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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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정 [agneskim] 쪽지 캡슐

2000-01-07 ㅣ No.865

 

知人이 요즘 여러 가지로 힘든 저에게 보내온 좋은 글이 있어 올립니다.

이미 다른 분이 이 곳에 올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길 빕니다.

 

 

당신에게..

 

때아닌 천둥 번개에 장대비까지 쏟아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태풍의 영향인가 봅니다.

당신은 번개가 칠 때마다 기진맥진입니다. 사고의 후유증입니다.

 

이제 당신도 15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 익숙해질 만도 한데 왜 그렇게

자꾸만 당신의 몸뚱이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음을 내뱉으며 편안한 잠을 주무시지 못하는 당신을 그냥 두고 잘 수가

없어 이렇게 깨어 있습니다.

맨숭하게 깨어 있는 게 무료해서 처음으로 당신에게 글을 쓰려고 합니다.

 

매일 보는 당신에게 편지를 쓴다고 생각하니 쑥스럽습니다.

당신과 한집에서 살을 맞대고 산 지 25년이 되었습니다. 그 25년을

되돌아보려고 합니다. 쉽지만은 않았던 우리들의 25년이었습니다.

 

그날 기억하시죠? 겨울 날씨치고는 따뜻했던 그날...

동네 소꿉 친구였고 서로 비슷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었는지

당신과 저는 같은 지붕 아래 사는데 그리 큰 부담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남들 다 하는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첫날밤의 살 가운 정 하나로 맺어진

우리였죠. 그래도 좋았습니다.

 

남의 집 단칸방을 세 내서 자식들을 키우며 살아야 했지만 따뜻했습니다.

노동 품팔이로 맞벌이를 했죠. 남들 눈에는 시멘트 한 포대기 지고 4층을

오르내리는 제가 가엾게도 보였겠지만, 서로 젊을 때 벌어두자고 하며

커 가는 자식들에게는 우리가 한 고생을 시키지 말자고 위로하며 지낸

날들이었습니다. 그랬는데...

 

81년 1월 그날 당신은 일터로 나가면서 오랜만에 일이 없어 시댁과

친정나들이를 하는 제게 스카프를 매주며 ’잘 다녀와’했습니다.

그런데, 친정에 몇 분 앉아 있지도 못하고 저는 당신의 사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신이 계신 병원으로 향하면서 큰 사고가 아니길 얼마나

빌었는지 손바닥에 땀이 흥건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내 기도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응급실에서 만난 당신은

아침에 제게 스카프를 매주던 당신이 아니었습니다.

온 몸이 시커멓게 타 들어가 산소 호흡기에 겨우 의지하고 숨을 쉬는

당신은 저의 외침에도 전혀 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지영 아빠, 여보, 당신, 정신 차려보세요.’ 6만 6000볼트라는, 지금도

상상하기가 어려운 전압에 당신 몸이 감전되었다고 했습니다.

마냥 주저앉아서 그냥 시간이 멈추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리라고 생각하며 일어섰습니다.

당신과 꾸던 꿈이 사라졌음을 한탄만 하고는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난생 처음의 서울행은 썩어 들어가는 당신 몸을 살리기 위해서,

당신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턱없이 마냥 올라가는 열을 내리기 위해서 얼음찜질을 계속하며 지낸

열흘 동안, 그리고 서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렇게 울었습니다.

눈가가 짓물러서 더 이상 눈물이 나와도 닦아 낼 엄두조차 나지 않는데도

그냥 눈물은 나왔습니다.

 

서울에 올라가서 의사에게 들은 것은 ’왜 올라왔느냐’는 호통뿐이었습니다.

제주로 돌아오면서 저는 ’비행기가 여기에서 그냥 머무르든지 아니면

떨어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14시간 동안의 수술을 통해 당신은 왼쪽다리 허벅지 부위, 왼팔 어깨부위,

오른팔 팔꿈치를 잃고 겨우 한쪽 다리만을 가진 동그라한 몸뚱이를

가지고 제 앞에 실려 왔습니다. 오랫동안의 머뭇거림은 결국 당신 몸만

더 썩어 들어가도록 허용한 꼴이었습니다.

 

그날 밤 당신과 저는 얼마나 울었는지요. 저는 당신의 온 몸을 감고 있는

붕대들을 쓰다듬으며, 당신은 수술 통증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냥 울었죠.

당신이 그렇게 우는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입니다.

 

제 얼굴을 어루만져 줄 손도 없다면서 얼굴로 마냥 비비며 울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만 거푸 하시며 수술 후에 할머니 손을 붙잡고 당신 앞에

선 아이들은 처음엔 당신을 멀뚱하게 바라보기만 하였습니다.

열 살과 일곱 살 된 두 딸의 눈에는 이내 눈물이 가득해졌고, 그리고

당신 눈에도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아빠..." "아빠 이상하니? 이제 너희들이 아빠 대신 엄마를 돌봐야 한다.

공부도 잘하고 엄마 말씀도 잘 듣고. 지영이 송이는 착하니까 아빠가 믿는다."

 

당신은 그때 의연한 척하셨지만, 당신이 가슴에서 쏟아내는 피눈물을 저는

보았습니다.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은 절단 부위 치료 때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괴로워했습니다.

 

주사를 맞은 엉덩이가 굳어질 대로 굳어져 더 이상 주사 맞을 자리가 없어

간호사는 힘들어했고, 다섯 번의 재수술을 통해 당신의 몸만 덩그렇게

놓여지게 되었죠.

 

그렇게 6개월이 지나는 동안 병원비와 생활비는 당신과 제가 모아두었던

돈으로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고, 저는 당신 수발에 지친 몸을

이끌고 여기저기 빚을 얻으러 다녀야 했습니다.

 

숫기가 없었던 저였기에, 그리고 돈에 있어서 냉혹한 현실로 인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당신은 어느 날 그랬습니다.

 

"여보 나 죽여줘. 나 혼자는 죽을 수도 없다는 걸 당신이 더 잘 알잖아.

제발 당신이나 자식들을 위해서..."

 

그땐 솔직히 저도 당신이, 어느 날 의사가 말한 대로 전기 후유증이

심해져서, 심장마비라도 일으켜 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여보 당신이 이러시면 저는 더욱 힘들어져요. 그래요. 차라리 당신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제 앞에 놓인 당신과 자식들은 제게는 너무도 버거운

몫이에요. 저도 지쳤어요. 오늘은 한푼도 빌리지 못했다고요.’

 

당신에게 이렇게 악이라도 퍼붓는다면 제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당신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은 제게

힘이 되리라 믿으며 견디었습니다. 언젠가 당신과 제가 꾸었던 꿈이 다시

부활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여보. 당신과 제가 병원을 나선 건 늦은 봄이었죠. 고향 친지들의 도움으로

보금자리를 다시 마련한 우리 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커다랗게 높아진 빚더미밖에...

 

온 식구가 살아남기 위해서 저는 날품팔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남의 눈치를 보며 일을 하고 집에 오면 손가락 움직일 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이런 생활의 어려움 들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방황이었습니다. 갑작스런 사고로 잃어버린 팔다리에 대한

그리움으로 당신은 날마다 자학하며 지내셨죠.

달래도 보고 계속 그렇게 한다면 당신 곁을 떠나겠다고 협박도 해보았지만

방황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셋째 은성이가 태어나고 당신의 방황은

멈추었습니다.

 

4개월도 채 되지 않은 은성이와 당신을 집에 두고 날품팔이에 나서면서

저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집으로 돌아와 보면 당신은 제대로 기지도 못하는 은성이를 보살피느라

기진맥진해 있었고, 초등 학생이었던 딸자식들은 엉망이 된 집안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었죠.

행상에 나가서는 퉁퉁 불어오는 젖을 사람들 눈을 피해 짜내며 물건 하나

더 팔기 위해 목이 쉬어라 외쳤습니다.

밤이 되면 은성이에게 젖을 물리며 날마다 울었습니다.

당신은 곁에서 모른 척하며 숨죽여 울었고. 그래도 저는 아침이면

다시 독한 맘을 먹고 울면서 보채는 젖먹이를 떼어놓고 나섰습니다.

자식들을 그대로 두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여보! 당신은 그때 얻은 위장병으로 지금까지도 고생하고 계시고요.

하루하루 이를 악물고선 아무리 해도 끝날 것 같지 않은 막막함을

헤쳐나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서 시험되어지는

듯한 느낌이었죠. 시험이라면 끝내 이기고야 말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당신 곁을 떠나려고 할 때마다 건강하게 커주는 우리의

자식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팔다리가 없다고 해도 당신은 아빠였습니다.

제 남편이었고요. 그렇게 마음먹으며 하루하루 버텼고, 시간은 흘러가

15년째 살아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방파제 공사 현장에서 밥일을하며 10년째를 맞습니다.

인부들의 식사시간을 제대로 맞추기 위해서 서둘다 보면 손이 성할 날이

없습니다. 칼날에 몇 번씩 베이면서 어디 하나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가

되어도 설거지통에 손을 담그고 있어야 했죠.

당신은 단지 안타까운 눈길을 줄 수밖에 없었고...

 

어느 날인가 유난히도 눈이 많았던 겨울이었습니다.

동이 트기도 전에 집을 나서 밥집으로 향하는데 워낙 추워서 몸을 움츠리고

있어서였는지 얼어붙은 눈길에 넘어진 적이 있었죠.

짚고 일어설 것도 없었고, 그냥 그 자리에 누워 다리와 허리에 오는 통증을

견디어냈습니다. 온 몸이 언 채로 겨우 일어서 인부들의 아침을 챙기며 저는

엉엉 울었죠.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당신이 가슴 아파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으니까요. 지금 아셔도 가슴 아파하실 테지만, 여보, 이제는 제 고통에

대해서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마세요.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당신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여유도 있잖아요.

 

당신이 이제는 깊게 주무시는가 봅니다. 천둥 번개가 멎어서 그런가 봅니다.

파도 소리도 잦아들고 있고, 밤이 꽤 깊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큰딸이 학사 모를 쓰고 웃고 있습니다.

수석으로 졸업하는 중학교 졸업식장에, 그리고 대학 입학식이나 졸업식에도

가지 못한 부모를 두고도 착하고 당당하게 자라주어서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된 녀석이 얼마나 대견한지 몰라요.

비록 자신의 꿈이었던 선생님은 되지 못했지만 입시학원 강사로서 작은 꿈을

펼치고 있고, 둘째는 당신을 닮아서 타고난 손재주로 사람들의 머리를

다듬는 직업인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머리를 신경 쓰지 않아 언제나 핀잔을 들으면서도 그 녀석의 손에 맡기면

되니 이제야 제가 견디었던 고통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압니다.

 

어미젖 한번 제대로 빨지 못하고 자란 셋째는 이제 초등 학교 6학년이 되어서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지난 봄 과학의 날에 과학기술처 장관상까지

받았으니 얼마나 기쁜지, 당신과 저는 그날도 울었잖아요. 여보 이게

이제 우리들이 받는 행복인가 봅니다.

 

당신 그거 기억하시죠. 다 큰자식을 앞장세우고 결혼식을 올리던 때 목발

하나에 겨우 의지해서 의족으로 몸뚱이를 만든 당신의 팔짱을 내가 끼고

입장 구령에 맞추어서 나오는 우리를 보며 지켜보던 사람들이

눈시울을 더욱 붉히는 걸보고 당신이 그러셨죠.

 

"울지 마세요."

 

그때 저는 화장이 지워지는 것도 모르고 면사포에 얼굴을 묻고 울며

다짐했습니다. 영원히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내일이면 밥집으로 나가서 일을 해야겠지요. 그리고 돌아와서는 당신의 아침을

챙겨드리고, 씻겨드리고, 화장실 함께 가고,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제

생활입니다. 가끔은 주위에서 부부 동반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또 외출을 자유롭게 하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움에 당신을 원망해보지만

그때마다 당신이 ’허허’ 웃으며 ’미안해’하시면 저는 멋쩍게 돌아서곤

했습니다.

 

이제 겨울이 되려는가 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당신이 키우고 있는 저와

제가 가슴에서 키우고 있는 당신은 더욱 커나가겠죠.

이번 겨울이 되기 전에 당신을 위해 낡은 집을 수리해서 꼭 보일러를

놓아드리고 싶었는데 죄송해요. 대중 목욕탕을 못 가는 당신이어서

집에서라도 겨울이면 따뜻한 물에 때를 밀어드리고 싶었는데.

여보, 그렇지만 15년 전 당신이 팔다리를 잃은 것보다 더한 불행이 우리에게

없었던 것에 대해서 만족하기로 해요. 내년이면 꼭 보일러 놓아서 당신의

때를 밀어드릴 것을 약속할게요 .

 

당신의 숨소리가 편안해지고 있습니다. 건강하셔야 돼요.

건강해야 당신이 하시는 장애인 단체 일도 잘 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의족과 목발 하나에 겨우 의지해서 버스 타고 내리시는 당신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그만두라고 떼라도 쓰고 싶지만 15년만에 다시 시작한 당신의

사회 생활이 자랑스러워요.

자신과 똑같은, 혹은 더 큰 아픔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장애인과 울고

웃으며 당신의 뜻을 펴나가는 모습을 보며 저는 더욱더 숙연해지고 희망을

갖게 되는 지도 모른답니다. 항상 열심이신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죽으면 다시 팔다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니까 그때는 저를 업고 다니시며

함께 지내겠다는 당신.

 

여보!

당신이 저를 업어주지 못해도, 죽어서 다시 지금처럼 팔다리가 없다 해도

제가 당신을 지금처럼 보살펴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우리 살아 있는 동안 웃으면서만 지내요.

 

그렇게 살아도 당신과 제가 지낼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을 테니까요.

 

여보,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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