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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善하신 뜻 (마태11,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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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7-14 ㅣ No.148296

 

2021년 7월 14일 수요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아버지의 하신 뜻 (마태11,25-27)

   

 

1독서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3,1-6.9-12)

그 무렵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그가 보니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그 떨기는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모세는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저 떨기가 왜 타 버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야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5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곧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사악의 하느님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9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

10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11 그러자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12 하느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면너희는 이 산 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

 

화답송 시편 103(102),1-2.3-4.6-7(◎ 8)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 내 영혼아주님을 찬미하여라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내 영혼아주님을 찬미하여라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 주님은 정의를 펼치시고억눌린 이 모두에게 공정을 베푸시네당신의 길을 모세에게당신의 업적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네

 

복음<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마태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하늘과 땅의 주님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아버지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제1독서 (탈출3,1-6.9-12)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5)

 

'가까이 오지 마라'로 번역된 '알 티크라브'(al thiqrab)에서 '티크라브'는 '접근하다', '멀지 않다', '가까이 오다'(창세27,41), '가까이 나아가다',  '다가가다'(신명4,11)라는 뜻을 지닌 '카라브'(qarab)의 미완료형이며, 여기에 일시적 금지를 나타내는 부정어 '알'(al)이 결합되었다.

 

히브리어에는 금지를 나타내는 표현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동사의 미완료형에 부정어 '로'(lo)가 결합된 형태로 '절대적 금지'와 '계속적 금지'를 나타내며,  또 하나는 여기처럼 부정어 '알'(al)이 사용되는 '일시적 금지'의 형태이다.

 

여기서 일시적 금지의 표현이 사용된 것은 모세가 선 곳이 그전부터 계속해서 거룩했던 곳이 아니라 지금 하느님의 임재와 현존하심으로 거룩해졌기 때문이다. 후에 모세의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도 이와 같은 금지의 명령이 내려졌다.

 

"주님 군대의 장수가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네가 서 있는 자리는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여호수아는 그대로 하였다."  (여호5,15)

 

'거룩한 땅이니'로 번역된 '아드마트 코데쉬 후'(admath qodesh hu)에서 '거룩한'으로 번역된 '코데쉬'는 하느님의 절대적 속성 가운데 하나이다(묵시4,8).

 

엄격한 의미에서 하느님만이 절대 거룩하시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되신다(이사43,3.14). 그러나 '코데쉬'가 피조물과 관련되어 사용될 수도 있다.

 

즉 '코데쉬'가 '장소'(신명23,14-15), '의식'(레위19,2; 21,6.8), '절기'(탈출16,23-26; 이사58,13), '물건'(레위19,24; 27,28; 여호6,19), '제물'(탈출30,32-33; 민수18,32) 등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성경의 용례들을 볼 때, 그것들이 비록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하느님과 관계를 가질 때 거룩해 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들은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도 그 '땅'이 거룩한 이유는 그 땅 자체가 원래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모세가 있었던 시나이 산은 아름다운 숲이나 멋있는 경관이 있는 곳이 아니고 화강암과 잡목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볼품이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 곳에 임재하시니까 거룩한 땅이 되는 것이다.

 

한편, '신을 벗으라'로 번역된 '샬 네알레카'(shal nealleka; put off yout shoes;

take off your sandals)는 '너의 신을 벗으라'는 뜻이다.

 

고대 근동에 있어서 '신' 곧 '나알'(naal)은 발 밑바닥만을 보호하는 간단한 '샌들'(sandal)을 가리킨다. 그리고 '샬'(shal)은 '벗다'(여호5,15)라는 뜻을 지닌 '나샬'(nashal)의 명령형이다.

 

성경을 보면, 거룩한 장소나 상중에 신을 벗었고(여호5,15; 2사무15,30; 에제24,17), 자신의 기업을 포기할 때도 신을 벗었다(신명25,9; 룻기4,7).

 

히브리인들에게 신을 벗고 맨발로 걷는다는 것은 수치스럽고 비참한 일이었으며 (2사무15,30; 이사20,2), 노예들이나 맨발로 다녔다.

그리고 먼지가 많은 근동 지방의 특성상 신발 더러움과 죄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하느님 대전에 신을 벗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자 자신의 낮고 비천함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어제 독서 탈출기 2장 14절을 보면,

자기 동포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 이제 히브리인들 끼리의 싸움을 말리는 모세에게 잘못한 자가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하고 따진다. 사실은 이 말속에 모세가 지금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가 들어 있다.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고, 어머니 무릎에서 신앙과 민족 교육을 받은 모세는 이집트 궁중에서 40년을 보내며, 입양된 공주의 아들로서  최고의 고등 교육을 받았다.

그는 이집트 궁중 교육을 받았고, 모세안에는 히브리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인권이 무엇인지, 인간의 존엄성이 무엇인지, 애국과 독립, 해방과 자유가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자기 힘으로 히브리인 동족의 지도자와 판관 노릇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힘으로 동족의 해방과 자유를 추구했을 때 실패하고, 그것이 탄로나 미디안 지방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면서 40년을 보낸다. 하느님은 이렇게 모세의 자기식의 의와 혈기와 힘을 무장해제 시키고, 소명의 시기가 오자,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인도하셨다.  

 

탈출기 3장 1-6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불타는 떨기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다.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아, 저 떨기가 왜 타버리지 않을까? 하고 모세가 생각하며 그것을 보러가는데, 주님께서 그걸 보시고 떨기 한 가운데서 "모세야,모세야!" 부르신다.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모세가 대답하자,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하신다.

 

사실 하느님이 발현하셨다는 호렙산 자락의 떨기나무를 순례 가서 보면, 별 볼일이 없다.

그러나 그 별 볼일 없는 것이 별 볼일 있는 것으로 되는 이유가 하느님이 그곳에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함께 하시면, 모세의 막대기도 기적의 도구가 되듯이 불타는 떨기가 있는 그 장소도 거룩한 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왜 불꽃 속에서 하느님은 현현하실까? 불은 사랑,열정,심판,정화를 의미한다.

히브리서 12장 29절에는 "우리의 하느님은 다 태워 버리는 불이십니다."  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런 의미일 것이다. 

루카복음 12장 49절에는 예수님이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라는 말씀을 하신다.

집회서 48장 1절에는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서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불>은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는 소명의 말씀을 전하시는 하느님은 불꽃속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말씀을 건네신다. 

 

거룩한 곳에서는 "신을 벗어라" 고 하느님이 말씀하신다.

나이 40세에 자기 힘과 능력과 지혜로 이스라엘을 구제하려다 살인을 하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간 모세가,

40년동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 밑에서 양떼를 돌보다 양보다 못한 인생을 살며~~자기식의 의와 혈기를 다 뺀 나이 80세 먹은 노인네 보고, 하느님께서는 이곳은 거룩한 땅이니 신발을 벗고 맨발로 오라고 하신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오라>는 말씀은 기존의 모세가 가지고 있는 삶의 방식과 태도와 자세, 자기식의 의와 혈기를 완전히 버리고 와서 당신이 주시는 새로운 말씀을 받으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렇게 당신의 온전한 도구로 쓰시기 위해 모세로 하여금 40년 광야 생활 뒤에 또 한번 자신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며 그동안의 삶을 정리하신다.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복음(마태11,25~27)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5~26)

 

원문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이 따로 분리되어 있다. 여기서 '아버지'에 해당하는 '파테르'(pater)는 호격이다.

 

사실 예수님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는데, 그 이유가 마태오 복음 11장 27절에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의 독특한 친밀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마태26,39.42).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것을 빌미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예수님을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으로 죽이고자 했다(요한5,18).

 

'아버지'라는 호칭은 그만큼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친밀성을 드러내는데 적합한 용어였지만, 무지한 유대인들의 눈에는 그것이 하느님을 망령되이 부르는 신성모독적 언행으로 비쳐진 것이다.

 

한편,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는 말은 사도 바오로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사도17,24).

그리고 창세기 14장 19절에도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이라는 표현이 발견되는데, 여기에는 '하늘과 땅의 창조주'(Maker of heaven and earth)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흥미롭게도 창세기 14장 19절에서 이 말을 했던 사람은 살렘 임금 멜키체덱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멜키체덱의 반열을 따른 영원한 대사제였다(히브6,20).

 

멜키체덱보다 이천여 년 뒤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예표하는구약의 인물인  멜키체덱과 같은 말로써 하느님을 호칭함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서 창조주되심을 다시 한번 확증하셨던 것이다.

 

창조주이시기에 당신이 가지는 창조물에 대한 주권(이사64,8) 높여 표현한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는 호칭 피조물인 인간이 하느님께 바쳐야 할 또 하나의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신' '이것'은 무엇인가?

 

원문은 단수가 아니고 복수('타우타'; tauta; '아우타'; auta; them)이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히 한 가지 사실이나 가르침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사건과 가르침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태오 복음의 주된 관심사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이며, 앞의 마태오 복음 11장 20~24절의 예수님의 책망과 심판 경고의 주된 이유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 때문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것' 하느님 나라의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 즉 복음을 의미한다.

 

한편, 본문에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 '철부지'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슬기롭다는'에 해당하는 '쉬네톤'(syneton) '이해력을 가진', '신중한', '학식이 있는', '지성을 갖춘'이란 뜻이다.

 

보통 자칭 지혜롭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를 가리킨다고 말한다(마태23,24).

그러나 단지 그들만이 아니고, 마태오 복음 11장 16절에 나오는 '이 세대', 즉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을 받고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모든 불신자들을 언급한다고 보아야 한다.

 

반면에 '철부지들'로 번역된 '네피오이스'(nepiois)는 '젖먹이','경험없는 사람들' 가리키는 것으로서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의 제자들' 혹은 '순박한 사람들'을 말한다.

 

결국 본문은 많이 배워서 자기 스스로 사리분별에 신중하고 학식있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지혜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이제 젖먹이처럼 경험없고 순박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지혜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의 아이러니같은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누구에게 당신의 진리를 나타내는가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얻어 입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데 있다.

 

끝으로, '그렇습니다,아버지!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에서 '아버지'로 직역된 '호 파테르'(ho pater)에서 정관사 '호'(ho)가 사용된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이 일반적인 부자(父子)관계가 아니라 유일하고 특이한 부자(父子)관계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요한10,14.15).

 

더군다나 '뜻'으로 번역된 '유도키아'(eudokia)는 '좋다', '잘되다'는 뜻의 부사 '유'(eu)와 '생각'이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추정되는 '도키아'(dokia)의 합성어로서 원래 '선의'(good will), '기쁘신 뜻'(good pleasure),  '은혜로운 뜻'(gracious will)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따라서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고 자비로운 뜻을 알고 있는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감격적인 표현이 잘 담겨져 있다.

 

즉 하느님께서 누군가에게 당신의 뜻을 감추든지 감추지 않는지는 순전히 하느님의 기쁘신 뜻에 달려 있음에 대한 예수님의 전적인 동의가 나타나고 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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