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신앙은 지킴이 아니라 배움이다 (김두완 신부 )

인쇄

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9-01-22 ㅣ No.126979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신앙은 지킴이 아니라 배움이다

많은 신자들이 주일미사에 이유 없이 참여하지 않으면 대죄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죄 중에 있는 사람은 고백성사를 보지 않고는 영성체를 할 수 없다는 교회의 가르침 때문에, 주일 미사 한 번 빠진 것 때문에, 주일미사에 참여 했으면서도 고백성사를 보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영성체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연 주일미사 몇 번 빠졌다고 영성체를 못하게 할 만큼의 대죄가 되는지 저로서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일미사 참여하지 못했다고 영성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영성체를 하라고 권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묻는 분이시기보다는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고 우리가 영성체를 하는 이유도 그 분께 대한 사랑 때문이며 조금이라도 그 분을 닮아 보겠다는 정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미사에 몇 번 빠졌다고 영성체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은 용서해 주시는 분이기보다는 우리의 잘못을 묻고 벌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안식일에 밀밭사이를 예수님과 함께 걷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배가 고파서 그랬던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사이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이었던 것으로 정해져 있었던가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시비를 걸어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하고 말입니다. 이들은 그 사람의 처지나 상태에 대한 이해보다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것에 더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시비를 걸어 온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선포하신 예수님과 율법을 중시하던 바리사이 사람들과는 생각이 많이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을 피해 도망가던 다윗의 예를 들어서 율법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는 결국 율법주의자였던 바리사이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미움을 사게 되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태도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 바리사이 사람처럼 율법은 아닌지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구약시대의 사람들도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중요시하던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교회의 법규가 있고 지켜야 할 계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법규 지키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는지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지킴”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신앙의 척도인 것처럼 여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켰기 때문에 죄가 없다 혹은 못 지켰기에 죄를 지였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바리사이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과 같은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겠다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바리사이 사람들과 같은 마음, 혹은 같은 생각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을 만나 뵙고 기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학자를 만나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계명을 지키는 생활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 교회의 법규를 잘 지키는 사람이 신앙이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전적으로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이나 규율지킴에 소홀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말미암아 본질을 놓쳐버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복음은 신앙을 “따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라감, 그래서 그 분과 함께 지냄을 신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를 제대로 따르지도 못하고 있고, 예수님의 모범과 가르침을 제대로 수행도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겠다고 예수 제자 된 사람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모범을 따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제자라고 불릴 수가 없겠지요. 그러면 우리 모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모자라고 제대로 따르지 못했다고 단죄하고 질책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가 모자란다고 나무란다면, 그래서 단죄한다면 율법학자들과 다를 바 없는 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용서해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며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자비와 사랑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따름에 부족하다고 해도, 아니 첫발조차 제대로 내밀지 못했다고 해도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제자됨”의 길을 배울 수 있고, 좀 더 확실하게 따를 수 있게 성장해 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희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지킴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따름으로 배워야 할 것이고, 따름의 길을 갈려고 한다면 조금씩 조금씩 그 길을 배워 나가는 배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김두완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408 2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