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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여성선각자 강완숙(골롬바) 순교 216주년 추모(2)[브레이크뉴스-2017-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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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pgu77] 쪽지 캡슐

2017-07-16 ㅣ No.213038

조선후기 여성선각자 강완숙(골롬바) 순교 216주년 추모(2)
 
 
 
박관우 역사작가  기사입력2017/07/16 [13:52]
 
▲ 박관우 역사작가. ⓒ브레이크뉴스

1회 마지막 대목에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가 강완숙(姜完淑)을 조선천주교회(朝鮮天主敎會) 최초(最初)의 여성회장(女性會長)으로 임명하였다고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당시 조선사회에서 여성에게 이런 지도자(指導者)의 직책을 준다는 것이 참으로 파격적인 조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것은 교회라는 특수성이 있기에 가능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론 이러한 조치를 취하는데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강완숙의 탁월한 리더쉽이 주문모 신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강완숙은 다분히 여장부적인 기질이 강하였다고 느껴지는데 이미 1회에서도 거론한 바 있지만 강완숙이란 이름 자체가 평범하게 느껴지는 이름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성직자(聖職者)로서 조선에 최초로 입국하여 강완숙을 여성지도자(女性指導者) 반열에 오르게 하였던 주문모 신부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 보는 것도 하나의 핵심 포인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문모 신부는 1752년(淸 乾隆 28) 중국 양자강(揚子江) 하류의 소도시인 소주(蘇州)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릴 때에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으며, 서양학문에 흥미를 가진 이후 천주교에 입교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 북경(北京)으로 이주하여 학문에 정진하던 중, 뜻한 바 있어서 북경 천주교 신학교에 입학하여 1회로 졸업한 이후 사제(司祭)로 서품(敍品)되었다.


그는 평소 인품이 어질고 총명하였으며, 학문에 대한 시야(視野)가 넓었다고 하는데 주문모 신부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조선으로 입국하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상세히 알아 보기로 한다.


당시 조선천주교회 신자들은 북경 교구에 인편을 통하여 성직자 파견을 간청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북경 교구장인 구베아(Alexandre de Gouvea 湯士選) 주교(主敎)가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었으며, 마침내 1791년(정조 15) 2월 마카오 태생 중국인 오(吳) 요안 레미디오스(Johannedos Remedios, Wou) 신부에게 조선전도(朝鮮傳道)의 임무를 위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 신부가 이러한 임무를 띠고 북경을 출발하여 조선을 향하여 20여일에 걸친 여정 끝에 국경에 도착하였으나 조선 신자들이 마중 나오지 못하여 조선입국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북경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이 초래된 이유는 조상제사(祖上祭祀)를 금지한 구베아 주교의 서한으로 인하여 조선교회안에서 동요가 일어나고 박해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평소 조선천주교회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구베아 주교는 성직자의 영입을 간절히 원하는 신자들의 입장을 교황 비오 6세에게 서한을 통하여 보고하였으며, 그 결과 교황은 이러한 조선천주교회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지만 당시 신해박해(辛亥迫害)로 인하여 교회는 대외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신해박해가 어느 정도 수습된 이후 신자들이 다시 성직자 영입을 간청하게 되었으며, 이를 구베아 주교가 수용하면서 성직자 영입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1794년(정조 18) 2월 구베아 주교로부터 이미 병으로 북경에서 선종(善終)한 오 신부에 이어서 조선전도의 위임을 받은 주문모 신부가 북경을 출발하여 20여일만에 봉황성(鳳凰城) 책문(柵門)에 도달하여 그곳에서 미리 약속한 신도들을 만났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아직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하였으며, 더군다나 압록강의 얼음도 녹기 시작하여 국경으로 잡입(潛入)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성직자 영입은 잠시 보류하고 주문모 신부는 10개월동안을 만주(滿洲) 지방에 있는 교회를 두루 방문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10개월이 지나고 마침내 1794년(정조 18) 12월 주문모 신부가 흑한의 만주에서 신자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으며, 그 이후 어둠을 타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의주관문(義州關門)을 무사히 통과한 이후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걷기를 12일 동안 반복하다가 1795년(정조 19) 정월초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도착할 당시 전국적으로 신도수가 4천명에 이르렀다는 것인데 계동(桂洞)에 있는 최인길(崔仁吉)의 집에 처소(處所)를 정한 이후 몇 개월 동안 조선말을 배우고 성토요일(聖土曜日,부활대축일 전날)에는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한편 언어소통이 안 되는 관계로 신자가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告解聖事)는 필담(筆談)으로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795년(정조 19) 4월 5일 부활대축일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이후 최초로 미사성제를 거행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222년 전의 일이었다. pgu77@naver.com


*필자/문암 박관우. 역사작가.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저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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