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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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렬신부(행복한 거리(距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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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10-14 ㅣ No.115421

 

"행복한 거리(距離)"

여러분, 몸에 가시가

많이 꽂혀있는 짐승이 있죠?

뭐죠? 고슴도치.

이런 고슴도치가 겨울에

새끼가 추울까봐 새끼를

품어 주다보면 가시 때문에

새끼가 찔려요.

또 마찬가지로 새끼

가시 때문에

어미도 상처를 입어요.

그래서 고슴도치는

 오랜 시간 찔리는 것을

반복하면서

가장 적당한 거리를

안대요. 새끼에 상처를

안주면서도 가능한

가까이 갈 수 있는데

까지는 가는 거예요.

또 새끼가 1cm다가서면

마는 1cm 뒤로

물러나준대요.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살아온 지혜로 적당한 간격 ,

즉 적간을 안대요.

 또 전깃줄에 참새들이

앉아있을 때 절대로

붙어 앉아있지 않아요.

날아갈 때 부딪힐까봐

어느 정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앉는데요.

서로 부담되지 않도록.

그 하찮은 참새도,

고슴도치도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거리를 알아요.

 인간도 식구들끼리

가장 편안한 거리는

 40cm정도래요.

그런데 그 거리를 벗어나서

앉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예요.

또 일반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1m20cm정도가

편안함을 느낀대요.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자꾸1m20cm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면

불안함을 느낀대요.

 연주자의 몸과 그 악기와

가장 적당한 간격이 있고,

교향악단 의자에도

적당한 간격이 있어요.

40cm인데,

그래야만 자기 연주소리를

정확히 들을 수 있고,

상대편소리에 끌려가질

않을 수 있는 거리래요.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가시적인 거리가 아닌

행복한 거리가 있고,

 또 하느님과의 가장 행복한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것도

무너뜨리는 게 있어요.

내 잘못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다른 사람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환경 때문에

그럴 수도 있어요.

이걸 회복 하는 길,

즉 무너진 거리를

거리감을 적정한 거리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화해라고

하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는 우리 쪽에서

그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표현해요.

그런데 이 화해를 거절하면,

 1 단절,

2 인연이 끊어지고

 3 영적 죽음의 상태,

이 세 가지가

찾아올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죄를 저질렀을 때

이런 현상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 뿐 만아니라

해야 할 본분을

하지 않았을 때

역시 결과가 똑같이 나타나요.

예를 들면, 부모 자식 간에

 불효로도 그런

죽음의 상태가 되지만,

부모에게 무관심의

상태가 될 때, 즉,

자식으로 해야 할 본분을

못할 때도 결과는 단절과

무관심과 영적의 죽음의

상태까지 가게 되죠.

 또 하느님과의 관계도 분명히

 무너질 수가 있습니다.

태초에 창조주 하느님이

당신의 모상을 닮은 인간을

진흙인형에다가 숨을

불어넣어서 창조하십니다.

그러고서는이 세상 어떤

짐승에게도 없는 하느님이

가지고 있던 것을

그대로 주시죠.

세 가지를 주시는데요.

1.지혜 2.의지. 3.자유를 주시죠.

한마디로 자유의지를 주시죠.

그리고 딱 한 가지를 금하십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따먹을 수 있어도

선악과만큼은

안 된다고 하시며

먹으면 죽는다 하십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건드립니다.

만일 하느님이 그 동산에

유일하게 먹을 것이

 선악과뿐인데

 먹지 말라고 했다면,

“저양반이 아주

웃기는 양반이지.”

라고 했을 거예요.

그러나 먹을 것은

많았기에 어려운

명령도 아니었고

못 지킬 순명도 아니었지요.

기적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죠.

 저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질 거라는

 즉, 하느님과 동격이

될 거라는 그 생각으로

아담과 하와가 자유의지를

남용한 거죠.

결국 단절과 죽음의 상태로

전략해 버리고 맙니다.

 혹자는 그러죠.

왜 자유의지를 주었습니까?

그것을 말이라고!

자유의지가 없다면,

개돼지나 똑같은 거죠.

자유가 없다면 우리가 죄를

지을 일도 없어요.

 왜? 선택을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죄를 지어도

책임 질 필요가 없죠.

그래서 정신병자들이

살인을 저질러도

살인죄로 되지 않죠.

그냥 정신병원에 가둬요.

 이렇게 단절과

죽음의 상태가 된,

이 무너진 하느님과의

가장 행복한 거리를

회복하는 것을

우리 쪽에서는

원이라고 한다고 했죠.

이 관계회복을 위해서

사실 인간들 쪽에서는

할 게 없어요.

무능해요.

그래서 바로 예수님

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거예요.

우리의 순명으로는 부족하고,

워낙 깊은 죄였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성부께

 드리는 순명이 필요했어요.

 그 순명의 내용은 죽기까지

 손 하나 잘라내듯이 아니라,

발가락 하나 잘라내듯이

니라, 정말 죽기까지!

 불순명을 다시 회복하는

방법은 순명인데,

왜 그리 순명을

모질게 하셨을까?

적당히 순명하면

퉁 치는 거 아닐까?

하느님이 죽기까지

순명할 정도로 아담과

하와의 불순명의 죄가

깊었다는 것인가?

 아담과 하와는

 불순명의 죄도 있지만

또 하나의 죄는 교만이라는

죄가 있었어요.

교만이라는 것은 지나친

자기사랑이죠.

교만의 정체는

지나친 자기애입니다.

착각하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에게

목숨까지 바치면서

순명하셨던 것이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내가

받아야할 벌을 대신 받아주면.

혹은 나대신

죽어준다면 어떨까요?

고맙다는 단어로만은

 되질 않겠죠?

그런데 그분이 누구시죠?

바로 예수님!

평소에 그렇게 느끼고 사세요?

십자가 볼 때마다 정말

내 죄 대신 벌 받으셨고,

 죽을 나를 대신해서

돌아가셨다는 생각을

가슴 절절히 느꼈을까요?

 오늘 복음은 저녁식사하시고 난

다음부터의 과정이 나와요.

저녁식사를 하시고

 (나는 신학교 때 저녁을

안 드시고 골고다에 가실 수

있었을까 궁금했어요)

비탄 속에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를 바치십니다.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다가올

 고통과 모멸에 상상도

 할 수 없는 번민!

래서 기도하십니다.

 “주님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거두어가주세요”

 세상에 고통을 취미로

아는 사람은 정신병자

아니고서는 없을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내 뜻대로 하지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세요.”

하십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또한 피땀을 흘리셨죠.

여러분 피땀이

그냥 소설 같아요?

피땀난거 본 적 있으세요?

 난 사형수들이 죽기 전에

피땀 흘리는 것을 봤어요.

그것을 의학적으로

혈안증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극도의 고통에

사로잡히면 실핏줄이

터지고 그리고 땀구멍으로

 땀과 피가 섞여

 나오게 되는 현상으로,

그때 동반되는 고통은

마치 온몸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신다는 것은

그냥 복음사가가

드라마틱하게

하나 적어놓은 것이 아니에요.

정말 예수님이 피땀 흘릴

정도의 비탄의 겟세마니

기도를 바치십니다.

 그리고 날이 밝고 흉악범

취급을 받고 끌려가시어

조롱과 태형을 당하시죠.

태형은 회초리로 몇 대

 맞은 것이 아니라.

 로마법은 황제의 자비로

십자가형에 처하기 전에

반드시 등에다 매질을 해요.

가죽 끈을 내리치는데

가죽 끈 끝마다

양 뼈가 붙어있어요.

그래서 딱 내리치면서

양의 뼈가 살을 파고들어가서,

가죽을 잡아당기면 채찍과

살이 같이 뚝뚝 떨어져

나올 정도로. 어마어마한

 많은 태형을 당하면서 

이미 예수님은 전신이

다 피로 물들었고

쇼크사가 왔고,

등에 가죽은 다 벗겨졌다 그래요.

그때의 로마법이 그래요.

태형 당하시고난 후 이리저리

끌려 다니시며 사람들

구경거리가 되어,

돌을 던지면 돌을 맞고,

그 피투성이가 된 채로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이 씌어져요.

 그것도 탱자나무 가시관.

보통 가시하나가 3~4cm에요.

 무거운 십자나무를 지십니다.

예수님의 등에 올려놓은

 보목은 45~70kg 까지

나갔다고 해요.

성한 몸을 가지고

도 그런 것을 지고 산을

올라가는 것도 힘든 일인데

온몸이 찢어진 채로

그걸 지고 올라가시며

세 번이나 넘어지십니다.

그리고 골고타 언덕에서

벗겨진 채 엄마가 정성껏

만들어 주었던

속옷까지도 다 벗겨지죠.

그래서 로마 병정들은

이것은 나누지 말고

제비뽑아서 온전히 갖자.

정말 다 벗겨진 채

네 수족에 못이 박힙니다.

사람은 두 손 두 발을 붙잡고

있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0.01%의 자유마저도

없는 상태가 되는 거죠.

손 위에 못이 박히고

양발등 위로 길이 19cm

이상 되는 철대 못이 두 번째

 번째 발가락사이에

 묻혀서 뚫어져요.

 그리고 정중심장을 뚫어버려요.

의학자들은 이 통증이

톱으로 생 팔을 써는 것과

같은 통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해마다 십자가의

길을 하면서 대개는

감성적으로 될 때가 많아요.

십자가의 현실성.

그 어마어마한 고통을

우리도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못 느끼죠.

어떤 성인은 죽을 때까지

 14처를 묵상했다고 합니다.

 한 처가지고 7~8년을

묵상하다가 보니,

어느덧 나이가 80세

가 되었데요.

그때야 우리 주님이 정말

나를 대신해서 돌아가셨구나

하는 것이 가슴 절절히

느껴지더래요.

 그래서 네 수족이 못 박혀

누구들 사이에서 죽었습니까?

강도.예수님은

강도랑 급이 같았어요.

강도들 사이서 돌아가시고,

그리고 끝나지 않았죠?

예수님의 심장 안으로

창이 들어와요.

옆구리라고는 하지만

마지막 확인사살 왼쪽심장

갈비사이고 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쏟게 된다고 해요.

그런 다음 가족들이 있으면

시신 가져가라고 한데요.

피한방울까지도

다 쏟으십니다.

구세주가!

 예수님의 삶은

우리를 대신해서

성부께 드리는 순명이고

사랑이기에 우리들은

 감사해야합니다.

감사하다고,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 자체가 예수님을

닮는 삶이 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을 닮는 삶

 오늘 강론 이걸

기억하시면 되요.

행복한 거리,

고슴도치 이야기부터

시작 했었죠?

지금 나랑 어떤 사람과

 불편하다면 그것은

그 사람과 거리가

안 맞는다는 이야기예요.

뭔가 지나치게 가깝거나

과도하게 멀리 가있어.

한집에 살아도 왠지

남 같고 낯설고,

내 속마음 드러낸 지도

 몇 년 전인지 기억도 안 나고.

한 침대에 있어도

마음의 거리가 얼마나

먼 사람이 많은데요.

그래서 우리는 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먼저 손을 내미는

자세가 필요하죠.

여기서 다시 고슴도치의

지혜를 배워야하지 않을까?

자기의 가시에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찔리는 것 도 모르고,

“왜 그래?

내가 다 해주잖아.

불만이 뭐있어?”

그것이 다

행복은 아니거든요.

또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그 거리를 깨는

많은 죄악이 있고,

그 죄에 떨어질 때마다

주님이 2천 년 전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의 죄

때문에 여전히 수난을

으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나 때문에 우리주님이

대신 벌 받으시고

대신 돌아가시는 것.

언제까지 그럴 거예요?

2017년 주님 수난 성금요일(4/14)

배티성지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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