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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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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03-18 ㅣ No.110817

 

2017년 3월 18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미카 7,14-15.18-20

주님,

14 과수원 한가운데,

숲 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

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15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18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19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20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복음 루카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세계적인 경영 석학인

짐 콜린스는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라는 책에서

 단순히 ‘좋은’ 기업의 수준을 넘어

‘위대한’ 기업이 된 11개의 기업

CEO들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11개 기업 CEO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던 철학과

신념은 물질에 대한

집착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정신과 마음,

영혼에 대한 ‘사랑’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돈을 목적으로 실적을

 올리는데 매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를 확립하고

실천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랬더니 돈은 저절로

따라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도 그 기업의

 CEO처럼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 다음에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많은

물질을 소유하게 되면 가치

실현을 위해 온 힘을 쏟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 뉴스를 보니,

 10년간 GDP(국내총생산)는

 29% 증가했지만 삶의 질은

12%만 좋아졌다는

기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풍요로워졌지만

삶의 질은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스스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10년 전과 지금 현재 자신이

소유하고 또 누리고 있는 것을

 비교해 보세요.

이 사회의 발전으로 인해

분명히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고

또한 그것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10년 전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사실 사람들은 삶의 질을 더욱 더

좋게 만들기 위해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지만,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해서

실제로 삶의 질은

좋아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를 확립하고

실현하는데 노력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아마 주님께서도 우리들에게

이 점을 전해주기 위해 당신

스스로 그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더 중요했다면

 돈 버는 방법,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이는 ‘사랑’만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음식을 먹는다고

투덜거리는 이들에게,

방탕하게 살다 돌아온

작은아들을 맞아들이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솔직히 불효자인 작은아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관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에 매이지 않으십니다.

이를 뛰어넘는 사랑,

그렇게 아버지를 배반해도

다시 당신 곁으로 다가온다면

기쁘게 받아주시는 큰 사랑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욕심의 반대는 무욕이 아닌,

잠시 내게

머무름에 대한 만족이다.

(달라이 라마)

잃어버린 아들과 사랑 가득한 아버지.

"소나무의 가르침"

(최천호)

소나무 씨앗 두 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위틈에 떨어지고

다른 하나는 흙 속에 묻혔습니다.

흙속에 떨어진 소나무 씨앗은

곧장 싹을 내고 쑥쑥 자랐습니다.

그러나 바위 틈에 떨어진 씨는

조금씩 밖에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흙속에서 자라나는

소나무가 말했습니다.
“나를 보아라. 나는 이렇게

크게 자라는데 너는 왜 그렇게

조금밖에 못 자라느냐.”
바위틈의 소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이 깊이 뿌리만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태풍이었습니다.

산 위에 서 있는 나무들이

뽑히고 꺾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위틈에서 자라나는

소나무는 꿋꿋이 서 있는데

흙 속에 있는 나무는 뽑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바위틈에 서있던

나무가 말했습니다.
“내가 왜 그토록 모질고

아프게 살았는지 이제 알겠지.

뿌리가 튼튼하려면 아픔과

시련을 이겨내야 하는 거란다.”
고통과 시련이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를 성장시키고

나를 더욱 더 굳세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고통과 시련은 아닐까요? 

매주 수업 가는

인천가톨릭대학교 운동장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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