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3일 (월)
(백)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성지순례ㅣ여행후기

수원교구 한덕골, 이윤일 성인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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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무 [cheonhabubu] 쪽지 캡슐

2008-12-27 ㅣ No.543

http://blog.chosun.com/cheonhabubu/3587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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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한덕골 교우촌과 이윤일 요한성인의 묘터

용인시 이동면 묵4리  (031)332-298=천리성당

 

이윤일 성인의 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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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다는 핑계로 제일 늦게 찾은 성지,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의 흔적이있는 곳이라 발길을 재촉했어야 했다.

 아침 일찍 지도를 가지고 다녔다. 올들어 가장 춥다는 날.

쌀쌀한 바람이 코끝을 에어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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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수지 앞에서 이윤일 요한 성인의 묘터 안내바위가 서 있다.

너무나 가파른 산길 580미터란 한다.

1킬로도 안되니까 설마 멀면 얼마나 되랴?

그러나 숨이 가쁘다. 깔딱 고개에는 줄을 쳐 두고 십자가의 기도 대신

싯귀가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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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라고 부르리까 순교자라 부르리까

배교한다 한마디면 살 수도 있었건만

때려도 비틀어도 그 한마디 아니하고... "

당시의 순교 현장을 그려 놓았고, 지금의 우리 마음가짐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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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질 없는 현대 순교 사랑실천 제일이라

나 먹을 때 굶는 이웃 나 웃을 때 우는 이웃

가난한 부자있고 돈 많은 빈자 있네

내 눈들보 못보고서 남의 눈티 크게보고

이웃사랑 하기커녕 미워하고 헐뜯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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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나뭇잎이 바스락 거린다.

이 싯귀를 읽으며 울먹울먹. 아무도 없는 적막한 산길에서 눈물을 글썽인다.

땅은 얼어서 얼음이 지표면으로 솟아 올랐다.

밟으면 빠드득 빠드득 소리가 난다.

제대로 신발을 갖춰 신고 오지 않아서 경사가 가파른 산길에서

몇번이나 미끌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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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그분의 묘가 있던 터인데, 순교 사적지로 꾸며 놓고 있었다.

이 깊은 산골 동네에 박해를 피해 그의 동생이 살았던 곳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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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이윤일 요한(1812-1867)

1812년 홍성에서 태어나 1865년 경남 상주 갈골로 이주했다가 부친 별세후

문경 여우목 교우촌에서 공소회장을 하면서 30여호를 입교시켰다.

1866년 병인박해로 교우 30여명과 함께 문경 관아로 끌려가 3일간 모진 형벌을 당한 후,

 다시 상주로 끌려가 배교를 강요받았으나 기도와 묵상으로 이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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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의 괴수로 지목되어 1867년 1월 4일 사형 선고를 받고

대구 관덕정에서 1월 21일, 마지막 음식을 들은 뒤 주머니에서 돈 몇 푼을 꺼내어

희광이에게 주면서 단칼에 베어달라고 부탁했다 한다.

유해는 이 토마스와 아들 이위서에 의해 대구 비산동에 매장되었다가,

경부선 철도 착공으로 용인시 이동면 묵1리에 살던 그의 동생 이시영씨에 의해

이곳 묵리 산 32-1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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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6월24일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지로 이장,

1987년 1월 21일 사후 120주년 미리내에서 대구 관덕정으로 모셔

대구 대교구 제 2주보로 선포되었다.

1968년 순교복자, 1984년 5월 6일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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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골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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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천주교 역사에서 용인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지역이다.

 이천이나 안성처럼 들이 많지 않고, 광주처럼 서울과 아주 가깝지도 않으며,

 골짜기가 깊고 수해나 한발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한덕마을도 천주교 박해시절 천주교신자들의 피난처였고 김대건신부가 사목(司牧)하기도 했던 곳.

은이와 해곡을 거쳐 미리내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따라

천주교 신자들의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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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넓은 잔디밭에 십자가를 중심으로 김대건 성인과 최양업 신부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한덕골 성지,

 천주교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고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던 사적지이다.

 

한국인 첫 사제인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가족들은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난 와서,

마을 근처 성애골(현재 매몰되었음) 골짜기에 들어가 산(生)나무와 산나무에 칡으로 얽어매고

억새풀을 덮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한국인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 귀국하여 이곳에서 둘째 큰아버지와 어린 동생들을 눈물로 상봉하였다.

두 분 다 관련되는 곳이기에 두 분의 동상을 함께 모셨다.

한덕골 성지 출신 순교자로는 성 김대건 신부와 부친 김제준(이냐시오) 성인과

김 시몬(1870년 순교, 40세), 김 마리아(1866년 순교, 42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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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덕은 한덕골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한+덕+골'로 풀어볼 수 있는데, '

한'은 크다는 뜻을 가지는 우리말이고 '덕(德)'은 역시 크다는 뜻을 한자로 옮긴 말이며

골을 골짜기를 가리킨다. 따라서 한덕골은 큰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다.
한덕이라는 땅이름도 세월이 흐른 뒤에는 김대건신부같은 큰 덕을 두루 갖춘 성인이

가르침을 펴던 곳이기 때문에  지역적인 위치나 형태나 지역의 성격을 반영한 이름 아니겠는가?

 일명 광파리 마을이라고도 했다 한다.

한덕은 신원컨트리클럽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적동저수지 위다.

묵리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주 교통이 불편했던 오지로

옛날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피난촌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전원주택이 많이 들어서 있어서 예전의 마을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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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로 조성된 땅은 마티아씨가 640평을 구입하여  교구에 기증했다 한다.

건너편에 하얗고 거대한 마리아 상이 있어서 혹시 김시몬, 김마리아 묘지인가 하고 찾아갔다.

개인 가족묘지라 하고 그 앞에 전원 주택지 조성하는 컨테이너 집에서

올라가지 못하게 한다.

 

그 마을에서 전해져 오는 이상한 온기....

늙은 감나무, 다 쓰러져 가는 울타리.

등걸만 남을 감나무 둥치.

그 옛 땅에 새로 지은 화려한 전원주택은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신앙의 선조들이 일구어 놓은 집터와 채마밭은 기즘은 아주 좋은

전원주택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후두둑 저수지 위를  나르는 물새 떼들의 몸짓을 보면서

쓸쓸한 성지의 아침을 맞이한다.

 

천하부부도장[31].jpg

2008년 1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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