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성지순례ㅣ여행후기

이스라엘의 성지 순례 - 너무도 감동이 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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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철 [ycsong] 쪽지 캡슐

2004-12-23 ㅣ No.434

예수의 탄생에서 부활까지
- 약속의 땅, 이스라엘 -

 

들어가는 글

 

  일탈의 즐거움은 인생의 새로운 활력소가 된다. 그중 여행은 가장 건전한 일탈이다. 그러나 성지 순례는 보통 일탈과는 거리가 멀다. 신앙적으로 좀 더 바람직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떠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 공부도 해야 하고 역사 공부도 해야 한다. 순례는 공부다. 공부는 골치 아프다. 공부뿐만이 아니다. 묵상과 기도도 열심히 해야 한다. 이 골치 아픈 순례를 즐거움 속에 해야 한다. 그래서 공부와 묵상을 조금만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장도에 올랐다. 공부는 갔다 와서 하자.
  이번 순례는 모세의 출애굽에서부터 예수님의 행적을 거쳐 사도들의 신앙생활에 이르기까지 더듬어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나라가 수십 개국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집트와 이스라엘 그리고 이탈리아의 삼 개국으로 한정하였다.
  막상 순례를 떠나고 보니 나라나 지역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르다. 그로 인해 받는 은총의 정도도 차이가 크다. 나의 경우에는 이스라엘에서 받은 감명이 남달리 컸다. 부족한 공부 때문이겠지만, 이집트와 로마에서는 순수한 순례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다른 일반적인 관광 요소가 끼어 들어 의미가 다소 탈색되었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여행이 재미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성지 순례'라는 한 가지 의미로 집약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두 나라의 느낌은 기회가 있으면 그 때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스라엘 한 나라에 국한하여 경험을 정리하고자 한다.

 

8월 13일(금)

 

구약이 숨쉬는 사해

 

  이집트를 벗어나 북쪽으로 전진을 거듭하니 드디어 사해의 남쪽 연안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가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수 차례에 걸쳐 용서를 청한 소돔이다. 차에서 내리니 길 왼쪽 언덕 위에 기둥 바위가 하나 서있다. 바로 롯의 아내가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소금 기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먼 훗날 주님께서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때에도 속세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
  소문대로 사해의 염도는 높은 것 같다. 길가에 온통 흙과 뒤섞인 소금뿐이다. 맛을 보았더니 비명을 지를 만큼 짜다. 아니 쓰다. 주변의 경관이 암석 사막인 것은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으나 부분적으로 하얀 소금층이 끼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저녁 여섯 시경 해발 500미터에 있는 소도시 아라드에 도착하여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창세기 18,16-19,29 :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때문에 하느님께 빌었으나 결국 멸하신다)

 

8월 14일(토)

 

  오전 열 시경 사해 해변에 도착했다. 이곳의 해발고도는 -410미터. 깊은 바다 속에 해당한다. 모두들 북적대는 인파 속으로 파고 들어가 수영을 즐긴다. 물이 너무 쓰다. 염도가 삼십 퍼센트라니 보통 바닷물 염도의 열 배나 된다. 그러니 어떤 생물체도 살지 못할 수밖에. 눈에 물이 튀겨 들어가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따갑다. 개헤엄밖에 할 줄 모르는 내가 아주 부드럽게 배영을 즐기고 있으니 신기하다. 너무 오래 있으면 부작용이 생긴다 하여 수영을 중단하고 물가에서 머드팩을 즐겼다. 샤워를 하고 나니 피부가 부드러워 촉감이 아주 좋다. 그러나 사해는 환경 문제가 심각하다. 증발량이 심한데다가 이곳에서 추출되는 각종 미네랄이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어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앞다퉈 물을 낭비해버렸단다. 향후 50년 정도면 사해가 사라질 것이라고 하여 그 보존 대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젊은 시절 예수님께서 주름잡던 나자렛

 

  달리다보니 어느 새 주변 경관이 달라져 있음을 느낀다. 자세히 바라보니 이제는 더 이상 사막이 아니다. 지중해성 기후 지역에 들어선 것이다. 밀을 수확한 들녘이 평온하게 보이고 올리브나무나 오렌지 나무들이 재배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산에서는 경사지를 계단식으로 가꾸어 베두인족들이 양들을 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임에 분명하다. 하느님께서 이들을 편애하심에 틀림없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바로 여기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찌하여 그분의 아드님은 인정하지 않는가. 얼마나 더 큰 시련을 받아야 정신을 차릴런지….
  전면 차창에 언덕 위에 있는 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예수님께서 어릴 때부터 공생활 시작 이전까지 사셨던 고향 나자렛이다. 왼편에 둥그런 반원 모양의 산이 있는데 그 산이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변모된 모습을 보이셨다는 타볼산이다. 가파른 도로를 따라 나자렛에 오르니 성서에서 짐작한 것과는 달리 이미 상당히 큰 도시가 되어 있었다. 예수님께서 "예언자도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하신 그 나자렛이다. 오히려 낭떠러지로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이곳의 성모 영보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러 바쁘게 가고 있다. (루가 복음 4,24-30 :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

  나자렛의 동산을 한참 기어오르다 복잡한 시가지로 진입하여 버스에서 내렸다. 주변에 기념품 판매소가 즐비한 것을 보니 목적지에 가까이 왔음을 느끼게 한다. 다시 걸어서 5분쯤 올라가니 거대한 성당이 눈에 띈다. 이곳이 천사들이 성모님께 예수님 잉태 소식을 알려준 곳이다. 처녀가 임신을 하다니 그 당시로서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일이었을 게다. 들어서니 이미 예약된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미사를 드릴 수 없단다. 다행히 바로 옆에 있는 성가정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지하로 내려가니 성요셉 성인의 일터와 예수님 세례터가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서 우리 주님은 어린 시절과 성년 시절을 보내신 것이다. 아무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으니 친척들이나 이웃들이 인정을 하지 않았을 수밖에. 바로 여기서 '믿음이 먼저일까, 아니면 기적이 먼저일까'라는 의문을 갖는다. 복음을 통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믿음을 확인하신 후에야 기적이나 은총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믿지 않는 나자렛 사람들에게 기적을 베풀지 않으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루가 복음 2,39-40 : 나자렛으로 돌아온 아기 예수)

  성모 영보 성당으로 들어갔다. 쉬운 말로는 '성모님께서 예수 탄생 예고를 받은 성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층으로 만들어진 건물의 위층은 성당이고 아래층이 천사들로부터 예고 받은 동굴이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서 천사들은 마리아에게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라고 인사하였다. 순례객들은 동굴 앞에서 모두 경건하게 경배 드린다. 밖으로 나오니 세계 각 나라에서 성모님을 찬양하기 위해 만든 모자이크화들이 담벼락에 삥 둘러 있다. 우리나라의 것은 한글로 '평화의 모후, 찬미 받으소서'라고 쓰여 있다. (루가 복음 1, 26-38 : 예수 탄생의 예고)

 

예수님께서 마지못해 기적을 행하신 가나

 

  나자렛에서 북쪽으로 비탈길을 내려가면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이 공동으로 거주하는 지역이 나온다. 건물을 보면 확연히 구별할 수 있다. 대부분 유대인들의 주택은 개인 단독 주택들로 빨간 지붕에 정원도 갖추어 외관적으로도 풍요로움을 느낄 수가 있다. 반면에 아랍인들의 주택은 정원이 없는 3~4층 건물로 대가족들이 함께 거주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가나의 시가지에 들어가서 언덕배기를 걸어 올라가 보니 예수님께서 공적생활 이전에 첫 기적을 행하셨던 곳이 나타난다. 이곳이 가나 혼인 잔치 기념 성당이다. 성모님께서 간곡한 부탁을 하셨으나 "아직 나의 때가 오지 않았다"라고 하시며 거절하셨다. 그러나 결국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게 하시고 기도를 통해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을 행하셨던 그곳이다.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은총을 보여주신 한 예라 하겠다. 성당의 지하에는 그 당시 집터에서 나온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중 유리관 속에 들어 있는 돌덩어리가 눈길을 끈다. 이것이 바로  물을 포도주로 바꾼 그 돌 항아리이다. (요한 복음 2,1-12 : 가나의 혼인 잔치)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출렁이는 갈릴리 호수

 

  저녁때가 되어 갈릴리 호수 동쪽에 있는 엔게브 호텔로 돌아와 여장을 풀었다. 이 호수는 해발 -200미터. 주변에 수목이 무성하고 경관이 수려하다. 겁먹었던 베드로 사도의 체험을 하기 위해 수영하러 가셨던 신부님이 도저히 할 수 없어서 그냥 돌아 오셨다. 풍랑이 거세었던 것이다. 가서 보았더니 파도가 일 미터는 족히 이는 것 같다. 호수라고 하지만 그 크기가 작은 바다 정도이니 얕보아서는 안 된다. 특히 이 호수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해당한다. 그래서 지형적인 영향으로 밤낮에 따라 풍향이 바뀌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이 바람의 방향을 이용하여 가르침을 전달했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밤에는 산에서 호수 쪽으로 불어오는 이 바람 때문에 물결이 거칠어지는 것 같다. 특히 서쪽 계곡을 통해 불어오는 돌풍으로 배를 띄울 수 없을 만큼 파도가 높아질 때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베드로가 배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심한 풍랑 때문에 겁을 먹고 "주님, 살려주십시오"라고 한 말에 수긍이 간다. (루가 복음 8,22-25 : 잔잔해진 풍랑)

 

8월 15일(일)

 

예수님의 기적과 가르침을 따라서

 

  아침에 일어나니 놀랍게도 호수가 잔잔해졌다. 성모 승천 대축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으신 후 공적 생활을 시작하셨다. 오늘은 주로 이 갈릴리 호숫가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따라 순례를 시작한다.
  갈릴리 호수를 끼고 달리다가 언덕을 기어오른다. 올리브와 유칼리 나무숲이 우거져 있는 언덕 위에 성당이 하나 보인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곳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 진복 팔단 성당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곳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이 들려오는 것 같다. 성당은 진귀한 꽃들과 잘 가꾸어진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고 성당 천정은 팔각형으로 만들어져 모서리마다 8개의 행복 선언문이 적혀 있다. (마태오 복음 5,1-12)

  진복팔단 성당을 뒤로하고 동산을 다시 내려와 오던 길로 5분 정도를 가니 호숫가에 성당이 하나 있다. 이곳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도 나머지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그 곳이다. 실제로는 기적을 행하신 장소가 이곳이 아니고 호수 동편의 요르단 영토라고 한다. 따라서 기적을 행하셨던 기념석을 이곳으로 옮겨와 그 위에 성당을 지었다고 하니 감동이 조금 덜하다. (마르코 복음 6,30-44 :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걸어도 될 거리를 버스로 이동하여 아침에 오던 길로 되돌아간다. 그곳 입구에 푯말이 있는데 'Peter Prime Church'라고 영어로 표기되어 있다. 그제야 '베드로 수위권 성당'이라는 의미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이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신 다음, 당신의 식탁에 제자들을 초대하신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그를 통해 영광을 드러내시겠다고 하시고, "나를 따라라"라고 하신 곳이다.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으시고 후에 초대 교황으로 세우셨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성당 밖 호숫가에는 예수님께서 서서 제자들이 탄 배를 향해 말씀하셨던 돌출된 바위가 있다. 성당 안에는 약간 평평한 너른 바위가 있고 그 앞에 'Mensa Christi'라고 써 있는데 그 뜻이 '그리스도의 식탁'이라는 뜻이다. (요한 복음 21,1-19 :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곳을 찾아간다. 배를 타는 곳이 현재의 지명으로는 '기네로사'인데 성서의 지명으로는 '겐네사렛'이다. 성서에 보면 건너편에서 오천명을 먹이신 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이곳으로 보내셨다. 그리고 산으로 올라가서 기도를 하신 다음 물 위를 걸어 배를 타고 가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다. 이곳에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물론, 옷자락만 만져도 병을 낫게 하는 기적을 행하셨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예수님과 반대 방향으로 배를 타고 가는 것이다. 배의 모형은 전통적인 목선인데 동력을 갖춘 현대식 선박이다. 하늘은 드높고 푸르며 호수는 너무도 잔잔했다.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며 베드로의 상황을 잠시 묵상해보았으나, 도무지 풍랑이 일어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것 같지가 않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즐기다가 한 시간 가량 걸려 가파르나움 부두에 배를 대었다. (마태오 복음 14,34-36 : 겐네사렛에서 병자를 고치신 예수) (마태오 복음 14,22-33 : 물 위를 걸으신 기적)

  가파르나움 성당은 베드로의 집터 위에 지었다. 가운데가 뻥 뚫려 있고 유리로 막아 아래의 집터가 보이게 하였다. 가파르나움은 예수님이 가장 많은 기적을 행하신 곳이다. 이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문둥병 환자, 악령 들린 자, 백인대장의 하인, 베드로의 장모 등을 비롯해 수많은 병자들을 치료해주셨다. 그런데도 도무지 이들이 회개하려 하지 않자 그만 화를 참지 못하신다. "가파르나움과 코라진을 비롯하여 베싸이다까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예수님 시대에 부유했던 그 도시가 폐허가 된 후 지금까지도 그대로 있다. 성당 바로 옆에는 무너진 마을과 유대교 회당을 볼 수 있다.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를 드린 다음 바로 옆 호숫가 식당에서 점심으로 베드로 고기를 먹었다. 도미와 모양은 비슷한데 특별히 맛있는 것은 아니다. (마태오 복음 8, 1-15 : 나병 환자와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예수) (마태오 복음 11,20-24 : 저주받은 도시)

  이동하는 도중 길가에 잠시 멈추어 풀 한 포기를 관찰했다. '그 씨앗은 너무도 작으나 자라면 큰 덤불이 되어 그 안에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라고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겨자씨 나무이다. 성서에는 나무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사실은 풀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실제로 겨자는 다 자란 것이 1-2미터밖에 되지 않고 일년생 식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지역에만 사는 엄지손가락 만한 작은 새들이 겨자씨 사이에 숨어서 산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오 복음 : 13,31-32 : 겨자씨의 비유)

 

싱크로나이즈드 종교 도시 - 예루살렘

 

  오늘의 순례 일정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예루살렘은 해발고도 800미터에 인구 40만의 도시로서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수도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1,000년경에 다윗왕이 수도로 세웠고, 이곳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으며, 모하메트가 승천했다고 믿는 곳이다. 고원지대여서 그런지 지금까지와는 달리 선선한 바람이 불어 한층 기분이 상쾌하다. 건물이 밀집된 지역은 주로 산의 정상부이고 산기슭은 버려진 채로 남아 있다. 긴 역사동안 잦은 외세의 침입으로 방어가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어 그랬으리라 생각된다. 길거리에는 검은 양복에 검은 모자를 쓴 유대교 사제들이 넘쳐나고 있다. 더운 여름에도 그 같은 차림으로 생활하려면 얼마나 힘들까. 가까이 다가오는 그들을 보고 냄새가 날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게 된다. 또한 그의 주위에는 자녀들이 적게는 네다섯, 많게는 열 명 가까이 따라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국가와 민족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그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가보다.

 

8월 16일(월)

 

아무나 못 들어가는 예수님 탄생지 - 베들레헴

  팔레스타인들의 폭동 때문에 베들레헴의 진입이 불가하다는 말을 들어 매우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다행히도 아침 식사 때에 가이드가 와서 통제가 풀렸다고 한다. 여기까지 와서 예수님 탄생 성지를 보지 못한 데서야 되겠는가.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돌출되는 언행을 삼가라는 주의를 듣고 바리케이트를 통과했다. 경계병의 번득이는 눈빛을 보니 몸과 마음이 움츠러든다. 검문소 앞에는 아랍인 노동자의 열이 이스라엘 시장에서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중에는 어제 시위 때문인지 목소리가 심하게 쉬어 있는 사람도 보였다. 우리를 안내하는 아랍인 가이드가 '관광객을 통해 벌어먹는 사람들인데 이스라엘 놈들이 통제해서 죽을 맛'이라고 투덜댄다. 잠시 후에 네 대의 승합차로 나누어 탄 우리는 예수 탄생 성당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으로 직행하지 못하고 그 옆 성 가타리나 성당 지하에서 미사를 보게되었다.
  이스라엘의 성지는 여러 종파에서 서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예수 탄생 성당은 아르메니아 정교회에서, 그 옆 성 가타리나 성당은 로만 카톨릭에서 관리하고 있다. 미사 시간을 맞추지 못하여 하는 수 없이 성 예로니모스 성인의 무덤인 지하 동굴에서 미사를 드렸다. 성인은 평생 이 동굴 안에서 성서 번역에 몸바치다 순교하셨다. 오늘날 성서의 원전인 불가타를 라틴어로 완성하신 분이다. 그를 도와 함께 순교한 바울라 성녀와 그의 딸의 무덤도 이 안에 같이 안치되어 있다. 놀라운 것은 헤로데왕의 학살 때 목숨을 잃은 어린 아이들의 무덤도 같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숙연해진다. (마태오 복음 2,16-18 : 아기들을 학살하다)

  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바로 그 옆에 연결된 다른 성당이 있다. 여기가 예수 탄생 성당이다. 그런데 입구가 엎드려야만 들어갈 정도의 좁은 문으로 되어 있다. '낮은 자세로 들어오라'는 의미로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지만, 그게 아니다. 외부 침입자들이 말을 타고 들어와 성지를 마구 헤치지 못하도록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막아버린 옛 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낡기는 하였으나 화려한 장식들이 눈을 황홀하게 한다. 성당 한 쪽에서 경건한 노래와 함께 미사 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예수님 탄생 동굴이다. 아르메니아 정교회 신부와 수사들이 아침미사를 드리고 있다. 짙은 향냄새와 묵직한 바리톤 음성의 성가가 이색적인 향취를 자아낸다. 40여분이 지나자 예식은 끝나고 밀떡을 밖에 있는 우리에게까지 나누어주어 맛을 보았다. 밀가루 맛이 그대로 살아 있는 누룩 없는 빵이다. 이제야 우리들의 경배 순서가 되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니 아름답게 치장한 구유 장소에 은빛의 별 모양이 대리석 위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라틴어로 '예수가 여기서 태어났다'라고 쓰여 있다. 낮은 곳으로 임하신 예수님의 구유가 그대로 놓여 있기를 바라고 들어갔던 나는 다소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경배하며 '실버 스타'에 입맞춤하고 돌아섰다. 이어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미사를 드리러 주교님께서 동굴 안으로 들어왔지만, 우리는 다음 여정을 위해 급히 빠져나왔다. (마태오 복음 1,18-25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빨마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한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한국인 선교사 집에서 오랜만에 순수한 한국식 점심을 먹었다. 물론 가지고 간 김과 고추장을 곁들이기는 했지만 정말 꿀맛이었다. 식사를 끝낸 후 '올리브 산'으로 향했다. 예루살렘 성의 맞은 편에 있는 해발 800미터의 산으로 예수님께서 입성 전후에 자주 왕림하신 곳이다. 주로 남향 사면에는 무덤과 사원으로 이루어져 있고, 대부분 올리브 나무숲으로 덮여 있는 지역이다. 오후의 햇볕이 이글거리고 있었지만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는데다가 바람이 불어 다소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루가 복음 22,39-46 : 올리브 산에서 기도하시다)

 

수퍼맨 예수

 

  올리브산의 정상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40일 동안 지내신 후 하늘로 올라가신 곳이 있다. 이 성당은 아이러니 하게도 회교도들이 관리하고 있다는데, 입구에서부터 그들이 기념품을 들고 막아선다. 예수 승천 대축일에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이 성당을 개방한다니 이교도들에게 대한 그들의 관대함을 느낄 수 있다. 성당 안에는 둥근 지붕을 한 작은 경당이 있는데, 그 안에 승천하신 후 남긴 예수님의 발자국이 있다. 크기가 보통 사람의 그것보다 약간 크다. 솔직한 심정으로 보통 인간이 주님의 승천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매우 힘들다. 따라서 이곳에서 부족한 신앙을 실감하고, 일종의 의구심과 죄스러움을 느끼며 경당을 걸어나왔다. (사도 행전 1,6-12 : 예수의 승천)

 

주님의 자녀가 되려면 열심히 기도하며 회개하라.

 

  주님 승천 성당에서 내리막길로 빙빙 돌아 내려오면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신 곳이 나온다. 이곳을 '주의 기도 성당'이라고 부른다. 하얀 건물의 성당이 있는데, 뜰에서부터 성당 안에 이르기까지 62개국 언어로 번역된 주님의 기도문 판넬들이 붙어 있다. 우리나라 말로 된 기도문은 성당 안에 있는데 아쉽게도 문이 잠겨 있어 직접 보지는 못했다. 뜰 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 평소 즐겨 기도하시던 작은 동굴이 있고 동굴 입구에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바위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르려라, 열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부지런히 기도할 것을 권유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루가 복음 11,1-13 : 주의 기도, 기도에 대한 가르침)

  이제는 올리브 산의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내려간다. 오른쪽에 예언자들의 무덤을 비롯한 공동묘지가 하얀색으로 아주 넓게 전개되어 있다. 게다가 하얀 무덤들이 대낮의 햇빛 아래 빛나고 있어 '회칠한 무덤'이라는 예수님의 표현이 적절하게 마음 속에 다가온다. 내리막길 오른 편에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며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신 '눈물 성당'이 있다. 성당의 규모는 아담하지만 모자이크 바닥과 스테인드 글래스가 잘 어우러져 있다. "네 성안에 있는 돌은 어느 하나도 제 자리에 얹혀 있지 못할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새기며 성당 앞에 나와보니 예루살렘 성이 선명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성 아래 키드론 계곡과 힌놈 계곡에는 성서 안에 기록된 여러 부족들 간의 전쟁사가 묻혀있고, 그 한쪽에 예루살렘 백성들을 먹여 살린 기욘샘이라는 우물터가 보인다. 중앙에는 황금 돔으로 된 회교 사원이 있고 이를 기준으로 유대교, 이슬람교, 아르메니아 정교, 그리스정교의 네 종교가 성안을 분리시켜 차지하고 있다. (루가 복음 19,41-44 : 예루살렘의 불행)

  갑자기 가이드의 말이 들려 돌아보았더니 성당 뜰에서 무슨 열매를 하나 들고 있다. 그것이 쥐엄나무 열매란다.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가출했던 작은 아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먹을 것이 없어 쥐엄나무로 연명했다던 그것이다. 껍질을 벗겨서 그 씨앗을 씹어봤더니 마치 딱딱한 돌이다. 어떻게 먹고살았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성서의 한 구절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루가 복음 15,11-32)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다시 걸어서 내리막길을 300미터 정도 곧장 내려가니 차들이 많이 다니는 도로와 만난다. 여기서 건물을 끼고 왼쪽으로 꺾어들면 그다지 크지 않은 성당 문이 하나 보인다. 그곳을 통과하니 쇠창살로 둘러싸인 아주 오래된 올리브나무 숲이 있다. 내가 평소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마음 속으로 되새겨보는 기도문이 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주님께 바친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기도이다. 이곳이 바로 내가 가장 와보고 싶었던 '게쎄마니 동산'이다. 숲 한쪽에 커다란 기념 성당이 있고 그 안에 당신께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던 바위가 그대로 놓여있다. 두 팔을 바위에 짚으며 그 당시 그 분의 마음을 헤아려보니 갑자기 눈물이 흐르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다. 여기서부터는 예루살렘 성으로 향하여 다시 비탈길을 숨가쁘게 올라간다. 올라가다 보니 게쎄마니 동산이 저 아래로 보인다. "무슨 동산이 저렇게 낮아?"하고 나서 자세히 보니, 키드론 골짜기 아래쪽에서 바라보면 '동산'이라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마태오 복음 26,36-46 : 게쎄마니에서의 기도)

  계속 언덕을 오르며 맞은 편 회칠한 무덤 지역을 바라보니 무덤 중 어떤 것은 반 평도 되지 않는 작은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대리석 건물로 호화롭게 꾸며진 것도 있다. 골짜기 아래 하얀 대리석 기둥으로 예쁘게 꾸며진 무덤이 있는데,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인 즈기리야의 무덤이란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길을 닦기 위해 먼저 온 요한과 그의 가족은 높이 추앙하고 있으면서도, 정작으로 죄를 구원하러 오신 하느님의 아들은 인정을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강한 그들의 선민 사상을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그들이 진정 하느님의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이방인들과의 갈등은 좀처럼 끝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성밖의 높은 언덕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존경하는 다윗 왕의 무덤이 있다. 이름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묘소이다. 이들은 사후의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왕일지라도 죽은 자의 것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다. 더구나 하느님 앞에서 어느 것도 우상화하지 않기 위해 그럴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들의 신앙이 정말 옳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윗의 무덤 바로 옆에 최후의 만찬 성당이 있다. 평범한 건물 2층 다락방을 성당으로 수수하게 꾸며 놓았는데, 열 두 사도를 데리고 만찬을 하기에 다소 넓은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제자들은 머지않아 닥칠 스승의 고난은 생각지도 못한 채 먹고 떠들고 놀았을 것이다. 게다가 누가 첫 번째 제자인가를 놓고 서로 다투고 있던 그들을 생각하며 내 자신에게도 같은 의문을 가져본다. (루가 복음 22,14-23 : 최후의 만찬)

 

8월 17일(화)

 

예수님의 고난을 함께 하다.

 

  전날 가이드의 말대로 6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호텔에 짐을 놔둔 채 7시부터 서둘러 일정을 시작했다. '예수 무덤 성당'에 걸어가서 미사를 드려야 한다. 그런데 출발부터 사소한 일로 지체된다. 가이드의 인상이 마땅치가 않다. '노처녀의 히스테리인가라'고 생각했다. 한 이십 여분 늦어 성당에 도착했다. 이미 미사를 시작하려고 수사님들이 준비를 마친 뒤였다. 우리가 들어서니 이전의 주례 신부님은 다른 곳으로 보내고, 동양인 수사 한 분이 김 신부님을 모시고 가서 제의를 입혀드린 다음 미사를 집전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아마 이 때문에 가이드가 재촉했는가보다. 바로 예수님께서 묻히시고 부활하신 그 무덤 앞에서 우리가 직접 제사를 올리는 것이다.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신부님의 얼굴도 상기되어 있다. 이윽고 파이프 올갠이 울리면서 수사님들의 그레고리안 성가로 미사가 진행된다. 물론 미사 경문이나 기도문은 우리말로 하고 있으니 그 감동이 더욱 짜릿하다. 나에게 독서를 맡겨 나아가 봉독하니 그 소리가 마이크 없이도 성당 전체에 울려 퍼진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함께 한다고 생각하니 영광스럽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미사가 끝나고 무덤 앞에서 경배를 드린 후 성당 내부를 돌아본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내려 염한 돌판,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매달려 돌아가신 곳들이 지금은 한 성당 안에 있어서 그 당시의 광경을 짐작하기란 어렵다. 단지 성서의 말씀을 통해 묵상할 뿐. 그나마 이 모든 성지를 이처럼 순례할 수 있는 것이 프란치스코 수도회 덕분이라니 성인께 머리 숙여 감사 드린다. (마태오 복음 27,32-57 :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신 예수)

  이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걸어가신 그분의 고난을 체험하기로 한다. 가이드를 따라 골목골목을 누비며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 받으심'을 묵상하는 장소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석판에 새겨진 조감도가 놓여 있는데, 깨어진 것을 이어놓은 상태로 놓여 있다. 골고타 언덕은 예수님 시대에 성밖이었는데 지금은 아랍인들의 상업지역으로 되어 있다. 왔던 길을 다시 더듬어 가며 '제9처 예수님 세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하고 나니 땀이 줄줄 흐른다. 이곳을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고 매맞아 가며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셨을 것을 생각하니 심히 죄송스럽다. 10처부터는 무덤 성당으로 돌아와 성당 앞에서 바치려고 했으나 이스라엘 경찰의 저지로 성당 안에서 바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는 이방인들의 신앙 활동을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한 복음 19,17-42 :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예수와 그 어머니)

 

들어오기는 쉬워도 나가기는 어렵다.

 

  이스라엘을 떠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섯 시간은 미리 공항에 나가 출국수속을 받아야 한다. 입국 때보다 수속이 서 너 배는 더 까다롭다.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내서 질문하고, 검색대에서 의심스러운 것이 조금만 나타나도 가방 전체를 풀어 제치게 한다. 영어는 모르는 것이 편리하다. 그래서 'name'도 모르는 무식쟁이가 되어 무사히 빠져나갔다. 다음은 이탈리아로 향한다.

 

마감의 글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천상 천하에 한 분뿐일텐데 어찌 인간은 서로 자기만의 하느님이라고 우기는가. 서로 좋자고 이해하며 살 수는 없는 건가. 인간의 아집이 낳은 종교적 갈등이 존재하는 곳, 바로 이스라엘이다. 보편적 이념으로 생각해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종교가 유대교인 것 같다. 이방인들을 전혀 무관심 속에서 대하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친절을 보이지 않는 그들을 만날 때 기분이 불쾌하다. 아무리 그들이 처한 민족적 처지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호텔 프론트에서조차 친절을 보일 수 없다면 그것은 오만과 방자함이다.
  민족과 국가를 초월해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들이 겪고 있는 민족 간의 갈등은 결코 종식되지 못할 것이다. 그 분의 가르침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닐 진데 이웃 간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무슨 평화가 오겠는가. 아마도 자기 나라에서 모든 이방인들을 몰아내야만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복은 또 보복을 낳을 뿐이다. 모든 나라와 민족이 이기심에서 벗어나 서로 대화를 통해 평화를 이룩하는 그 날까지 우리의 기도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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