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5일 (일)
(백)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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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예수 수난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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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훈 [saint72] 쪽지 캡슐

1999-02-15 ㅣ No.124

 

- 예수 수난에 대한 고찰 -

 

 

 옛적 플라톤은 그의 ’국가편’에서 정의 때문에 악인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의인을 그렸다. 정의를  버리기보다는 죽음을  당하더라도 정의를 완수하려는

것이 낫다는 것을 논술하였기 때문에 초대 교부(敎父) 등에 의하여 주님의 수

난을 예언한 것으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루소는 그의 저서 ’에밀’에서 "만일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의인의 그것이라 한다면 예수의 죽음은 하느님의 죽음이

다." 라는 불후의 명구를 남겼다. 우리는 주님의 수난에서 모든 천하고 더럽혀

진 동기가 성스럽고 의로운 것을 망치려 하는 것을 보며  진실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은 그렇게 하여 새로운 과월(파스카)의 희생으로써

전 인류의 속죄가 되어 아버지이신 하느님 앞에 바치게 되어야 하였음을 알게

된다.

 

 그는 진리를 가르치며 자비를 주시고 가셨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악의 힘

을 보고 넘기지 못하였다.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의 대표자, 전매자로 자임하였

던 유다교의 교역자는 그 비천한 한 갈릴래아인이 놀라울 만한  종교 운동의

고취자며 군중에 대하여 위대한 세력을 떨치고 그들의  공허한 형식주의에 기

탄 없는 비판을 가하여 그 위선을 밝히는 데 주저치 않음을 보고 드디어 내버

려 두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은 질투에 불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비

열함을 가장 신성한 구실로서 삼아 버렸다. 예수는 스스로를 하느님과 동일시

하고 율법을 경멸하는 모독자로 죽어 마땅하다고 하였다. 더욱이 정면으로 목

적을 달성치 못함을 알고 조국의 사랑을 배반하는 로마 황제에 대한 모반자로

서 예수를 침략자의 법정에 고소하였다.  예수께서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

르에게 돌려주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내심은 로마의 지배에

대한 반역에 불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적을 위하여는 수단을 가리지 않

고 빌라도에게 그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이는 황제에게 충실치 않은 것이

라고 외쳤다. 그와 같은 자들에게 스승을 은화 서른 닢을 받고 판 것은 12사

도 중 한사람이었다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그러나 하느님의 손은 크게 작용한다. 그들은 유다인의 왕보다 강도 바라빠

를 택하였다. 유다인의 왕은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빌라도는 우습게도

그 칭호를 죄표에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국민적 자부심을 크게 손상한 그들이

그 철회를 요구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피는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이 지겠다는 외침은 문자 그대로 이루어져 유다의 종주권(宗主權)은 골

고타 언덕의 십자가에 못 박혀 망하고 예루살렘은 황폐해져 버렸다. 유다는

정치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멸망하여 구원의 복음과 지배는 이방인에게 넘어

갔다.  

 

 

하느님의 죽음

 

 

 루소는 "하느님의 죽음" 이라고 말하였다. 말이야 그럴싸하다. 예수의 죽음은

실로 그리스도의 하느님 위격이 그에게 갖추어진 인생의 수난 결과이다. 고난

과 죽음의 주체는 신격(神格)이었다. 그러나 고난과 죽음의  쓴잔을 맛본 것은

신인(神人)그리스도의 인성이었고 신성(神性)은 아니다. 신성은 고통받을 수가

없다, 고통은 한계가 있는 자가 피할 수 없는 결함이고 도덕적으로는  죄, 즉

도덕적 결함에 대한 벌이다. 하느님은 인류의 죄에 대한 벌을 스스로 맞아 고

통을 받기 위하여, 고통을 당하며 죄를 속죄코자 그 신격으로 인성을 받아들

여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은 율법의 희생 제물과 봉헌물을 원하시지 않았습니

다. 그래서 저를 참 제물로 받으시려고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번제

물(燔祭物)과 속죄의 제물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하느님, 저는 성서에 기록된 대로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 예수 그리

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단 한 번 몸을 바치셨고 그 때문에 우리는 거

룩한 사람이 되었다.(히브 10, 5-10).

 

 이 신앙이 모순 없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어찌 되었건 그리스도에게는 신

성과 인성이 하나의 위격(位格, persona)이 되며, 더구나 하느님의 위격에 결

합되어 있다는 것이 우선 인정되어야 한다. 신성은 고통을 받거나 죽을 수 없

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단지 인성이 고통받으며 죽었다 하면 그 사람이 아무

리 의인이라 하여도 그 소행은 유한한 인간적 가치를 갖는  것으로 끝나며 그

로 인하여 우리가 거룩하게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처럼 인

간적으로 위대할 수가 있다. 또한 그의 장렬한 모범은 우리로 하여금 감격해

마지 않게 하는 것도 가능하다. 모든 순교자는 그러한 자극을 주는 것으로 테

르툴리아누스가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이다."라고 말한 대로이다.  

그러나 순교자의 피도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神人) 그리스도의 속죄가 아니면 우리의 구원은 헛된 것이다.

 

 

 

고난은 하느님 사랑의 발현

 

 

 주님은 하느님으로서는 고통을 받지 않으시고 다만 사람으로서 고통을 받으

셨다. 그 인성은 하느님의 위격에 갖추어진 인성이기에 아무리 작은 소행이라

도 무한한 존엄과 가치를 띠고 있으므로 일거수 일투족의 노고로써 너끈히 무

한한 공덕(功德)을 쌓아 우리를 구원해 주시게 된다. 구세의 성취에 고난은 몰

론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주님은 그 말씀 그대로 우리에게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

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요한 15, 15)하시며 최대의 사랑을 표시

하신 것이다. 우리의 영은 하느님의 죽음에 버금갈 만큼 귀중한 것이다. 그 영

의 죽음인 죄는 그만큼 무섭고 나쁜 것이다. 영원히 파급되는 무한한 가치가

얼마만한 것인가 하는 것은 덧없는 인간의 생각으로써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

다. 석양이 비칠 때 산정상에 서서 5척 크기의 사람 그림자가 해가 지는 데

따라 끝없이 길게 보이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있어 새로

운 가치 표준을 발견한다. 그것은 현의(玄義)인 동시에 마음에 아로새겨 없어

지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영의 존엄의 계시인 것이다. 이 두 가지 무한대가

후지산(富士山)의 그림자처럼 십자가상의 희생이라는 노인이나 어린이도 알기

쉬운 경탄할 사실에 의하여 우리의 심경 위에 투시된 것이다.

 

 

 사랑은 주기를 원한다. 최대의 사랑은 최대의 것을 주려고 희망한다. 하느님

은 이 세상에 사랑하는 외아들을 보내실 만큼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 그 외아

들은 스스로를 버리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를 사양하지 않으셨다. 고난과

죽음은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랑은 그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도리

어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사랑하는 자를 위한 고난은 행복한 것이다. 십

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행복이고 영광이다. 그리하여

그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경우처럼 부득이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때에 우리의 작은 희

생을 하느님이 가장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것이다. 가톨릭 금욕주의의 근원은

실로 그리스도교의 정신 그것이며 그 실천은 그리스도  모방의 본질이다.        

 

 

 

 

 

 

 

 

 

 

 

 

이와시타 소이치 신부의 ’가톨릭 신앙’ 中에서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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