는 삶은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다 구원해 주신다"라고 말입니다. 신학서적에서가 아닌 방송중의 말이기에, 한 마디 글자를 그대로 적어 평가하는 것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추기경님의 의중은 분명했습니다. "추기경께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분명했습니다: "모든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무엇을 믿든지 착하게 살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도 이미 기독교 신앙은 존재"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발생한 그 수많은 박해들(우상숭배라든지, 조상신을 섬기는 제사 문제로 인한 박해 등)은 단지 교리를 잘못 이해하는 ’오해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사정이 이 정도라면, 이제 추기경께서는 추기경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신자들에게 답변하셔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순교자들의 죽음이 숭고(崇高)했으며 오늘의 우리들도 그들의 신앙심을 본받아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으로서 이 시대를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으며 살아가는 수많은 신앙의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지구 곳곳에 도사린 우상과 불신앙을 타파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도자로서 복음과 사랑을 실천하느라고 어떤 곳에서는 순교를, 또 어떤 곳에서는 혹독한 고난을 참고 인내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말입니다. 만일 추기경께서 답변하시고자 하는 바를 대신하여 내놓는다면 대강 이런 내용이 아닐까요?:  즉 ’복음적 교리의 순수성과 신앙적 삶의 순결성을 위하여 온갖 고난과 박해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으며 순교(殉敎)당한 그 많은 사람들은 사실은 기독교 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한 무식(無識)의 소치에서 그러한 고난을 당했다’라고 말입니다.

 

 추기경께서 하신 말씀에서 보자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오해일 뿐이요, 또한 "회개하여 죄 용서함을 받으라"는 성경의 교훈은 그저 종이호랑이에 지 나지 않을텐데, 이렇게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다만 착하게 살기만 한다면 모든 종교들 속에도 구원이 있다는 그러한 신념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47세에 서품을 받으셨을 때에도 이러한 신념(信念)을 가지셨나요? 아니면,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 때 가졌던 ’주(主)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변한 것입니까? 또는 그때와는 달리,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 종교들이 화합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화해의 몸짓으로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인가요? 추기경께서 미사 시간에 그토록 흔하게 말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대신 이제는 ’석가’와 ’공자’ 역시 구세주의 대열에 들어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하시기에 그렇게 말씀하는 것인가요?

 

  추기경께서 말씀하신 바, ’착한 일을 함으로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하는 말이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추기경께서 속한 카톨릭에서는 전통적으로 주장하기를, 인간의 구원이란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선행’이 합작(合作)하여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인간이 죄를 범하고 타락(墮落)하기는 했어도, 인간의 마음 속에는 선행을 할 수 있는 씨앗과 그 의지(意志)가 있어서 그것이 신의 은총과 손을 잡게되면 구원(救援)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반면에, 개신교인들은 비록 인간에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선행이 가능하기는 해도, 인간의 모습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타락한 상태에 있으며,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善)이란 인간 스스로에게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선(善)이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구원이 있음을 가르치면서, 진정한 선행(善行)이란 오히려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열매임을 교회는 가르치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떠난 인간에게는 비록 선행(善行)이 있는 것 같아도, 그것은 일시적(一時的)이요, 한계적(限界的)이요, 때로는 심지어 찬란하게 보이는 악덕(惡德)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추기경께 제가 믿는 개신교의 교리를 장황하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카톨릭 교인이 제아무리 외경(外經)을 성경에 첨가하여 믿는다 할지라도, 과연 기독교의 구원을 그렇게 설명해도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첨예한 신학강론의 시간이 아닌, 지나가는 대담시간이라 할지라도, 추기경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래도 성경적 진리를 추구하고자하여 넓은 의미에서의 기독교 신앙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지침이 될 것을 기대했던 바를 크게 실망시키는 시간이 된 것이라고 생각은 아니하시는지요?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진리의 보고(寶庫)로 이해하고자 할 때, 과연 그 내용은 무엇이어야만 할까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하여 ’모든 종교들 속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지, 또한 ’무슨 종교를 믿든지 선행(善行)의 조장을 통하여 인간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정말로 카톨릭 교회의 공(公)신앙을 대변하는 것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추기경께서는 ’기도합시다!’라는 말 대신 ’합장합시다!’로, ’주님께 나아갑시다’를 ’예불합시다’로 미사의 모습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제가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할 것은, 과연 ’인간의 구원에 관한 기독교 진리’에 대한 추기경님의 생각을 분명히 정리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과연 인간이 선행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과연 무슨 종교를 믿더라도 착하게 살기만 한다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가요? 모든 종교란 착하게 살라는 것을 독려하는 일종의 매체인가요? 좀더 진술한다면, 인간에게 구원을 받을만한 선행의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까? 그 선행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요? 만일 사람이 착한 일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면, 왜 사람들이 구태여 성당이나 교회에 나가야 되는 것일까요? 절간이나 제사의식에 참여하여, 그리고 이웃을 향한 적선(積善)을 베풀어 구원에 이른다면, 무슨 종교를 신앙하든 상관없이 기독교 진리는 단지 윤리적 삶에 좌우된다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의 모든 비의(秘意)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왜 추기경께서는 시간을 내어 매 미사시간마다 그 분의 살(肉)과 피(血)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떼며 나누는 것입니까?

 

  이와 관련되어 나오는 대목은 추기경께서 말씀하신 ’공자의 인간관’과 ’기독교의 인간관’에 관한 견해입니다. 이미 장황하게 설명하신 두 입장의 인간관을 재론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요약하여 질문하자면 이러합니다: 과연 공자의 인간관은 하나님의 은총을 필요로 하는 죄의 고백이 있는 것일까요? 과연 추기경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여 그리스도의 은총을 필요로 하는 바 ’죄인’으로서의 인간관, 그리고 복음 안에서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야 하는 성경적 진리가 공자의 인간관 속에 있다고 믿는 것입니까? 아마 유추해 보건대, 추기경께서 공자뿐만 아니라 석가나 소크라테스나 심지어 칼막스의 인간관과 기독교의 인간관을 비교해 달라는 T.V. 요청이 있다면 아무런 입장의 차이 없이, ’모두가 인간을 위한 가르침’이라고 하실 터이니 이 문제는 더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이제 신앙을 단지 착하게 사는 것으로 해석하는 추기경님의 입장에 대해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신앙이란 사회를 향한 공동체성(共同體性)과 이웃을 향한 윤리성(倫理性)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도리(道理)와 가르침은 과연 다만 착하게 살라는 것인지요? 질문이 이러하다면, 아마도 추기경께서는 이렇게 말씀할 겁니다: ’그저 착하게 살라고 성당이나 교회에 나가 배우는 것이지요’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일부 종교인들의 행실이 못났다고 해도, 사람이 불완전하게 행하는 행실의 상태로서 종교(宗敎)를 규정해버린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에 지나치는 것이요, 이러한 언사(言辭)는 오늘날의 종교가 그야말로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하는 처참한 모습임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하기야, 그러한 입장은 추기경님뿐만 아니라 최근에 석탄일을 맞이하여 ’부처님 오신 날 축전’을 보낸 서울 대교구의 교구장이신 정진석 대주교의 서한을 보아서도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정진석 대주교는 그 서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불교와 카톨릭을 비롯한 모든 종교들은 본연의 가르침을 먼저 실천하고 사람들에게 가르침으로 세상 안에서 구원의 표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새로운 천년기에도 우리 종교계와 종교인들이 이 세상의 평화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 서한에 따르면, 인간의 구원은 유독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종교간의 갈등이 일고있는 있는 지구촌의 일부지역을 볼 때는, 서로 간의 화해(和解)가 급선무이긴 해도, 기독교 신앙은 상대방을 정복하는 싸움과 갈등, 미움과 다툼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낮아지고 썩어지고 희생하고 자기를 내어놓음으로 복음을 전파해 왔던 것이 아니던가요?

 

  진리의 규범성을 포기하고 유일한 진리로서의 기독교를 내어버린 경우는 추기경님이나 정진석 대주교님의 경우만이 아닙니다. 참으로 불행하게도,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오직 은총’만을 주장하면서 종교개혁의 후예라고 자처했던 개신교의 일부신학자까지 추기경님의 사상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시대이고 보면, 문제는 그저 한쪽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바람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사람들을 쓰러뜨리는 광풍(狂風)이 되고 있다는 지적은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부 개신교 사상가들 중에서도, 인간의 구원이란 ’오직 예수와 그 복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슬람교, 불교, 유교, 천도교 등 타 종교의 모든 가르침에도 들어있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가 타종교에 대한 규범성, 성취성, 우월성을 겸손히 포기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면서, ’진정한 신앙이란 기독교의 성경에서만이 아니라 부처의 소리, 도교의 무위자연에서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정도에까지 왔으니, 아마도 추기경께서 그러한 말을 하는 H 신학대학의 그분을 만나시면, 많은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겠나 생각이 듭니다. 개신교 신학자라고 하는 사람이 이 정도이니, 카톨릭의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이야 그 이상 더 간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다만, 바른 진리를 향한다는 명분으로 절간이 아닌 성당을 찾아 나아가는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겪게 될 혼돈이 염려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기경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시고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시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그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인생의 도리를 말씀하시니 한 편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범 종교적 성향을 열어 놓으신 대목은 역시 성경의 뜻을 벗어난 것이라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쨌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변한다는 염려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물론 추기경께는 그러한 염려라는 것이 이순(耳順)의 나이를 넘긴 지금에 와서는 존재하지도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순(耳順)의 경륜과 노련함이란 이교(異敎)을 비롯하여 무슨 사상이든지 좋다!는 배도(背道)를 용인하는 대범함은 아니어야 한다는 충고를 드리고 싶습니다. 항상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신다는 추기경님께 이러한 충고가 무례한 언사(言辭)가 아닐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느 한 개인의 말이 아니라, 추기경께서도 평생을 통해 배우고 계신 성경의 교훈이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신앙인들에게,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공통적인 신앙고백의 의미가 더더욱 아쉬워지는 시대라는 생각을 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이순(耳順)의 나이를 훨씬 넘겨 노년(老年)에 이른 사도 바울이 당시의 흔들거라는 시대정신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킨, 신앙의 고백(告白)을 마지막으로 선물을 겸하여 드리고자 합니다. 혹시 시간이 나신다면 마음을 기울여 재삼 재사 숙고(熟考)하여 읽어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디모데 후서 4:7-8).

 

 

평안을 빕니다.

문석호 드림.

(총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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