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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렬 신부님_[구약 묵상 시리즈 제26강] 율법과 십계명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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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4-16 ㅣ No.171564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날씨가 그저께는 참 더워서 금세 여름이 오나 보다 싶었고 또 꽃들이 막 터뜨리기 시작했는데
오늘은 또 아침부터 바람이 아주 찹니다.
이러다가 제대로 된 봄도 못 맞이하고 바로 여름을 맞이하지 않을까.
계절들이 서로 갈등을 겪고 있는 자연재해는 결국에 우리 사람들한테 원인이 있겠죠.
 
지난 시간에 율법과 십계명 그 세 번째 강의까지 했습니다.
오늘도 역시 율법과 십계명에 관한 이야기, 가능한 오늘 다 끝을 내보려 합니다.
지난번에 5계명까지 했죠. 오늘은 제6계명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이렇게 나와 있죠.
마찬가지로 이 6계명에도 단서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죽여선 안 된다는 얘기죠.
이런 사람은 죽여도 되고 이런 사람은 살인해선 안 된다는 단서 조항이 없습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이 말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들리고 있죠.
나는 사람 죽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내가 죽일 까닭이 없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과연 어떠한 형태로라도 사람을 죽인 일이 없었을까?
살인은 육적인 살인이 있고 영적인 살인이 있겠죠.
 
육적인 살인은 말 그대로 실제로 죽이는 겁니다.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 그것을 윤리적으로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군인이기 때문에 총을 가져야 하고, 총은 살상을 위해 만들어진 거죠.
여호와 증인들은 군대에 가더라도 태극기를 보고 경례도 안 하고 무기를 잡지 않습니다.
아무튼 인류 역사상 사람과 사람끼리 감정이 상해서 발생한 살인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전쟁을 통해서 정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인류의 역사를 보면 몇몇 안 되는 독재자들, 그런 사람에 의해서 전쟁이 일어났죠.
토인비는 ‘인류의 역사는 소수의 창조자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소수의 창조자가 선한 쪽으로 세상을 만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론 그 소수의 창조자가 선한 쪽으로 과학을 발전시키고 또 지구촌의 복리를 위해 열심히 살다 가신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자기의 권력욕 때문에, 100년 200년 가지고 살지도 못할 그 권력을 누리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까?
히틀러, 스탈린, 수도 없이 많은 폭군, 소위 민족주의를 앞세우면서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정당화시켜서
수없이 많은 젊은이와 유대인들, 또 자기 정적을 얼마나 많이 살인했습니까?
그 인간들 당연히 지옥에 가 있겠죠. 나중에 죽어서 좀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놓고 정말 뻔뻔하게 좋은 데 가 있으면 억울해서 못 삽니다.
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었던 그 못된 인간들, 수도 없이 많은 살인을 저질렀던 사람들,
또 권력 앞에 총을 들고 나가서 싸울 수밖에 없었고 살인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젊은이의 원한.
이렇게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살인이라고 합니다.
실수로 죽이든, 고의로 죽이든, 전쟁터에서 죽이든 모두 살인입니다.
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엄마 뱃속에서 의사들의 칼날에 찢겨 죽은 수많은 낙태아.
글쎄요. 전쟁터에서 죽은 숫자 못지않게 인류 역사상 낙태시킨 아이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어쩌면 살아있는 우리도 엄마 뱃속에서 낙태가 될 뻔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은 OECD 국가에서 낙태 1위입니다.
자살도 1위고, 노인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꼴찌고, 이런저런 부끄러운 것들이 많습니다.
 
영적인 살인을 우리는 실제로 자주 합니다.
영적인 살인을 다른 말로 무관심이라고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이 깨지면 무관심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성서에서 무관심은 영적 죽음 내지 영적 살인을 뜻합니다.
한 집 안에 있어도 돌 보듯 물건 보듯 서로를 유령 취급하는 가족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벌써 오래전부터 부부들은 각방을 쓰기 시작했고 또 각자 애인이 있고요.
부모와 자식 간에도 대화를 안 하고 산 지도 한참 된 가족들, 가정이 아니라 그냥 심한 말로 가정의 흉내를 낸 집들이 참 많죠.
영적인 살인.
우리가 말로써, 입으로써 혀로써 함부로 다른 사람 판단할 때 당하는 사람은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낍니다.
그 상처가 워낙 크기에 성경 말씀 그대로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
영적인 살인을 우리는 밥 먹듯이 할 때가 참 많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지켜나갈 때 ‘사람에게 순종하느니 하느님에게 순종한다’라는 결심으로 지켜나가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은 정말로 철저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이 죽임을 당해도 이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할 중대한 문제는 참 많습니다.
그런데 입을 다물고 있는 거죠.
평화를 위해서도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아마 그것이 첫 번째 과제가 될 것입니다.
 
아울러 ‘살인하지 말라’를 묵상하며 함께 묵상해야 할 것은 마태복음 5장 21절부터 26절까지입니다.
거기에는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옛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므로 재단에 예물 드리려 할 때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이 나거든 그 예물을 재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이런 얘기들이 쭉 나옵니다.
 
예수님이 얘기하신 마태복음 5장의 뜻은 그거죠.
살인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거라는 겁니다.
성서에 나와 있는 것처럼 성내는 것, 그리고 바보라고 욕하는 것, 멸시하는 것,
이런 것들을 제때 잡지 않으면 그것이 커져서 나중에는 살인까지 갈 수 있다는 거죠.
영적인 살인이든 육적인 살인이든 간에 제가 피해자한테 그런 얘기를 많이 하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왜 상처가 생기느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제일 큰 것은 늘 주면서 돌아올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조금만 기대하더라도 그 ’조금만 기대‘가 채워지질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다섯을 베풀고 둘을 기대했는데 사실은 둘은커녕 하나도 안 돌아올 때가 많죠.
그때 사람이면 누구나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그 서운한 마음의 씨앗이 내 영혼의 밭에 떨어지면,
물 안 주고 비료 안 줘도 분노의 싹이 올라오고, 분노의 싹에서 미움의 줄기가 커지면서
그 미움의 줄기 가지에서 아까 얘기한 영적 살인인 무관심의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영적 죽음, 영적 살인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거로부터 시작된다고 그랬죠.
서운한 마음, 그리고 분노하는 것.
그래서 그 불을 끄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영적 살인을 할 수밖에 없고요.
또 뉴스에 나오듯 정말 사소한 것 때문에 때려죽이고 칼로 찌르는 단계까지도 갈 수 있죠.
 
제7계명이 뭡니까? ‘간음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역시 마태복음 5장 27절에 나옵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오른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낫다.
또 오른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던져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이렇게 예수님은 정말 예리하고 엄격한 말씀을 우리에게 하셨습니다.
 
살인도 그 시작이 있듯이 간음 역시 분명히 그 시작이 있다는 겁니다.
성욕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창조주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죠.
그렇지만 그 성욕을 다스리지 못한 것이 음란이 됩니다.
또 실제로 살인 사건의 밑바닥을 보면 대개 치정 문제, 남녀 간의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나중에 다윗 이야기를 성서 묵상 끝부분에 하겠지만, 다윗을 우리는 성왕이라 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보면 다윗도 아주 큰 실수를 한 적이 있지요.
전쟁터에 나간 우리야의 아내를 침실로 끌고 오게 해 강간하다시피 자기 성욕을 채웁니다.
거기서 태어난 자식이 솔로몬이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봤을 때 ‘내가 나쁜 생각하는군.’ 하며 물러나고 도망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도망치질 않았죠.
그래서 나중에 다윗은 살인죄까지 짓지 않습니까?
우리야의 아내가 자고 나갔기 때문에, 혹시 임신이 됐을까 걱정하면서,
임신이 되더라도 남편의 아이가 임신이 한 것처럼 꾸미려고 우리야를 불러들여서 부인과 동침하게 하죠.
하지만 이 우직한 군인 우리야는 갑옷도 벗지 않은 채 그냥 문밖에서 밤샙니다.
그래서 그 작전이 실패하니 다윗은 우리야에게 편지 한 통을 주죠.
그 편지의 내용은 뭡니까?
‘이 편지 들고 가는 놈 최전방으로 내보내서 반드시 죽여라.’
실제로 죽습니다.
결국 다윗은 자기의 간음을 덮기 위해 살인죄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아까도 살인 밑바닥을 보면, 간음 섹스 같은 것들이 깔려 있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 제가 했던 말 중에서 혹시 기억하고 계십니까?
성적 유혹을 받을 때 그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을 요셉이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했죠.
보디발 아내의 그 끈질긴 추근거림에 요셉은 첫 번째 무기로 확실히 의사 표현을 합니다.
‘싫습니다.’
그리고 그래도 또 계속해서 달려드는 보디발의 아내를 피하려 멀리합니다.
‘멀리하는 것’
촛불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손가락이 델 확률은 커지지만, 멀어질수록 작아지죠.
그런데도 안 통했을 때는 세 번째가 뭐냐?
‘도망치는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다윗은 침실로 끌어당기는 보디발 아내를 뿌리치면서 겉옷을 뺏기죠.
그 대신에 순결의 옷을 지킵니다.
하지만 ‘싫습니다.’, 멀리하는 것, 도망치는 것, 이 세 가지를 완벽하게 했어도 네 번째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라고 했죠.
네 번째는 뭐냐?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성욕으로 인하여 간음죄를 지으려고 할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고 또 하느님의 엄한 심판,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경외심, 이런 것을 느껴야만, 멀어지고 도망치는 것이 효과가 있다는 얘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시죠?
 
제8계명은 ‘도둑질하지 마라.’
어찌 보면 단순한 뜻으로 도둑질하지 말라고 적혀 있죠.
물론 보통 건전한 윤리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남의 것 훔치는 짓은 하질 않습니다.
사실 제8계명과 ‘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못한다.’의 제10계명은 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이 8계명은 후딱 읽고 넘어가기가 쉽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남의 마음이나 남의 시간을 훔치고 있고 그런 적이 있었던 자신을 잊어서는 안 될 겁니다.
남의 마음, 그리고 남의 시간을 훔치는 것도 역시 도둑질입니다.
그리고 정당한 방법을 통해 돈을 빌렸는데 갚지 않고 떼어먹어선 안 되죠.
사정이 갚을 수 없으면 적어도 노력은 해야 합니다.
돈 꿔준 사람의 피 같은 재물을 함부로 쓰고 본인은 아무 불편 없이 떵떵거리고 살면서 갚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아주 큰 심판받을 것 같아요.
적어도 갚으려고 하는 존중, 의지 이런 것을 보여야지요.
신뢰해서 돈을 빌려줬는데, 배 째라 한다면 누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조금이라도 열심히 갚으려고 하는 노력을 보일 때 그 사람은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이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는 것’의 대상 첫 번째는 물질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다른 사람의 마음입니다.
세 번째로는 남의 시간을 훔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8계명과 제10계명은 같은 의미로 쓰인다는 거죠.
 
살인하지 말라, 거짓증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이웃 사람의 생활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입니다.
그렇지만 2천 년이 지난 현대까지 기본적인 윤리는 끊임없이 깨지고 범해져 왔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도 사람 죽이는 일이라든지 훔치는 일은 악이라고 알고 있는데,
지금도 역시 모든 나라에서 이러한 범죄가 끊이질 않고 있다는 얘기죠.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그겁니다.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 ‘하느님 앞에서의 자세’가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하느님의 눈을 모르는 사람은 다만 사람의 눈만을 의식하고 살아갑니다.
사람의 눈은 속이려고만 하면 속일 수도 있습니다.
필경 완전 범죄를 계획한다면 감쪽같이 살인하거나 남의 재물을 탈취하거나 이웃 처녀나 부인을 범할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만 진실하게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사람의 눈을 속이고자 생각하지도 않을 겁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눈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그같이 완전한 사람은 과연 존재하고 있는가?
아무튼 우리 모두는 뒤돌아보면 크거나 작거나 하느님의 눈을 우려하는 것보다, 하느님의 눈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살았던 적이 많았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들은 1계명부터 4계명까지 수호하지 못하게끔 태어난 존재들인지 모릅니다.
그 이유는 원죄를 베고 있기 때문이죠. 원죄를 메고 살기 때문에 그렇죠.
원죄의 영향입니다.
이 원죄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으로 생활하고, 자기중심인 까닭에
사람을 증오하고 욕망을 품고 5계명 이하의 죄들을 범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은
십자가에 의해 용서하여 주시는 그리스도에게로 우리를 돌아오게 합니다.
 
한 집안에는 그 집안에 정신이 있고 가풍이 있습니다.
국가에도 물론 이런 정신이 살아있어야 하죠. 콩가루가 돼서는 안 되는 겁니다.
구약성서 율법을 보면 하느님 섬기는 일에 기반을 둔 높은 정신에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갔을까?
마태복음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 하고 질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 뭐라고 그러십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그리고 모든 율법은 두 개로 요약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의 중심이라고 얘기하셨죠?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율법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 두 계명에서 벗어난 율법은 단 하나도 없다 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신명기 24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신부를 맞은 신랑은 싸움터에 나가지 않아도 되고 무슨 일에든지 징용당하지 않는다..
한 해 동안 그런 일에서 면제되어 집에 있으면서 새로 맞은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
이 얘기는 뭐겠습니까?
결혼한 후에 1년 동안 소집영장이 나오지 않는다는 인정이 있는 배려의 법이라는 겁니다.
지금부터 3천 년 전에 이미 이러한 율법이 있었다니 참 대단한 율법이라 생각됩니다.
율법주의자지만 그 옛날에 벌써 결혼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있다고 하는 것은 놀라움을 자아내게 합니다.
 
또, 신명기 24장 14절 15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품을 파는 사람을 억울하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너희 나라, 너희 성문 안에 사는 사람이면
같은 동족이나 외국인이나 구별 없이 날을 넘기지 않고 해 지기 전에 품삯을 주어야 한다.
그는 가난한 자라 그 품삯을 목마르게 바라고 있는 것이다.
너희를 원망하며 외치는 소리가 야훼께 들려 너희에게 죄가 돌아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당시에 유대나라는 월급제가 아니라 일급제였죠.
이렇게 율법은 빈곤한 자 옆에 함께하면서 임금을 당일 지급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런 율법은 빈곤한 자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우리나라의 근로기준법, 노동 기준법이 몇 년도에 만들어졌는지 잘 모르겠지만,
3천 년 전에 유대 나라에서는 이미 이러한 근로기준법이 제정됐다고 하는 사실은 정말 칭송받아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직도 주변에 보면 임금 미불과 노동 과중 문제로 노동자들이 힘들어하고 있죠.
그런데 유대에서는 3천 년 전에 신명기에 법으로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있으니,
이 율법이 얼마나 진보적인 것이었는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특별 ‘성문 안에 거하는 사람이면 같은 동족이나 외국인이나 구별 없이’란 말이 나옵니다.
외국인에 관해서 이스라엘 법률은 특별히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17절에는 ‘떠돌이와 고아의 인권을 짓밟지 마라.’고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객(客)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라고 나옵니다.
 
19절에는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이삭을 밭에 남긴 채 잊고 왔거든 그 이삭을 집으러 되돌아가지 마라.
그것은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에게 돌아갈 몫이다.
그래야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가 손수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주실 것이다.’
정말 아름다운 율법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레위기 23장 22절에도 나옵니다.
‘너희가 사는 곳에서 추수할 때 곡식을 모조리 거두지 말고 거두고 남은 이삭도 줍지 말며
가난한 자와 외국인이 줍도록 남겨놓아야 한다.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35분 동안 강의를 했죠.
다음 시간에는 신명기,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 시대 때는 율법을 악용하고 권력자들이 자기의 권력을 위해서 그것을 함부로 파괴하고
또 편리한 대로 고쳤기 때문에 문제였던 것이지,
율법 자체는 사실 굉장히 진보적이고 또 어떻게 보면 근대 시대에 만들어진 법보다도 훨씬 더 앞서 나가는 법들이 많았습니다.
여러분들 이번 기회에 신명기 한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옛날에 사람의 인권이라든지 또 없는 자들에 대한 배려, 또 외국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 같은 것들이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법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느님에게 선택받은 민족답게 이런 법을 가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특별히 동태복수법이 나오죠. 보상법이라고 합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겠습니다.
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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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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