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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 작곡가 윤용하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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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자 [tjfgnl8801] 쪽지 캡슐

2011-05-17 ㅣ No.19008

 

 

 

보리밭 작곡가 윤용하의 삶과 꿈

  




 

  시집 한 권 없이 살다간 시인이 있듯이 작곡집 없이 간 작곡가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나 개별 작품이 우수하지 말란 법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지나치게 자신에게 엄격하거결백한 탓으로 봐야 한다.
 윤용하도 그런 성격의 예술가다.

1972년 4월19일 저녁, 윤용하가 그 좋아하는 술 시간에
서울 시민회관 소강당에서는 윤용하의 가곡집 ''보리밭''의 출판기념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가 이승을 하직한 지 7년이 되는 해다.
주인공이 없는 작곡집의 출판기념회여서인지 어쩐지 썰렁하기만 했다.

윤용하는 1922년 황해도 은율군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12세 때 일제의 압정을 피하면서 살길을 찾아 집안이 만주로 이주해갔다.
사정이 어려워 학교라곤 초등학교밖에 다닐 수 없었다.
그는 어릴 적 성가 속에서 음악적 자질과 열정의 씨앗을 키워야만 했다.
선천적으로 소리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다.
그는 성장하여 중국의 봉천과 신경을 중심으로
오현명 김동진 김대현 김성태 등 많은 악우들과 함께 작곡활동을 벌였다.
광복 이후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와 함흥에서 창작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북쪽의 예술어용화 정책에 반발하여 38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왔다.
곧이어 한국전쟁이 일어나 부산으로 피란왔다.

피란지 부산이 그의 궁핍을 더 심화시켰으면 시켰지 덜어줄 리 없었다.
그런 뼈저린 궁핍 가운데서도 이를 악물고 작곡에 전념하는 거의 순교자적 자세로 살아야만 했다.

''보리밭''은 부산 피란살이의 고난 속에서 우러나온 청신한 이미지의 작품이다.
시인 박화목과는 의기가 투합한 사이였다. 술은 비록 목로에서 주고받거니 하지만
시와 음악에 운명을 건 그들이기에 이심전심, 그보다 더한 마음의 통로는 없었다.
하루도 만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그런 우정의 나날이었다.

그 어느 날 윤용하는 박 시인에게 시 몇 편을 써 달라고 부탁하고 헤어진다.
다음 날 박화목은 ''옛 생각''이란 시를 윤용하에게 건넸다.
그는 며칠 뒤 연필로 쓴 악보를 가지고 나타났다.
시 제목이 ''보리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정도는 둘 사이에 별 문제될 것이 없었다.
 시인은 그 곡을 나름대로 허밍해 봤다.
우수 낀, 그러면서 맑은 정감이 온몸에 전율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잔을 거듭 비우면서
가사를 붙여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불러 봤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 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보리밭'' 전문).

이렇게 탄생한 가곡 ''보리밭''은 젊은 층,
특히 학생들 사이에서 꾸준히 사랑을 받아 불려졌다.
그러다가 가수 문정선이 고고리듬에 실어 부름으로써 폭발적으로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윤용하는 ''조선의 4계'' ''개선'' 등의 교향곡을 비롯해 오페라 곡, 가곡, 동요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부산에 피란해 있는 동안 어린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남달랐다.
그 어려운 여건을 무릅쓰고 ''대한 어린이 음악원''을 만드는가 하면 여러 차례 동요작곡발표도 가졌다.
또 종군 음악가로서 최전방을 순회하며 많은 군가를 작곡했다.
뒷날 플루트 독주곡 ''사병의 꿈''도 그 무렵에 얻은 악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환도 이후에는 밀양문화제 등에도 빠짐없이 참가하여 풍류를 즐기려 했다.
 밤새 필자와도 술을 함께하고 새벽에는 기어이 성당을 찾는 그런 독신자의 모습을 보고
매우 놀라워한 기억이 새롭다.

윤용하를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가난을 견디면서 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한 사회적 환경에 대해서도 거의 불평하지 않고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그의 집을 방문한 사람이 극소수이기 때문에
그의 생활 실상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가 죽기 일주일 전,
군에 있던 아우 용삼이 휴가를 나와 주점에서 형과 대좌했다.
아우는 형님의 처지를 익히 아는지라 모처럼 고기안주를 시켰다.
그런데 막상 형은 소주만 계속 들이붓고 고기에는 아예 손을 대지 않았다.
형은 이날따라 유달리 수심에 차 있었다.
술만 마시던 형이 "너 돈 가진 것 있어?"라고 물었다.
아우는 "예 얼마 안 되지만…" 하고 주머니를 털었다.
"애들이 굶고 있어…" 하며 형은 아껴놓았던 고기 안주를 신문지에 모두 싸는 것이었다.

아우가 주는 돈으로 쌀되를 사고 고기는 애들 찬으로 먹일 생각이었다.
그의 친지나 친구들이 장례 때 그토록 가슴 메이는 얘기를 듣고는 몸둘 바를 몰라 했다.
그의 삶이 어떠하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은 너무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1965년 7월, 43세의 나이로 셋방살이 단칸방에서 눈을 감았다.

 

 









 

<제주 황사평 순교자 묘역 가는 길에 11, 05, 15>

  

보리밭/ 박화목 시, 윤용하 곡, 조영남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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