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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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게시판

Re: [성가대원 필독] 게시글 5765의 답글... <<국악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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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순태 [sunsoh] 쪽지 캡슐

2004-08-16 ㅣ No.5767

+ 찬미 예수님!

 

강수근 신부님께서 지난 8월 8일자로 이곳 성가 게시판에 주신 "국악성가를 ... " 하는 제목의 글을 세 번째(?)로 읽고는, 부족한 저이지만 답변 글을 일찍 준비하였습니다만, 

 

(i) 이유야 어찌되었든 간에 사제께서 직접 올려 주신 글이고,

 

(ii) 국악미사곡을 직접 작곡하시는 국내의 몇 분 안되는 작곡가이시고, 또 

 

(iii) 교황청립 무지카 사크라 대학 입학을 위하여 지금 준비 중이라는 말씀도 주셔서,

 

모처럼 주신 글에 대한 너무 직접적인 답변을 드리는 것은 결례일 수도 있다 싶어, 주신 글의 게시일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날짜(8월15일)에, 아래의 A. 에 있는 내용을 생략한 후에 조금 다듬은 것을 성모님께 바치는

 

"장미향에 부치는 글"(여기를 클릭하여 꼭 읽어 보도록 하세요)

 

이라는 제목으로 게시를 하였습니다만, 이 글을 읽으시고는 강신부님께서 "전례음악 토착화에 대한 생각1"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추가 답변을 요청하시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전례음악 토착화"에 대한 여러 분들의 견해를 강신부님께서 앞으로의 학업에도 참고하실 의향이 있으신 것도 같고 하여, 부득이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전례음악 토착화에 대한 생각1"이라는 글에서 주신 추가 질문에 대한 답변 대부분은, 일전에 제가 이곳에 올린 생활성가 1 - 7 편의 저의 졸글에 있음을 우선 말씀을 드리면서, 이 글을 준비하였습니다. 

 

비록 노력을 많이 하였으나 드리는 말씀 중에 그래도 있을 수 있는 부족한 것 모두는 저의 것이오니,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차례
A.
전번의 졸글에서 생략한 부분 모음
B. 전례음악 토착화에 대한 생각1"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요청하신 데 대한 항목별 답변


 

A. 전번의 졸글에서 생략한 부분 모음

[주: 지난 번에 생활성가에 대하여 몇 편의 글을 게시할 때와 마찬가지로, 어느 분(사제 포함)과도 사전 혹은 사후 상의한 바 없이 이 글을 준비하여 게시하오니, 부질없는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주: 이미 8월 11일 오전에 이르러 거의 작성을 완료한 글입니다만 다른 분들의 고견을 듣고 싶어 게시를 지금까지 미루었습니다.)]


 

II. 국악성가와 관련하여 예상되는 문제점들

II-1. 예상 문제점들
걱정스러워 드리는 말씀이오니, 부디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문제점 1. 예를 들어, 강수근 신부님의 "국악미사곡"이 국악의 여러 장르 중 어디에 속하는지?
판소리? 혹은 국내 어느 지역의 정서를 주로 담고 있는 곡인지?

: 강수근 신부님의 "국악미사의 이해" 라는 제목의 글을 읽고도 이러한 점들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음.

그러나 다음의 자료에 의하면, "전례음악의 토착화"와 관련하여 일정 수준 이상의 부정적인 시각이 약 20년 전부터 국내 가톨릭 음악계에 있어 왔음을 알 수 있음.

자료 1:
http://www.cateforum.com/adaptio/koincult-31.html  

자료 2:
http://www.cateforum.com/adaptio/koincult.html  

자료 3: 임영창, "사목" 지(1985년 7월호) 중 "뿌리가 깊은 나무는" 중에서 p. 28 - 29.

문제점 2. 우리의 과거 전통음악 양식으로만 무조건 되돌아 가는 것이 과연 "전례음악의 토착화"인지?

참고: 위의 자료들에 의하면, 성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에 이것은 아니라고 직.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음.

문제점 3. 지엽적인 문제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한 국악미사곡의 작곡자 스스로 자신의 곡을 "국악 + 미사"라는 널리 알려진 두 일반명사의 복합어로 자의적으로 "정의"하여 고유명사화 하는 것은, 향후 국악미사곡 작곡분야 내.외에서 강한 반발을 살 우려가 있음.

 

참고: 강수근 신부님의 글 "국악미사의 이해" ( http://pds.catholic.or.kr/attbox/bbs/include/download.asp?maingroup=1&type=gnattboard&gubun=100&seq=6&id=943&fno=down1&filenm=%B1%B9+%BE%C7%2Ehwp&strmember=pmkang  )는 다음의 "정의"로 시작합니다. 직접 들어가셔서 읽어 보도록 하십시요.

-----------------
1. 정의

「국악미사」란 예수고난회 강수근 신부가 1987년에 한국전통음악(국악)의 어법에 따라 작곡한 미사곡을 말한다.

............

테이프와 악보의 보급으로 「국악미사」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여, 전국의 많은 수도원들, 신학교들, 본당들에서 불리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전파 과정에서 다소 용어의 혼동이 생기게 되었다. 즉 「국악미사」라는 용어가 이 ‘미사곡’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 미사곡을 사용하여 거행되는 ‘미사’를 지칭하게도 된 것이다. 이러한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앞으로는 이 미사곡을 지칭 할 때는 ‘국악미사곡’으로, 그리고 한국적 미사곡들이나 성가곡들을 사용하여 거행되는 ‘미사’를 지칭할 때는 「국악미사」로 용어를 구분지어 사용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


: 바로 이러한 점들이 국내에서 "전례음악의 토착화"와 관련된 일반적이고 전반적인 어려움인 듯..


II-2. 심각한 견해차 몇 개..

다음의 인용 부분들은 며칠 전에 이곳 게시판에 의견 교환을 요청하신 강수근 신부님께서 주신 말씀들 중에 견해차가 심하게 있는 부분을 발췌하였습니다. 다른 평신자 교우님들께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아무래도 사제께서 주신 글이고, 또 곰곰히 생각해 보면 글쓴이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부분이라, 처음에 읽고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그러나 성교회 문헌의 우리말 번역과 관련한 번역오류의 문제를 조기에 바로잡는데에 조금은 도움이 될 것도 같아, 고민 끝에 말씀을 드리게 되었으니, 부디 강수근 신부님께서 오직 주님 사랑하는 한 마음으로 저의 심정을 헤아려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가. 더욱이 토착화에 관해서 언급한 (전례헌장) 119항에서는 이 점이 더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좀 길긴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체를 인용해 보지요. “어떤 지방, 특히 포교 지방의 국민들은, 그들의 종교생활이나 또는 사회생활에 있어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고유한 음악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종교적 감정을 형성하기 위해서나, 그들의 특성을 전례에 적응시키기 위해서, 제39조 및 제40조의 정신을 따라, 그들의 음악에 정당한 평가와 합당한 자리를 부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에게 음악적 소양을 습득케 하는 데 있어서는, 그들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그 국민의 전통적 음악을 학교에서나 거룩한 행사에서 장려할 수 있게 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전례 119)
주: 영문 추가 삽입. 119. In certain parts of the world, especially mission lands, there are peoples who have their own musical traditions, and these play a great part in their religious and social life. For this reason due importance is to be attached to their music, and a suitable place is to be given to it, not only in forming their attitude toward religion, but also in adapting worship to their native genius, as indicated in Art. 39 and 40.
그런데 한국에서는 국악을 전례 안에서 사용하면 안된다니요?

<=== 이 부분은 선교 지역의 주민들, 예를 들면 그리스트교가 전혀 전파된 적이 없는, 않은, 혹은 그리스트교를 전혀 모르는 (그리고 대다수 문맹일 수도 있는) 지역의 사람들에게 선교를 하여야 할 경우, 즉 "선교 극한상황의 경우", 를 특히 고려하여 언급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200여년 이상의 천주교 역사를 가진 또한 이미 경제적으로 절대빈곤 선상에 있지 아니한 우리나라에서의 오늘의 전례음악 토착화와 관련하여서는 별로 해당사항이 없으며, 특히 토착화를 정당화 시키기 위하여 이 구절에 대한 지나친 일반론적인 확대해석의 문제점에 대하여는 미국의 adoremus 홈페이지에 이미 게시된 게시글이 있습니다. 아래의 다음의 글(영문)을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adoremus.org/1003Music.html  

[
위 사이트에서 해당 부부을 발췌하였습니다.
There is a passage in Sacrosanctum Concilium that has been widely misinterpreted. The Council Fathers wrote:

in mission lands there are people who have their own musical tradition, and this plays a great part in their religious and social life. For this reason their music should be held in proper esteem and a suitable place is to be given to it. (119)

The obvious intent here was to permit "mission lands" -- that hadn't even plumbing or electricity -- to use what was available to them. And "a suitable place" doesn't mean to throw out the universal tradition! America is hardly such a mission land. This was not a wholesale license to use every possible style of music. Indeed, the intent was quite the contrary. In the very next paragraph, the document tells of the important place of the pipe organ in worship, a goal to be reached by everyone.

Pope Saint Pius X had something to say about this in 1903. In speaking of adding "native music" elements, he wrote, "still these forms must be subordinated in such a manner to the general characteristics of sacred music that nobody of any nation may receive an impression other than good [here meaning, sacred in nature] on hearing them" (Tra le Sollecitudini 2). They must be subordinated to the general characteristics of sacred music. This is a powerful mandate!
]


나. 61. [고유음악과 성음악의 연결] 성음악의 올바른 적용은 고유한 음악의 전통이 있는 지역, 특히 전교지방에서는 전문가의 각별한 준비를 요구한다. 그것은 거룩한 것에 대한 감각을 적절하고 옳은 방법으로 그 민족의 정신과 전통과 고유한 표현양식과 지혜롭게 연결되고 일치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명과 일에 종사하는 이들은 전례와 교회의 음악 전통, 또한 그들이 일하는 각 민족의 언어와 민요, 그리고 특수한 표현 양식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주: 영문 추가 삽입. 61. Adapting sacred music for those regions which possess a musical tradition of their own, especially mission areas,[42] will require a very specialized preparation by the experts. It will be a question in fact of how to harmonize the sense of the sacred with the spirit, traditions and characteristic expressions proper to each of these peoples. Those who work in this field should have a sufficient knowledge both of the liturgy and musical tradition of the Church, and of the language, popular songs and other characteristic expressions of the people for whose benefit they are working.

<=== "선교 극한상황"을 표현하는 말인 "mission lands"와 "전례음악의 토착화"를 동일시하고 계시기에, 인용하고 계신 이 부분의 내용 그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전례음악의 토착화"를 연구할 때에 참고로 하는 것은 좋으나 "전례음악 토착화"의 당위성을 설명할 때에 이 자료에 전적으로 기대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의 가 항에 드린 설명을 참고하세요.


다. 오늘날 국악이 제 자리를 잃게 된 이유는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근대사 (특히 36년간의 일제 강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 잘못된 역사를 계속 고수해야 합니까? 이제는 그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할 때가 아닌지요. 특히 교회 안에서 예언자적인 소명을 가지고 국악이 제 자리를 잡아가도록 한다면 우리는 한국 사회 전체에 큰 문화적 공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소망은 아름다운 우리 성가들이 많이 만들어져 전례 안에서 불리워지는 것을 보는 일입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남의 나라 성가를 번역해서 부를 것입니까? 굳이 우리가 부르지 않아도 그 성가들은 제 나라들에서 잘 불리워질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락으로 주님을 찬미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200년을 다 채우고 300년대로 향해 나아가고 있는 한국교회가 아직도 자기 전례음악 하나 책임지지 못하고, 늘 이 나라 저 나라 것을 꾸어 쓰고 있다면 참 초라한 노릇이 아닙니까? 국악은 하느님께서 우리민족에게 베풀어주신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는 그 가락으로도 당신을 찬미해주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등한히 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는 일이 될 것이고, 나중에 그 책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쯤으로 국악이 전례음악에 도입되어야 하는 당위성이 설명되었다고 보고, 이제는 그레고리오 성가와 다성음악이 현재 교회 안에서 가지는 역할을 살펴볼까 합니다.

<=== 국내 성교회의 음악의 발전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런 류의 애국적 혹은 국수주의적 감정을 담은 논조의 전개는 전혀 의미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상당수의 분들로부터 이런 저런 다른 이유로 다양한 형태의 반발감을 불러 일으킬 소지가 다분히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국내에 잘 알려진 다음의 국악사이트에 의하면 판소리(18세기) 및 산조(19세기)의 역사가 매우 짧다는 것을 알 수 있더군요.
http://gugak.ivyro.net/guga_k/leeron.html  

사족입니다만, 대학원 졸업 후인 지난 1981년 - 1983년 약 3년에 걸쳐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문집인 "여유당전서" 중 "주역사전" (역경)을 매주 토요일, 일요일 (약 6 - 7 시간)을 들여 서울 명륜동의 한 사설 서당에서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서구 교육만을 받은 자로서 "동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몸부림(?) 이었는데 (당연히 그 이후 외국에서의 삶에 많은 도움이 되었죠..^^), 당시에 함께 공부한 분들의 과반수 이상이 현재 동양철학, 동양문학, 동양사 등의 분야에서 현재 대학교수로 재직 중이며, 또 당시에 한의학을 전공한 분과 거문고(가야금(?))를 전공한 분도 계셨는데, 그 당시 구성원 대다수가 현직 대학교수, 석.박사 과정의 대학원생 혹은 대학원과정을 졸업한 분들이었습니다만, 그 때 공부를 하면서 "동양의 예와 악"을 제대로 공부를 하려면 "주역에 담긴 음양의 이치" (와 "오행") 즉 - "동양철학" - 을 모르고는 안된다고 하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리고, 1983년이었던가? 이화여대에 국악연주홀을 완공한 후에 처음 개관하여 개관 기념 국악연주회가 있었을 때 매우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여 참으로 좋은 곡들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그 중의 아주 좋았던 곡 하나가 "영산회상(?)"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라. 앞서 밝힌 대로 교회의 이 전통 성음악들은 라틴어 전례 안에서 그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이미 라틴어 전례는 옛 전례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세계 각국의 전례는 모두 자기 나라 말로 진행됩니다. 한국에서도 물론 한국어 전례가 상식화되어 있습니다. 만일 지금 다시 모든 미사를 라틴어로 지내야 한다고 한다면 아무도 그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어 전례 안에서 오직 성가만은 라틴 성가를 그것도 아주 옛날의 성가였던 그레고리오 성가와 다성음악을 도입해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유럽 교회라면 이것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유럽의 언어들은 대개 라틴어에서 파생되어 나왔고, 또 대개 학교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본적으로 라틴어를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라틴어가 그리 생소하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가 한국어 고어를 대하는 것과 흡사하지요. 그래서 거기서는 라틴어 성가를 부르면 대강 그 뜻을 이해합니다. 이태리에서는 특히 그러하지요.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라틴어 성가를 부를 경우, 대부분의 신자들이 전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것을 전례 안에서 부를 경우, 말과 결부된 거룩한 노래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지요. 즉 뜻도 모른 채 그저 선율만을 감상하는 음악 감상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면으로 전례원칙에 위배되는 상황입니다. 물론 이 성가들을 이해하고 거기서 영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례 안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상황이고, 일반 본당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전례 안에서 이 성가들을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오히려 전례원칙을 거스르게 되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 지금 현실과 동떨어진 탁상공론적 논리전개를 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우선 (유럽의 대다수 나라에서도 대동소이일 것으로 추측됩니다만) 요즈음 미국의 고등학교의 경우에 있어서 (참고: 미국의 대부분의 중학교에서는 라틴어를 가르치지 않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말씀을 조금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대학을 진학하려고 하는 고등학생들 중에서, 특히 우리로 치면 문과대학을 지망하려는 고등학생들 중에서, 라틴어 과목을 (예를 들어 미국 Maryland 주의 어떤 County의 경우에 있어서는, Spanish, French, German, Italian, Russian, Latin 중에서 한 (두) 과목을 선택하여 길게는 2년 동안) 배우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잘 알다시피 성교회에서 사용하는 라틴어는 "교회 라틴어"라고 특별히 구별하여 부르는 모양인데 이 라틴어를 고등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쳐 주는 것은 또한 아닌 줄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일반 평신도들 중에서, 별도로 학습을 하지 않는 이상, 교회 라틴어를 제대로 알고 있는 가톨릭 교우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말씀드리고 있는 내용 - 즉 위에 구체적으로 예시한 바와 같이 성음악의 가사로 사용되는 대부분의 라틴어 미사 통상문들은 매우 짧고 그 내용 또한 간결하기에 누구라도 쉽게 파악할 수 있음 -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자국어로 미사를 진행하는 요즈음에 있어서도, 말씀하신 바와 같은 자기모순이 전혀 아니므로, 우리는 다음의 글을 요즈음에도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adoremus.org/1203PiusX.html  


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리오 성가와 다성음악만을 고집하는 이들은 성음악의 훈령을 언급하며, 전례음악의 규정과 원칙이 그러하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그러합니다. 현행규정에서는 그레고리오 성가와 다성음악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라틴전례 안에서 라는 조건이 붙어 있는 것이고, 모국어 전례 안에서는 그 가능성을 열어놓았을 뿐 의무적으로 사용해야한다는 규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직접 인용해보지요. “영혼의 사목자들은 지방의 형편 및 신자들의 사목적 유익, 그리고 각 언어의 성질을 고려해서 과거 수세기 동안 라틴어로 쓰여진 가사를 위해서 작곡된 성음악의 유산 일부를 라틴어로 집전하는 전례의식 외에 또한 모국어로 집전하는 의식에도 사용할 수 있다.”(성음악 훈령 51) 이 규정이 어떻게 전례 안에서 그레고리오 성가와 다성음악을 반드시 불러야 한다로 둔갑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 같은 문헌들을 읽고 있습니다만, 역시 견해차가 매우 심한 부분입니다. 특히 지역 교회에서는 매우 간결하며 몇 개 되지도 않은 "라틴어 미사 통상문 (전문 혹은 일부)"을 열심신자들에게 평소에 잘 교육시킬 것을 성교회 문헌 (아래의 A-36, B-47, B-48 및 B-51 등)에 비록 간접적이나마 구체적으로 명기하고 있기에, 견해차가 매우 심한 부분입니다. 또한 매우 유감스럽게도 인용하신 부분은 (아래의 B-51의 영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역이 된 것으로 보이며, 역시 이 글에서 말씀드리고 있는 내용 전반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교회 문헌의 영문본을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바. 이상의 이유로 그레고리오 성가나 다성음악은 교회의 중요한 음악유산이긴 하지만 한국교회의 현실에서는 그것이 주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다만 전통을 배우는 한 부분으로서 고유한 역할을 지닐 수는 있겠지요. 예전에 교회에서 이런 음악들을 불렀으므로 우리도 특별한 경우에 이런 음악을 부르면 좋다는 정도의 교육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 음악만을 고집하여 모든 전례음악을 이런 식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좀 무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 아주 심한 견해차가 있는 부분입니다. 어떤 특정 지역 및 어떤 특정 시대 혹은 어떤 특정 상황과 관련이 없는 완전무결하고 영원불변의 보편성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가톨릭 성교회의 진리 체계이기에, 또 일찌기 성 그레고리오 교황님(서기 590-604년 제위)께서는 지중해 연안의 여러 지역교회가 전통과 풍습의 차이로 인하여 통일성을 잃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여러 지역 교회에서 미사 중에 사용하고 있던 음악들을 수집하여 검토한 후에 선정작업을 거쳐 그레고리오 성가를 집대성한 후에 이들의 사용을 지시함으로써 그 이후 약 천 년 이상 동안 가톨릭 성교회가, 예수님께서 세우신 단 하나의 교회 그리고 단 하나 뿐이어야만 하는 교회로 유지해 나가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신 분인 줄 우리는 잘 알고 있기에, 성교회의 미사 전례예식을 실질적으로 떠 받치고 있는 큰 기둥인 라틴어 기도문을 가사로 하고 있는 그레고리오 성가나 다성음악은, 이 세상에 성교회가 존재하는 한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고 성교회의 버팀목으로서 꾸준히 발전해 나갈 것을 확신합니다. 물론, 세월이 가면서 라틴어 가사가 각 지역 언어로 바뀌고 하는 경우는 발생하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라틴어 기도문 (미사 통상문 포함)"을 가사로 하는 곡들로서 전례예식과 관련하여 매우 우수한 곡들이 우선적으로 지구상 성교회의 전 지역에 고루 살아 남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성교회 문헌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듯이 합당한 전례음악으로서 어느 누구도 그레고리오 성가나 다성음악만을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분들의 견해에 대하여 지나친 왜곡을 시도 하시는 부분인데, 음.. 대단히 죄송스런 말씀이나, 가톨릭 성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모르는 아주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힌 개신교 목사님들이 펼치는 듯한 성급한 논조로 보입니다. 즉 그레고리오 성가나 다성음악의 전통이 사라진 가톨릭 "성"교회는 "성" 글자의 의미를 잃어 버린, 즉 이미 "개신교 교회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지역의 교회"라고 감히 말하여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이 글의 전반적인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세실리아 성음악 운동" (아래의 IV. 추가 부록의 내용 및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adoremus.org/1203PiusX.html  

[
위 사이트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But it must, at the same time, be universal in the sense that while every nation is permitted to admit into its ecclesiastical compositions those special forms which may be said to constitute its native music, still these forms must be subordinated in such a manner to the general characteristics of sacred music that nobody of any nation may receive an impression other than good on hearing them.
]


II-3. 강수근 신부님께서 주신 게시글의 내용 중에서 전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은 단 하나.. 그러나 주신 게시글의 핵심내용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국 전례음악의 먼 미래를 생각할 때 현실적으로 무엇이 가장 시급한 일이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전례음악의 레파토리를 늘리는 일이 가장 절실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실제로 레파토리가 너무 부족해서 개신교회의 성가들을 무분별하게 전례에 도입하는 것이 오늘의 성가대 현실 아닌지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양질의 전례성가들이 많이 만들어져 보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이 새로운 곡들이 한국음악적 요소를 담고 있으면 좋겠구요. 즉, 90% 서양음악적인 요소에 10% 국악적인 요소를 가미한 곡부터, 10% 서양음악적인 요소에 90% 국악적인 요소를 지닌 곡까지 다양한 모습의 우리 성가들이 많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진작하기 위한 의식 개혁과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 위에 말씀드린 심각한 견해차를 보이는 부분들은 (매우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겉으로는 그럴듯 해 보이나 사실은 그 내용 및 전개 방식에 있어 심각한 하자가 있는, 형식은 논리적이나, 사실은 감정에 많이 치우쳐져 있어, 지금 결론적으로 주시는 이 말씀을 뒷받침하거나 정당화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울 주지 않기에, 그냥 이 말씀만 해 주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매우 큽니다. 사실 성음악과 관련된 성교회 문헌 어디에도 견해를 달리하는 분들 간에 다투는 자료로 적극 활용하라는 말씀은 없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이 대신에, 서로가 협조하여 성교회의 성음악 발전에 기여할 것을 명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성음학 연수 시에 강의를 해 주신 분들 어느 누구도 그러한 말씀을 하실 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마도 개인적인 피해의식에 젖은 분의 귀에 좋지 않게 들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족일 수도 있겠으나, 우리 가곡들 중에서 김소월 시인의 작품을 가사로 한 곡들을 부르는 것을 매우 좋아하고 또 강수근 신부님께서 작곡하신 국악미사곡을 1989년 이후 본당 성가대원으로서 여러 번 불러 본 적이 있는 저로서는, 기본적으로 강수근 신부님께서 이번에 주신 글에서 하고 계시는 말씀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어떤 신자님께서 보낸 매우 꾸불어진 내용 혹은 개인적인 느낌을 담은 전자 메일 한 통 때문에, 국내 국악 미사곡 분야의 대표적 작곡가이신 강수근 신부님께서 직접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언급을 하고 나서는 것은, 국악 쟝르에 속하는 좋은 곡들이 향후 국내 가톨릭 성교회의 합당한 전례음악으로 인정받고 자리잡는 데에 오히려 그 입지를 좁히는 부정적인 결과가 오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앞습니다.

다음의 게시글 중 "5-4. 국악 미사곡 창작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자" 및 "6. 결언" 에서도 이미 간략하게 언급하였지만, (국내의 특정 지역에 국한된 정서를 초월한) 양질의 국악미사곡들을 많이 작곡하는 것은 우리의 전례음악을 보다 더 다양하게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임을 확신합니다.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gospelbbs/-/a/5574/  

특히 1959년생(?)인 강수근 신부님의 이번의 로마 유학이 이러한 일을 추진해 나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면서, 아무쪼록 수 년 내에 좋은 결실이 있으시길 바랄뿐입니다. (참고: 저는 1956년생입니다).

사족입니다만,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김종국 신부님께서 지도신부로 계신 "가톨릭 우리소리 관현악단"의 홈페이지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http://my.dreamwiz.com/taegum/  <=== "가톨릭 우리소리 관현악단"의 과거 홈페이지 주소임.

과거에 국악미사에 관한 문의사항이 들어오면 위 홈페이지 주소를 알려 드리면서 안내도 해 드리고 하였는데.., 이제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으며 혹시 이 글을 읽으신 교우님들 중에서 자세한 사정을 아시는 분께서는 전자메일로 알려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B. 전례음악 토착화에 대한 생각1"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요청하신 데 대한 항목별 답변

 

전례음악 토착화에 대한 생각1

 

+ 찬미 예수님! 

 

뜻하지 않은 제 글에 많은 분들이 당혹해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이번 기회에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계속 나누는 것이 미래 한국 성음악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먼저 소중한 의견을 나누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우선 밝혀두고 싶은 것은 자칫 저를 오직 국악만 알고 그것만을 고수하려는 외골수적인 국악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은 거두셔도 좋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교회 전통음악을 사랑하고 거기서 많은 영신적 유익을 얻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성가를 듣고 자란 사람이고, 청년시절 성가대 지휘자였으며, 미국에 있을 때는 뉴욕 퀸즈 성당의 지휘자를 맡기도 했었습니다. 아울러 전례에 대한 강의를 광주 성 음악원에서 하기도 했고요. 즉 전례나 전례음악에 대하여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잘 숙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문적인 공부도 했고요. 성음악에 대해 음악적인 해석도 남들하는 만큼은 할 줄 압니다. 그러니 저를 아주 성음악에 무식한 국악주의자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정서를 바탕에 둔 선율을 담은 전례음악곡을 제대로 작곡하시기 위하여 4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교황청립 무지카 사크라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신 신부님께 참으로 감사해 하고 있었습니다. 진실로 사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 알고 있으며, 국내 교회음악에 국악 장르를 제대로 마련해 주실 것을 이 자리를 빌어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

 

사실 저는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까지 국악을 전공한 전문연주자였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에 입회하면서 음악을 놓았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따른다는 생각에서였고, 거기에는 제 인생의 가장 소중한 부분 중의 하나였던 음악도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국악미사곡을 작곡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수련장 신부님의 권고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 미사곡이 그렇게 놀라운 반응을 보일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강의 요청이 있었지만 학생신분이던 저는 다시 수도생활에 정진하여야 했고, 서품을 받은 이후에는 광주 명상의 집에서 피정지도를 해야 했습니다. 이 기간에 다달이 국악성가를 배우고 싶다는 교우들의 요청으로 국악성가 배움터를 시작한 것이 제 첫 번째 성음악 활동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필요에 따라 이런저런 곡들을 한 두곡씩 써 나가기 시작하면서 국악성가의 절대부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4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다시 성음악을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되면서 무엇이 제 소명인가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한국 성음악 토착화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 바로 제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임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1998년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다시 광주에서 원장 일과 피정지도 일을 하게 되었고, 곁붙여 국악성가 한소리 합창단이라는 교구차원의 성가대 지휘를 맡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제 소명을 좀 더 뚜렷이 인식하게 되었고, 이 소명을 이루려면 교회전통음악을 좀 더 심도 있게 공부하여야겠기에 수도회 장상과 형제들에게 청을 넣어 아주 어렵게 작년에 다시 공부를 하러 로마에 오게 된 것입니다. 

 

<=== 바로 이런 "소명의식"은 사제가 아닌 평신도는 제대로 가질 수도 또 해 낼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의 글과는 달리, 특히 20대 시절의 그 순수함으로 가득한 국악미사곡 작곡가 강신부님의 정직한 자세를 깊이 존경하오며, 앞으로 국내 성교회의 전례음악 토착화에 강수근 신부님께서 많은 기여를 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저에 대한 소개는 이쯤 해두고 우선 여러 반응 중에서 특별히 학구적인 의견을 제시하신 소순태님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고, 거기에 대한 몇 가지 의견을 첨부하고자 합니다.  

 

1. 라틴어 미사경문의 사용과 교육에 대하여 : 원칙적으로는 찬성합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사용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그것은 좀 무리지 싶습니다. 사도신경에 대해서는 노래로 바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시간 안에 주일 미사를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사제들이나 신자들 의식 안에 굳게 자리 잡고 있어 시간적인 제약에 쫒기기 때문이지요. 이 점은 앞으로 함께 풀어나가야 할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는 제시하신 다른 전례문 보다 더 상위에 속하는 일급성가로서 우선적으로 노래해야 하는 것입니다. 

 

<=== 성교회의 문헌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평소에 성가대원, 전례봉사자 및 열심신자님들께서는 마땅히 몇 개 되지도 않는 라틴어 미사 통상문을 알고 있도록 잘 교육을 시켜야 함을 지적하였을 뿐, 미사 중에 라틴어 기도문의 일상적인 사용을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올린 글을 다시 차근 차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신경을 노래로 바치지 못하는 사정은 우리나라에서 만의 문제는 아닐 듯 싶어, 현실을 인정하는 입장입니다만, 그러나, 특별한 날에 드리는 "성음악 미사 봉헌"에서는, (어차피 시간이 조금 더 들어가게 되므로, 한 몇 분 정도의 시간이 더 들어가게 되는), 신경을 노래로 바치는 것을 미사 집전 사제께서 허락해 주실 수도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에 관하여서는 다른 교우님께서 일전에 언급하신 적이 있는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에 대한 말씀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말씀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2. “생활성가”나 “국악성가” 라는 용어에 대하여 : 이것은 직접적으로 용어사용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것이기에 여기 그 부분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비록 (작곡된 곡의 장르와는 무관하게) 용도가 전례용으로 작곡한 곡이라 하더라도 성교회의 미사전례에 적합한 "성"음악으로 인정을 받기 위하여서는 성교회의 교의가 담긴 ""성"음악의 정의"를 공히 만족하여야 함. 그러므로, "생활성가"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국악성가"라는 작위적인 표현의 무분별한 사용은 되도록 삼가는 것이 바람직 할 것임. 제가 이 부분을 몇 번 거듭해서 읽어 보았지만 말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겠군요. 다시 한번 무슨 요지의 말씀인지를 자세히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냥 제 입장에서 설명을 드린다면, 그레고리오 성가나 다성음악은 왜 그렇게 부르지요? 그리고 그 명칭은 무엇을 상기시키나요? 성가에 이름이 붙는 것은 그 특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 아닌가요? 그래서 이 명칭들에는 하자가 없다는 생각인데요. 혹시 다른 좋은 이름이 있으면 대안을 제시해 주시지요. 

 

<=== 이 부분은 일전에 "생활성가"라는 용어의 작위적인 면에 대하여 언급할 때에, 우려되는 바가 있어 충분히 말씀을 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생활성가"라고 불리는 실용음악들과 꼭 같은 경우는 아니겠으나, 단순히 "국악성가"라는 명칭을 듣고는 대다수의 평신자들의 경우에 있어 거의 습관적으로 한자 자구해석을 하여, 국악성가는 모두 "성음악(Sacred Music)"인 줄로 착각을 할 수도 있어, 그러한 언급을 하였던 것입니다. 

 

Gregorian Chant(그레고리오 성가)로 분류된 성교회의 전통적인 전례음악들은 이미 최고의 성음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특별한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어떤 분께서 교회선법에 따라 "그레고리오 성가 영역"에 속하는 곡을 나름대로 잘 작곡하였다 하더라도, "교황님께서 친히 정의해 주신 성(Sacred)음악"의 보편적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작곡가 본인이나 다른 분들이 그 곡을 두고서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마구 부르는 것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다성음악(Polyphony)에 사용된 "성" 글자는 "성(Sacred)"라는 뜻이 아닌 줄로 알고 있습니다. 

 

비신자 혹은 개신교 신자와 마찬가지로, 국내 대다수의 가톨릭 교우님들께서도 한자 자구 해석 끝에, "성가"를 "성스러운 노래" 또 "성당"을 "성스러운 장소" 정도로 "성" 글자의 의미를 이해하곤 합니다만, 사실은 이 "성(Sacred)"라는 단어에는 교황님께서 친히 내려 주신 성교회의 교의가 담긴 정의가 있더군요. 이에 관하여 제가 찾아서 올린 다음의 게시글들을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gospelbbs/-/a/5552/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gospelbbs/-/a/5574/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gospelbbs/-/a/5576/

      

3. 영어 번역본 대조에 대하여 : 아주 좋은 착상을 하셨네요. 그런데 원문 대조를 하시려면 라틴어본을 제시하셔야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원본이거든요. 그러니까 영문본이 더 정확한지 한글본이 더 정확한지는 원문인 라틴어본 대조를 통해서 밝혀야 합니다. 아무튼 여기서의 전제는 영어본은 정확하고 한국본은 오역이 많다는 것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르겠네요. 저 역시 라틴어본을 보질 않아서...  

 

<=== 아주 잘 지적하셨습니다. 교황청 홈페이지에 가 보시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만, 제가 참고할 것으로 권해 드린 성교회의 문헌 4개의 라틴어 원본은 교황청 홈페이지에 없고, 대신에 교황청 홈페이지에서 각 나라 말로 번역한 문헌을 우리가 접할 수 있는데 (단 "성음악 훈령"이라고 불리는 영문본 자료는 교황청 홈페이지에도 없는 듯..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gospelbbs/-/a/5671/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문헌들에 대하여 왜 라틴어 원문이 교황청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는 저도 모르고 있으니, 더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교황청으로 직접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교황청에서 우리말로 번역한 문헌을 교황청 홈페이지에 올려 주지 않으니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며, 교황청 홈페이지에 올려진 성교회 문헌의 영문본들은 교황청에서 올린 자료이기에, 우리말로 번역된 해당 문헌 보다는 그 정확성에 있어 훨씬 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http://www.vatican.va/holy_father/pius_x/motu_proprio/index.htm 에 접속하여 Tra le sollecitudini (November 22, 1903) 문헌의 번역본들로의 링크설정을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vatican.va/holy_father/pius_xii/encyclicals/index.htm  에 접속하여 Musicae Sacrae (December 25, 1955) 문헌의 번역본들로의 링크설정을 꼭 참고하기시 바랍니다. 

 

http://www.vatican.va/archive/hist_councils/ii_vatican_council/index.htm  에 접속하여 SACROSANCTUM CONCILIUM 문헌의 번역본들로의 링크 설정을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위의 사이트에 접속하시면 해당 라틴어 문헌이 그곳에 없음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음.. 이러한 번역오류와 관련된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우리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에는, 예를 들자면, "비용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모두 지불하겠으니, 교황청측에서 성교회 문헌의 공포 시에 한글 번역본을 교황청측에서 직접 마련하여 발표"해 주도록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유관 부서에서 교황청측 담당 부서에 정식으로 요청하는 방안도 있겠지요.

 

8월 15일자로 올린 글에서, 번역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에 대하여 제가 우리말 번역을 직접 한 것을 모두 읽어 볼 수 있도록 올려 드렸었는데, 같은 부분에 대한 강수근 신부님의 우리말 번역은 어떠하였는지요? 강수근 신부님께서 (교황청 홈페이지에서 제공하고 있는) 영문본 성교회 문헌을 신뢰하지 않으시려는 듯한 말씀은 저로서는 상당히 납득하기 힘듭니다.

 

어쨌든 제가 관심 있는 부분은 토착화에 관해 피력하신 부분인데요, 그 근거로 제시하신 글을 읽어 보았지요. 이 글은 미국의 Musicians in Catholic Worship 이라는 잡지에 Dr. Carroll 이란 분이 게제한 세편의 연재글 중 마지막 글이더군요. 제목은 “Bells and Whistles, Guitars and Tambourines” 이구요. 이에 앞선 두 편의 글에서는 미국 전례 안에서 솔리스트들과 오르간 연주자들이 사라지는데 대한 안타까움의 글을 썼구요. 이 글들의 요지는 미국 교회 안에서 우리와는 정 반대로 토착화의 현상이 일반화되어 교회전통음악이 사라져가는 역현상이 심화되므로 이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그리고 잘못된 방식의 토착화에 대해 비판하는 취지의 글이라 생각됩니다. 그 근거로 박사는 토착화의 근거가 되는 전례헌장 119항을 제시하면서 여기 제시된 "mission lands" (한국어본에서는 포교지방으로 번역)는 미국을 말함이 아니고 “수도배관이나 전기시설 조차 갖추지 못한”낙후된 지역을 일컫는다고 (소순태님은 이를“선교 극한 상황의 경우”를 일컫는다고 설명)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캐롤 박사의 견해는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근거, 특히 교회문헌을 제시할 때는 신중하게 연구하여 제대로 된 해석을 내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와 같이 큰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문헌에서 말하는 포교지 또는 선교지라는 용어는 엄밀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박사의 견해처럼 아프리카 오지 등의 미개발 지역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 우리나라 같이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나라는 아마도 지구상에 몇 되지 않을 것입니다. 즉, 정작에 "토착화"는 고사하고 혹은 건너뛰고 국내 개신교회의 영향 때문인지 너무 "미국화" 되어가고 있는 듯하여 사실은 걱정이 많습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우리나라 가톨릭계에 많은 갈등과 논란을 불러온 "생활성가"와 관련된 문제들을 생각해 볼 때에, 미사 중에 국악미사곡 연주 시에 어떠한 악기를 사용하는 것이 좋은 지에 대하여 이런 저런 말씀들이 많은 줄로 알고 있기에, 캐롤 박사의 견해가 무조건 잘못됐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참고로 말씀 드리면, 미국의 adoremus 홈페이지는,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아무나 글을 올릴 수 있는 게시판 형태로 운영되는 곳이 아니고, 투고 의뢰 및 접수 과정을 거쳐 일정한 심사를 거친 후에 올려지는 글이기에, 신부님께서 "잘못"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상당히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주교회의 홈페이지에서 검색란에 “선교”나 “포교” 또는 “인류복음화성”이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교황청 기구에 대한 설명 중에서 다음의 정보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정에 의하면 “선교 활동은 교회의 내적 본질 자체에서 흘러나옴이 명백하니 선교 활동은 교회의 구원의 신앙을 선포하며 교회의 보편적 일치를 확장함으로써 완성하며, 교회의 사도 계승을 실천케 하며, 교회의 성성을 증거하고 전파하며 증진시킨다. … 교회로부터 파견된 복음의 전파자들이 온 세계에 가서 복음 전파의 임무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과 집단에 교회를 부식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독특한 사업을 선교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성청에서 승인된 일정한 지역에서 실행되고 있다”(선교교령, 6항). 인류복음화성에 소속된 지역은 유럽 남동부와 아메리카의 몇몇 지역, 아프리카의 거의 전지역, 필리핀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 오스트레일리아 일부 지역을 제외한 뉴질랜드와 오세아니아 지역이다. 바로 이 인류복음화성(예전에는 포교성이라 부름)에 소속된 모든 지역을 선교지역, 또는 포교지역(mission lands)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은 포교지역에 속하며, 당연히 전례헌장 119항은 우리나라 성음악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지역의 구분은 전례력에도 차이를 두게 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10월 1일을 “아기예수의 동정학자 성녀 데레사 대축일”로 지냅니다. 그 이유는 성녀 데레사가 모든 선교지역(포교지역)의 주보성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유럽에서는 이 날이 대축일이 아니고 기념일일 뿐입니다. 이것은 전례적으로 한국이 아직 선교지역(mission lands)임을 드러내는 명확한 표징아니겠습니까? 이 참에 부언해두고 싶은 것은 교회문헌을 연구함에 있어서 그야말로 작의적 해석은 금물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공의회 문헌은 수개월, 또는 수년에 걸친 토론과 학문적 토대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기에 그 뒷 배경에 대한 연구 없이는 제대로 그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특히 토착화와 관계해서는 참으로 민감한 문제였기에 아주 열띤 토론이 있었고, 한 단어, 한 단어를 전례위원회 주교님들이 엄밀하게 토의하고 검토하여 의미심장하게 작성된 것입니다. 제게 지금 자료가 없어 그 근거를 제시할 수 없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회의록을 신학 도서관에서 찾아보시면(아직 한국말은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영어본이 있을 것입니다.) 회기별로 토의의 진행과정과 문헌의 결정과정을 공부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교 극한상황"을 표현하는 말인 "mission lands"와 "전례음악의 토착화"를 동일시 할 수는 없으므로, "전례음악의 토착화"를 연구할 때에 참고로 하는 것은 좋으나 "전례음악 토착화"의 당위성을 설명할 때에 이 자료에 전적으로 기대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라고 하는 소순태님의 결론은 잘못된 정보를 인용한 잘못된 생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 전례헌장 119항이야 말로 성음악 토착화의 헌장인 것입니다. 이 규정이 없다면 지금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토착화는 모두 무효가 되는 것이구요.

 

<=== 참으로 논리의 비약이 심하신 것 같습니다. 전번의 글에서 거듭하여 말씀 드린 내용이고 또 이번에 주신 글을 여러 번 읽고도 다시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만, 개신교측에서 잘 하는 자의적인 성경 자구해석이 매우 위험하듯이, "전례음악의 토착화"와 관련하여 "전례헌장 119항 한 항목에 너무 매달리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하신 바와 같은 "옳코 그럼의 문제"가 아니라 견해차이겠지요. 특히, 우리말로 번역된 성교회의 문헌을 참고는 하시되 너무 100% 신뢰하시지 말 것을 다시 한 번 부탁 드립니다. 

 

 4. 전례음악 토착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 대하여 : <그리고 바티칸 제 2차 공의회 문헌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듯이, 합당한 전례음악으로서 어느 누구도 그레고리오 성가나 다성음악만을 고집하지는 않습니다.그러나 다음의 자료에 의하면, "전례음악의 토착화"와 관련하여 일정 수준 이상의 부정적인 시각이 약 20년 전부터 국내 가톨릭 음악계에 있어 왔음 또한 사실인 듯 합니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자료를 제시하셨습니다. 이런 자료를 제공해 주셔서 참 고맙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토착화라고 하면 당연히 그래야지라고 생각해야 할텐데, 왜 회의적인 분위기가 될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의식 때문입니다. 지금 형성되어 있는 전례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이 그 외의 다른 생각들이 들어설 수 없도록 만드는 철옹성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전에는 이런 생각을 미쳐 못하고 그저 나름대로 열심히 하다보면, 그리고 세월이 흐르다 보면 절로 자리가 잡히고 사람들도 자연스레 토착화에 관심을 가지겠거니 하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오히려 갈수록 토착화에 대해 부정적인 논리가 득세를 하더군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마냥 침묵할 것이 아니라 토착화에 관한 저의 생각을 여러분과 나누고 무엇이 토착화의 바른 길인지를 함께 찾아보려는 것입니다. 전례음악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이 토착화에 앞장서야 바르게 토착화를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선 토착화에 대한 개념부터 생각해보지요. 무엇이 성음악의 토착화 입니까? 항간에 회자되고 있는 토착화의 개념부터 정리해야 그 순서가 맞을 것 같습니다. 대개 이런 이론들이 제시되고 있지요.  

 

1. 성음악 토착화는 교회전통음악을 잘 배우고 들여와서 우리 전례 안에서 신자들이 이를 잘 받아들이도록 교육하여 정착시키는 것이다.  

 

2. 성음악 토착화는 국악을 우선시하여 교회음악을 모두 국악으로 바꾸는 것이다.  

 

3. 성음악 토착화는 교회전통음악과 국악을 접목시켜 한국인의 심성에 맞는 전례음악 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 논리 중에 어느 것이 토착화의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을까요? 우선 1번은 토착화의 개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논리는 “토착화”라는 용어보다는 “이식” 또는 “수용”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개념입니다. 2번 역시 토착화의 개념을 잘못 인식한 경우입니다. 국악은 우리 음악의 뿌리이긴 하지만 전례음악에 막 바로 도입하는 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국악이 가톨릭전례와는 관계없이 형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교회의 오랜 음악전통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3번이 그 중 가장 올바른 개념이며 교회에서 권장하는 바일 것입니다.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성음악 토착화를 위해서는 교회전통음악과 국악을 접목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성음악인들이 배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음악을 공부하는 이들은 알겠지만 어느 한부분만 배우고자 해도 거의 평생이 걸리는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는 교회전통음악을 공부한 이들과 국악을 공부한 이들이 마음과 힘을 합쳐 함께 노력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지요. 물론 이것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 서로의 생각이 많이 차이가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토착화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수반된다면 그 어려움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류와 협력이 잦아지다보면 서로의 좋은 점을 토대로 하여 토착화 작업의 발판을 마련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위의 3번을 싫어 할 분은 아마도 한 분도 안 계실 것입니다. 강수근 신부님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진정 음악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사람은 어느 음악에서든지 그 음악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음악에 대한 깨달음은 자신의 음악세계를 새롭게 도약시켜 줍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필요성에 대한 의식입니다. 물론 우리는 전례음악이라는 특별한 장르에 봉사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합니다. 그런데 그 특별성이라는 것이 편협성으로 드러나게 되면 거기에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나 여타의 가능성이 없어지게 됩니다. 이 점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음악 역사를 보면 그레고리오 성가에서 다성음악으로 넘어갈 때 이런 위기가 있었지요. 단순한 그레고리오 성가에서 발전한 다성음악이 너무 지나치게 복잡해지자 교회(트렌트공의회)에서는 다성음악을 금하려고 합니다. 이때 팔레스트리나라는 위대한 성음악인이 잘 정돈된 다성음악을 선보여 이 조치를 무마시킵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마르첼루스 미사곡(Missa Papa Marcelli: 마르첼루스 2세 교황에게 헌정된 미사곡으로 6성부로 되어있으며, 1562-1563에 작곡함) 입니다. 만일 이 때 그가 없었다면 다성음악은 금지되었을 것이고, 지금 교회에는 그레고리오 성가만 남아 있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교회 전통음악의 일부도 한때는 교회의 반대에 부딪혔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새로운 시도는 항상 남용의 위험이 수반되며, 그 때문에 반대에 부딪히게 되고, 거기서 정화의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같이 성음악은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노력의 결실을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지요. 토착화와 관계해서 이점은 아주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새로운 의식, 새로운 도전 없이 새로운 성음악도 없다는 것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지금 이런 의식을 가지고 어렵게 토착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권고대로 그 가르침에 충실하면서. 그런데 어떤 이들은“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우리 격언대로 “장”에 대한 열정 보다는 “구더기”에 대한 염려와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장을 담그게 두면 좋지 않을까요? 함께 담그면 더욱 좋고요. 구더기는 나중에 건져내면 되지요. “장 담그면 안돼. 구더기 낄까 무서우니까.”라고 괜한 걱정을 하면서 굳이 장 담그는 사람들 기죽일 건 없지 않겠습니까?

 

<=== 전반부의 내용은 성가대 봉사를 어느 정도 한 분들이라면 다 잘 알고 계시는 내용인데 굳이 왜 언급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국악미사 작곡에 전념하신 분들의 "기를 죽이기 위하여" 전번 글을 올린 것이 아니라, 강신부님께서 먼저 이런 저런 말씀을 글로 담아 올리면서 의견을 듣고자 하신다기에, 며칠을 두고서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우리가 알 것은 알아야 하지 않나.. 싶어 올렸던 글이었습니다. 후반부 마지막 부분에 하신 "기를 죽이기 위하여" 라는 말씀은, 대단히 죄송스럽지만, 앞으로는 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격한 말씀을 공개적으로 하시면 아마도 얻는 것 보다도 잃는 것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한국 성음악의 역사가 빈한하긴 했지만, 다행히도 이제 많은 이들이 성음악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결과 서서히 그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다행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열악한 환경에서도 성심껏 성음악 진작을 위해 애써주신 선배 신부님들, 수도자들, 교수님들, 그리고 성심껏 성가대를 맡아 수고해주시는 지휘자, 반주자들과 성가대 임원들, 보이지 않는 수고 속에서 이 싸이트를 운영해 주시는 분들, 새로운 악보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해 주시는 분들 등등 두루두루 모든 분께 정말 마음으로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모든 노력의 방향이 서양음악 일색으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 우리 성음악인들이 미처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결국 토착화는 요원해지지 않겠습니까? 저는 많은 분들의 이런 노력들 안에 우리 성가에 대한 목마름도 좀 반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는 것입니다. 한국의 성미술 분야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 쪽은 토착화의 방향으로 상당한 진척을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토착화를 염려하는 논리보다는 토착화를 실현해내는 쪽에 더 무게가 가 있기 때문 아닙니까? 그런데 왜 성음악 분야에서는 토착화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주저하는 것인지 바로 그 점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언제까지 망설이기만 할 것입니까? 이제 성음악 분야에서도 점차적으로 토착화에 대한 의식이 확산되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무언가 방향을 모색해야하지 않겠습니까? 2000년대의 한국교회의 성음악 상황이 앞으로 100년, 200년, 500년, 1,000년 후에도 고스란히 대물림 된다면 그것은 비극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신앙 후손들에게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성음악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유산으로 남겨주고 싶습니까? 물론 교회의 전통 성음악도 여전히 남겨 주어야지요. 그러나 그것이면 족하겠습니까? 한국적인 성가는 없어도 좋겠습니까? “아, 그래. 우리 성가도 필요하지”하는 쪽으로 의식을 바꿀 필요가 정말 없는 건가요? “아니야, 우선 급한 것은 교회전통 성음악의 보급이야. 토착화는 그것으로 충분해.”라는 의식을 가지고 마냥 가면 언제쯤이나 토착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한번쯤 진지하게 한국교회의 성음악에 대한 자신의 의식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강수근 신부님과 같이 훌륭한 작곡능력을 가진 분들께서 양질의 국악미사곡들을 작곡해 주시는 것 만이 "전례음악의 토착화"를 제대로 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오해를 하시려는 듯하여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전번에 강수근 신부님께서 주신 말씀인

한국 전례음악의 먼 미래를 생각할 때 현실적으로 무엇이 가장 시급한 일이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전례음악의 레파토리를 늘리는 일이 가장 절실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실제로 레파토리가 너무 부족해서 개신교회의 성가들을 무분별하게 전례에 도입하는 것이 오늘의 성가대 현실 아닌지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양질의 전례성가들이 많이 만들어져 보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이 새로운 곡들이 한국음악적 요소를 담고 있으면 좋겠구요. 즉, 90% 서양음악적인 요소에 10% 국악적인 요소를 가미한 곡부터, 10% 서양음악적인 요소에 90% 국악적인 요소를 지닌 곡까지 다양한 모습의 우리 성가들이 많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진작하기 위한 의식 개혁과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만을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부디 좋은 학업 성과 있기를 바라면서...

 

소순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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