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토)
(백)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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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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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경 [ayo98060] 쪽지 캡슐

2014-06-11 ㅣ No.89776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6월 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As you enter a house, wish it peace.
If the house is worthy, let your peace come upon it;
if not, let your peace return to you.
(Mt.10,12-13)
 
제1독서 사도 11,21ㄴ-26; 13,1-3
복음 마태 10,7-13
 

언젠가 목욕탕에 갔다가 온 몸에 화려한 용 문신을 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얼굴도 약간 험상궂게 생겼습니다. 또 걸을 때에도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걷다보니, 사람들이 이 사람 곁을 피하더군요(물론 저 역시 피했습니다). 본인은 자신의 온 몸 문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저는 ‘참 쓸모없는 짓을 하고 다닌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거부감을 자아내는 저 용 문신에 대해 과연 늙어서도 자랑스러워할 수 있을까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쓸데없는 것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앞선 사람처럼 화려한 용 문신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도 있고, 죽으면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것들을 움켜잡고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지요. 금은보화, 세속적인 지위들……. 물론 이를 위해 자신이 기울인 노력을 생각하면서 자랑을 하려는 것이겠지만, 진정으로 자랑할 만한 것들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다음은 어떤 분으로부터 SNS 메시지를 통해 받은 이야기입니다.

중국 절강성의 경제계 인물인 왕쥔야오가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인이 19억 위안(한화로 약 380억)을 상속받게 되었지요. 그리고 얼마 뒤, 이 부인은 전 남편의 운전기사와 재혼을 한 것입니다. 이 전 남편의 운전기사는 행복에 겨워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 나는 내 자신이 왕 사장님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왕 사장님이 계속해서 나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많은 재산은 결국 누구의 것이 되었습니까? 나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 되고 말았지요. 따라서 세상의 것에 연연하는 등의 쓸데없는 일에 전념하는 것보다는,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삶을 선택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나의 노력과 재주만으로 지금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갖게 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나의 능력과 힘을 뛰어넘는 주님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거저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를 거저 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모든 것들을 하늘나라에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까?

정말로 자랑스러워할 것은 무엇입니까? 화려한 용 문신? 많은 금은보화? 높은 지위와 명예? 이러한 것들은 잠시의 만족만을 가져다 줄 뿐으로, 정말로 영원한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인정해주는 삶. 바로 나눔과 사랑의 삶인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바르나바 성인이 바로 그런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교회 공동체에 바치고 열성적으로 선교하여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였지요. 이처럼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내어 놓을 수 있는 결단과 용기, 그리고 주님께 대한 순명을 보여주신 성인의 모습을 닮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휴식은 게으름도, 멈춤도 아니다. 일만 알고 휴식을 모르는 사람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이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쉴 줄만 알고 일할 줄 모르는 사람은 모터 없는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아무 쓸모가 없다(헨리 포드).



 

무엇이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떤 사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걱정거리라고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사람의 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이런 차원에서 죽음이란 것도 본래 그 자체는 두려운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이것이 진정으로 두려운 것이었다면 가톨릭 안의 많은 순교자들이 나오지 않았겠지요.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리들과는 달리 모두 죽음 앞에서 당당했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결국 무섭고 두려울 것이라는 우리들의 선입견 그 자체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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