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지순례ㅣ여행후기

"그분"이 불러주셔서-- 라테라노 대성전과 토스카 (다섯 번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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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항 [vinchen10] 쪽지 캡슐

2004-11-15 ㅣ No.423



넘치는 "그분"의 사랑

    ....하느님은 아무리 작은 소리로 이야기해도 / 우리 가까이 계시므로/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십니다./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는 / 날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혼자 머물러/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너무나 위대하신 분 앞에서/ 낯선 사람처럼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겸손하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청해야 합니다./ 우리의 어려움을 하나하나 이야기하고/ 모든 것이 올바르게 되도록 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 * * *

  오늘은 풋치니와 그 유명한 토스카의 무대가 되었던 "거룩한 천사들의 성(城)"과 라테라노 언덕에 자리한 로마교구 주교좌 성당인 "성 요한 대성당"을 둘러 본 감상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사실, 순례를 마음 먹고서 제일 먼저 떠올렸던 곳은 "거룩한 계단성당"이었답니다. 그래서 로마 대교구의 주교좌 성당 "라테라노 대성당" 일명 성 요한 대성당(San Giovanni in Laterano)을 찾아 나설 수밖에....

  1,304년 클레멘스 5세가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 가기전 까지 전 세계 가톨릭의 본부이며 상징인 교황청이 자리했던 라테라노궁과 라테라노 대성전은 기독교를 공인했던 콘스탄티누스황제가 313 년 멜키아데스 교황에게 봉헌한 라테라노 땅에 세워졌습니다. 그리스도교가 공인 되면서 지상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교회가 되지요.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개축 공사하기 전) 보다 12 년이나 앞선 이 성당은 원래 구원자이신 하느님께 봉헌되었답니다.
  그후, 대 그레고리오 교황 때 세례자 요한에게 봉헌되어 "라테라노의 성 요한 대성당"으로 불리어 오다가 16 세기에 대수리를 마친 후 다시 사도 요한에게 봉헌되어 이제는 "라테라노의 두 성 요한 대성당"으로도 부르고 있으나 공식적인 명칭은 "구원자 하느님의 대성당"이라 지요. 
  로마의 4대 성당으로 꼽히는 이 성전은 넓게 펼쳐진 잔디밭 정원이 인상적인 성당입니다. 성전을 바라보며 오른 편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헤레나 모후가 거처하던 붉은 벽돌(연한 주황색) 이 특이한 라테라노궁이 조화를 이루고 서있습니다. 나중에는 교황님의 궁전으로 사용한 유서 깊은 곳이지요. 

  먼저 성전으로 들어가 볼까요. 성전 내부 양 편에 바로크양식의 원주가 제단까지 도열하여 서 있습니다. 이 원주와 원주사이의 벽면에는 베르니니와 그의 제자들이 제작한 12사도상이 조각되어 는 데 흡사 제단 위에 자리한 교황좌를 호위하는 모습이더이다. 도열한 원주가 끝나는 곳에 자리한 제단을 교황 만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교황의 제단"(중앙 대제단)이라고 하지요. 검소하지만 품위가 느껴지는 큰 의자(교황좌)가 홀로 자리한 제단 위에는 고딕양식의 발다키노(천개)가 웅장한 자태로 솟아 올랐는데, 이 천개에는 베드로와 바오로 성인의 흉상이 있고,이 흉상 안에는 두 성인의 두개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곳에는 두 분의 유골만 보관하고 있는 게 아니라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되었다는 삼나무 탁자와 카타콤베에서 가져온 많은 유물도 보존하고 있지요.

  베드로 대성전의 압도하는 화려함보다 라테라노 성당의 근엄한 모습이 순례자를 편하게 합니다.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으뜸인 교회"라 일컫는 이곳에는 라테라노 공의회가 다섯 차례 열렸고, 교황청과 뭇소리니의 이태리정부와 종교협약(라테라노 조약, 교황청의 재산인정과 바티칸 시국을 공인하여 이태리와 알력관계에 있던 교황청과 관계개선을 이룸)을 맺은 유서깊은 곳이랍니다. 

  대성전에 들어오는 입구에는 커다란 청동 조각,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 수도원)를 교황님께 공인 받으러 온 성인과 수사님들의 모습이 실물 크기보다 훨씬 크게 조각되어 있어 아씨시의 감동이 다시금 일어나는 것을 느껴서 행복했습니다.

  대 성전을 바라보며 오른편으로 꺽인 곳에 자리한 "거룩한 계단 성당(la Chiesa di Scala Santa)"을 바라보는 순간, 그토록 기다려온 님을 대하듯 가슴이 울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가 예루살램의 빌라도 총독관저의 대리석 계단을 가져다 놓은 거룩한 계단(scala santa)성당이 반겨 줍니다.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 나아가실 때 한걸음 한걸음 밟은 계단으로 아직도 몇 군데에는 예수님께서 흘리셨던 핏자국이 남아 있어요. 

  세계각지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이 무릎걸음으로 기도하며  올라 가다가 핏자국이 보전되어 있는 곳에 입맞춤을 하지요, 뜨거운 가슴으로...
  요즈음은 대리석 계단을 보호하기 위해 대리석 계단 위에 나무 계단을 깔았답니다. 나무 계단 때문에 그 아래 있는 귀중한 돌계단을 잘 보존할 수 있을뿐 더러 돌계단에 얼룩져 있는 "그분"의 핏자욱도 생생하게 볼 수 있게된 셈이지요.
  어처구니없이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으셨던 "그분"의 수난을 생각하며 묵주기도를 바치며 무릎걸음으로 28계단을 올라가는 순례자들 틈에 끼었던 첫 번째 로마 방문을 생각해 봅니다.  맙소사, 아무리 무릎 꿇는 일이 드문 요즈음 생활이지만 첫 번째 계단에서 묵주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무릎이 깨어지는 아픔에 비명을 지를뻔 했답니다. 이건 대단한 체험이었습니다. 세상에는 분명한 근거를 대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겠지만 첫 번째 계단, 그것도 주님의 기도를 체 끝내지도 못한 짧은 시간인데도 결국 식은 땀을 흘리며 일어 설 수 밖에 없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내 보잘것 없는 신앙생활을 돌이켜 보며 부끄러움만이 물밀듯이 밀려 오던 첫 방문 이후, 이곳에 왜 그리 오고 싶었을까요?

  지금 나는 반듯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주님께 부끄럽지 않게 나설 수 있다고, 뻔뻔스런 이유를 대려한 것은 아닙니다.
감히 말씀 드린다면,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면서 어쩌지 못하는 "그분"께로 향하는 그리움이 나를 이끌어 온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내 기다림에 반해 "거룩한 계단 성당"은 오후 4시에 문을 연다는 사실에 맥이 빠졌지만 한편으로는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니까요. 또 한번의 시험이 부담이 되어서 말입니다만, 돌아서는 내 가슴은 그리움이 무산되어버린 허탈함에 못내 쓸쓸해졌습니다.

  요한 성당을 뒤로하고 로마를 세로 지르는 테베레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천사들의 석상이 늘어 서있는 "천사들의 다리"가 참 아름답다 했는데 다리 너머 원통형의 고색창연한 성을 마주하면 아~!하고 말을 잇지 못하지요.
  130년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세운 정방형의 기단 위에 세워진 웅장한 원통형의 단층 탑으로 이 탑의 외부 벽은 도리아식 기둥과 대리석상으로 장식되었으며, 그 정상에는 원래 영묘(가족묘)로 쓰던 하드리아누스황제가 사륜마차를 끄는 위엄에 찬 모습의 청동상이 올려져 있었답니다. 그후 6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오늘 날의 긴칼을 칼집에 다시 꽂는 대천사 미카엘상으로 바뀌어 세워졌습니다.

  이곳이 이태리가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자코모 풋치니의 그 유명한 오폐라 "토스카"의 무대였던 "성 안젤로성"이 아닌가요?
나폴래옹 군대가 이태리와 오스트리아 왕국의 연합군을 상대로 연전 연승하던 시대, 베토벤이 나폴래옹에게 교향곡 "영웅"을 헌정하려할 정도로 왕정 타파와 민중들의 힘으로 공화정부를 세우려던 급진적 혁명의 불길이 온 유럽땅에 타오르던 시절의 이야기이지요. 새 시대의 도래를 꿈꾸던 젊은 화가 카바라도시와 사랑을 가꾸던 토스카의 기구한 사랑을 그린 오폐라 "토스카"의 클라이막스.

  성 안젤로성, 혁명아 카바라도시가 그의 연인 토스카와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회상하면서 먼동이 트는 로마의 하늘을 배경으로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을 부르고 총살형에 쓰러집니다.  이어 나타난 토스카는 연인의 죽음 앞에 절망을 하고 성 위에서 테베레 강으로 뛰어내려 자살을 감행하며 막을 내리는 슬프디 슬픈 젊은이의 사랑을 그린 "토스카"가 아닙니까?  가혹한 운명때문에 더욱 애절한 사랑의 무대,  "거룩한 천사들의 성"을 둘러 보며 토스카의 발자취를 찾아 보는 것이 다 부질없는 일일까요?

   (..별은 빛난다
흙의 향기도 그윽한 저녘
문소리 나며 모래 밟는 발소리
달려가는 나
뜨거운 마음에 손을 잡으면
별빛에 떠오르는
꽃과 같은 그 모양

영원히 사라진 꿈이여
그 때는 가고,절망 속에 다가오는 임종!
이렇게 생명이 애석할 줄이야, 애석할 줄이야!
...)

  '거룩한 천사의 성'이 맨 처음부터 그렇게 불려진 것은 아니었답니다.
맨 처음에는 황제의 영묘로, 또는 침략자로 부터 로마를 지켜내던 요쇄의 역활을 하던 이곳은, 1,590년 유럽을 휩쓸던 페스트로 부터 로마를 구해 내기위해 신자들과 거리를 행진하며 기도를 하던 그래고리우스 교황은 영묘 꼭대기에 서서 칼을 칼집에 집어 넣고 있던 천사의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의 구원이 내리셨다는 징표지요. 교황은 천사의 모습을 조각해 성의 꼭대기에 세운 이래 성 안젤로, 거룩한 천사들의 성(castel sant' Angelo)으로 불러오게 되었답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그분"의 사랑, 그 사랑에 흠뿍 빠져 돌아 오는 멀고도 먼 동방에서 온 순례자의 귓전에 루치아노 파바롯티의 유려한 음성으로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e lucevan le stelle)이 들려오고, 무심하게 흐르는 테베레 강물은 토스카의 붉디붉은 순정을 우리에게 속삭이며 "넌 사랑의 승리를 믿느냐?" 며 우릴 유혹하네,... 유혹하네...

  저녁, 로마의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석양은 참 보기 힘든 것이라고 누군가 가난한 순례자를 부추깁니다.

  외로운 순례자가 보내는 저녁인사를 그대는 거절하지 마시라...  

"Buona notte!"

  * * * *

  오늘이 바로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이네요, 그래서 이 편지를 옮기면서 다시한번 대성전의 모습을 불러 가슴에 모아 봅니다. 화려하기 보다는 근엄하고, 엄한 아버지보다는 일부러 미소를 감추고 엄한 체 위엄을 부려 보이는 어머니 모습이 사뭇 그립습니다. 넓디 넓은 잔디밭과 교황님께 수도회의 청원을 드리던 프란치스꼬 성인과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의 청동상 모습이 크게 넘쳐 옵니다. 다시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어 라테라노 언덕의 성전에 가고 싶네요.

  또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헤레나 모후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빌라도 총독관저의 대리석 계단과 숱한 예수님에 관한 유물을 이 성전에 보관하였던 것은 바로 헤레나 모후가 라테라노궁전에서 거쳐한 인연이기도 하지 않겠습니까?

 

         제 글, 계속 올려도 될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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