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25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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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행동 - 윤경재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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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whatayun] 쪽지 캡슐

2017-03-21 ㅣ No.110889

 

용서는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행동

 

- 윤경재 요셉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18,32)

 

 

알렉산더 대왕이 어느 날 노예 선을 방문했습니다. 많은 죄수가 쇠사슬에 발이 묶인 채 노를 젓는 비참한 노예 선입니다. 대왕은 죄수들에게 무슨 죄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죄수들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각각 자기의 결백을 말했습니다. ‘나는 억울한 사람입니다.’ ‘나는 죄가 없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잡혀 이렇게 노예가 되어 고생합니다.’ 등등 거의 모두 대왕 면전에서 자기들의 변명만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만 다른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참으로 죄인입니다. 여기서 이 고생을 해서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의 솔직한 말을 들은 알렉산더 대왕은 부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여기 모든 사람이 다 의인인데 이런 의인들 속에 왜 너 같은 죄인이 있느냐?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 여봐라. 이 죄인을 풀어주고 이 사람의 집으로 보내라.’

 

이처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스스로 옳다고 믿는 죄인과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의인입니다. 아무리 의인인척해도 사람들은 속지 않습니다. 얄팍한 사람도 속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 속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먼저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옳다고 믿는 사람은 반성하거나 회개할 줄 모릅니다. 상대방이 틀렸다고 질책하며 심지어 상대방을 죄인으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자책하거나 회개하는 마음을 찾기 힘듭니다. 그들은 용서받는 은혜도 누릴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의 전형입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정하면 회개와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의인이 되는 축복도 함께 받습니다.

 

누구도 가정과 직장 사회생활에서 갈등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쪽만이 옳다고 독불장군 식으로 밀고 나간다면 해결책을 찾기 힘듭니다. 상대방을 죄인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은 상대적입니다. 때로는 서로 인정해주고 인정받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사실 인간이 타인에게 죄지었다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경솔하고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자신의 판단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가정 아래 함부로 단정 짓지 않는 게 현명한 처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도 결국 상대방에게 처음부터 함부로 죄를 묻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피해를 끼치고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독화살이 먼저 자신에게 꽂히는 법입니다. 아마도 그 누군가는 나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는 느낌도 없거나 화살을 겨눈 적도 없다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화살을 맞았다는 것은 십중팔구 나만의 착각일 것입니다. 그러니 쏜 사람도 없는데 누구를 향해 용서를 한다는 말입니까?

 

용서가 어려운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남을 위해 용서를 한다고 착각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용서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분노의 독화살이 누구에게 먼저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오만이 얼마나 심했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독은 먼저 우리 몸을 마비시킵니다. 자신을 먼저 망가뜨립니다. 그래서 용서도 남을 해독하기 전에 나를 먼저 해독하는 겁니다. 용서는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행동입니다.

 

이집트로 끌려간 성조 요셉은 나중에 이집트 땅 재상이 되었습니다. 기근으로 먹을 것을 구하러 온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45,4~5)

 

그는 자기가 겪은 모든 시련이 하느님의 계획이었다고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만약 요셉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고 그나마 이스마엘 대상에게 팔아넘긴 형제들에게 원한을 갖고 증오심을 키웠다면 이렇게 이집트 재상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레 화병으로 요절했을 겁니다. 일찍이 형제들을 용서하려는 마음이 자리 잡았기 때문에 인생을 긴 호흡으로 깊이 숙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겪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8,28) 말씀을 떠올리면 되겠습니다.

 

감히 남을 용서하려는 마음보다 먼저 이것이 혹시 하느님의 먼 계획은 아닐까?’하고 묻는 여유를 갖는다면 용서의 횟수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일흔일곱 번이 아니라 칠천 번이라도 가능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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