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속 ‘하늘로부터 키 재기’ - 윤경재 요셉

스크랩 인쇄

윤경재 [whatayun] 쪽지 캡슐

2017-02-21 ㅣ No.110240

 

 

하늘로부터 키 재기

 

- 윤경재 요셉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9,35~37)

 

 

고요하게 흐르는 맑은 강물에 얼굴을 비춰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던가요? 잘 생겼다고 느끼셨나요? 멋지다고 생각하셨나요? 대부분 약간 어색하다고 느끼셨을 겁니다. 가끔 배우자와 함께 거울에 두 분 얼굴을 나란히 비춰보십시오. 그러면 배우자의 얼굴이 이상하게 낯설게 느끼실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늘 보던 얼굴과 약간 다르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실제로 실험해보시길 바랍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거울이나 맑은 물에 비치는 영상은 사실은 좌우가 바뀐 상이 비춰집니다. 자기 혼자 거울을 보면서 면도를 하거나 화장할 때는 미리 뇌가 그런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보정하여 인식하기 때문에 좌우가 바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거울에 비추면 내 모습은 보정이 되어 보이는데 다른 사람 얼굴이 좌우가 바뀐 상태가 그대로 눈에 전달되니 뇌가 보정하여 해석할 틈이 없기 때문에 평소 직접 얼굴을 봤던 모습과 달라서 어색해 지는 것입니다. 물론 얼마 지나면 곧 우리의 뇌가 자동으로 보정하여 어색함이 사라집니다.

 

반사된 모습은 언제나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 나라를 비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영 어색하게 들리고,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처럼 예수께서 자주 역설적으로 표현하시는 이유가 하늘의 본래 모습이 땅에서는 거꾸로 비춰지기 때문이 아닌가하고 추측합니다. 물론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겠죠.

 

예전에 민성기 요셉 신부님께서 쓰신 묵상글 하늘로부터 키 재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글은 그동안 제가 읽었던 수많은 묵상글 가운데 가장 감명 깊었던 글 중에 하나입니다.

 

민 요셉신부님께서 대학생 하계봉사 활동에 초대받아 가셨다가 마지막 날 밤에 디모테오라는 형제분과 나눈 이야기가 주제입니다. 키가 보통 사람보다 아주 작은 디모테오 형제가 함께 키를 재어보자 요청하자 키가 훨씬 큰 신부님께서는 아주 민망하셨습니다. 잠시 망설였으나 하도 강하게 조르는 바람에 등을 맞대고 키를 재었다고 합니다. 무려 33cm 차이가 났습니다.

 

그런데 디모테오는 신부님께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땅에 발을 딛고 살기에 그 기준은 땅이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땅으로부터 높이를 재는 동물, 땅으로부터 키를 재는 동물이지요.” “그런데 하늘에 계시고 하늘에서 사시는 하느님은 어디서부터 키를 재실까요?” “하늘로부터 키를 재시겠지요? 하느님께서 재는 기준은 바로 하늘이며 하느님은 하늘로부터 키 재기를 시작하시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 수사님. 그럼 다시 한 번 저랑 키를 재볼까요? 수사님이랑 저랑 누가 더 큰지요?” 하였습니다. 민 요셉신부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할 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그는 저보다 무려 33센티나 더 커 있었으니까요!”

 

맞습니다. 이 땅에서 실제로 우리는 거꾸로 되어 있으며 만일 우리가 똑바로 되려고 한다면 모든 것을 바르게 보는 눈부터 키워야 합니다. 그동안은 마치 모든 것이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혼돈의 상태가 필요합니다. 모든 고정관념을 깨어 부수는 사람이라야 출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제자 두 명이 스승 곁에서 오랫동안 함께 공부했습니다. 이젠 세상에 나가 그동안 배운 것을 써볼 때라 생각하고 스승의 곁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하직 인사를 드리는 두 제자 앞에 스승은 하얀 종이를 꺼내고 가운데에 점을 하나 찍었습니다. 그러고는 제자들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명은 점이 보인다고 대답했고, 또 다른 한 명은 흰 종이가 보인다고 대답했습니다. 스승은 흰 종이가 보인다고 대답한 제자에게는 떠나도 된다고 허락했지만, 점이 보인다고 대답한 제자에게는 공부를 더 할 것을 명령하며 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공부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세상을 넓게 보는 눈을 갖게하는 훈련이란다.”

 

예전에 학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도덕적인 면에 중점을 두고 해석했기 때문에 과도한 부담을 주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요구를 온전히 따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불안해하기도 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 말씀은 우리와 상관 없는 세계를 표현하신 것이니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려보내자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자신에게 어떤 깊은 의미를 지니는지 숙고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주시려고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수수께끼 같은 예수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한계와 맞닥뜨립니다. 그 한계를 회피하지 않고 마주쳐 본다면, 예수께서는 그 한계를 통해 우리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차원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신비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의 신비도 깨달을 수 있게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과연 주님의 관점이 무엇일까하고 숙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하여  하늘로부터 키 재기와 같은 비범한 착상을 통해 하늘 나라를 엿보는 기회를 깨닫게 해줍니다. 영으로 가난하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632 8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