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지옥에 떨어진 성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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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수 [landpia21] 쪽지 캡슐

2008-09-03 ㅣ No.8220

어느 수도원에 ´디아소스´란 이름의 훌륭한 수도사(修士)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뭇사람들로부터 높이 존경받는 보기 드문 성직자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수도원에서 빤히 바라다보이는 곳에 매춘부(창녀)의 집이 있었습니다. 성스러운 기운이 맴도는 수도원과 달리 매춘부의 집에는 늘 찌든 살비린내가 요란했습니다. 때때로 색마같은 건달들과 수컷들이 붉은 휘파람을 나부끼며 들락날락했습니다.

어느 날 디아소스 수도사는 참다못해 매춘부를 불러다놓고, 타이르듯 말했습니다.
“여인아, 그대는 이제나저제나...밤낮없이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 훗날 죽어서, 최후의 심판대에서 받게 될 무거운 죄값이 두렵지도 않느냐?”
매춘부는 맑은 이슬을 글썽이며, 신의 형상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특별난 재주도 없고,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그녀는 다른 직업을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지만, 매독균이 이미 뼛속까지 침투한 만신창이의 몸이라, 다른 힘든 노동을 즐길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전과 변함없이, 군침을 삼키는 사내들 앞에서 껍질 벗긴 허연 볼록선과 오목선, 깊은 계곡과 까드러지는 웃음을 팔았습니다.

디아소스 수도사는 불덩이같이 노하여, 매춘부의 집 처마 밑으로 사내의 부푼 사타구니가 처들어갈 때마다 뜰 한가운데에 작은 돌멩이를 하나씩 하나씩 주워다놓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더해갈수록 그 돌무더기가 덩어리를 키워갔습니다.

어느 날 디아소스 수도사는 다시 매춘부를 불러다놓고,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그대여, 이 돌무더기를 보아라. 이 돌멩이 하나하나는 그대의 알몸에 벌거숭이알몸을 포갠 사내들의 숫자이다. 노려보듯 지켜보는 하늘의 눈동자가 두렵지도 않느냐?”

매춘부는 서러운 회초리질을 연거푸 당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차가운 방바닥에 엎드려, 한스럽게 처절히 흐느끼며, 그날껏 지은 죄를 진심으로 뉘우쳤습니다.
“신이시여, 크고 부드러운 손으로 이 축생같은 목숨을 건져, 그 넓은 손바닥 위에 저를 올려놓고... 검은 회오리바람 소용돌이치는 이 질곡같은 항아리 속에서...하루속히 이 넝마의 목숨을 구해 주소서.”

그날 밤, 신의 명령에 따라 하늘나라에서 죽음의 사자(使者) 바이싸이가 그 지상으로 내려왔습니다. 왼팔로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오른팔로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즉 매춘부와 수도사를 함께 데리고 저승으로 가뭇없이 떠나갔습니다.

아,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이란 말입니까, 뜻밖으로 매춘부는 꽃바다의 천국으로, 수도사는 불바다의 지옥으로 이끌려갔습니다. 매춘부가 천국으로 인도되는 것을 본, 디아소스 수도사의 두 눈동자 속에, 서슬퍼런 초승달과 그믐달이 떠 양 끝을 날카롭게 벼리었습니다.

“오, 통탄할지고! 신의 심판이 어찌 이다지도 어처구니없단 말인가? 나는 일평생 절제 속에서 신을 숭앙하며 살아왔다. 금욕 속에서 신께 경배하며 살아왔다. 그런 나를 난바다의 지옥으로 몰아가고...일생동안 관능적인 쾌락을 좇은 저 여인을 향바다의 천국으로 인도하다니..."

분노와 불평불만에 찬 디아소스 수도사의 눈빛을 보고, 죽음의 사자 바이싸이는 꾸짖듯이 말했습니다.
“디아소스여, 신의 심판은 공평무사하고 공명정대한 것이다. 그러니 노여움을 풀어라. 그대는 일평생 ´성직자´라는 이름으로 명예와 자만심만을 키우며 살아왔다. 그러면서 신의 이름으로 죄와 선을 가름하려고 했다. 무엇보다도 크게 비난받아 마땅한 것은, 절실한 사랑보다 가식적인 사랑으로 일관해왔던 점이다.

특히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것은, 성직자의 사명을 가진 사람이 결코 가져서는 안 되는, 이쪽 강끝에 서서, 강 건너 저쪽의 일체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그 극단성이 그대의 삶이었다.


그러나 저 여인은 넝마가 되도록 비록 몸으로는 죄를 지으며 살아왔지만, 진실로 순수한 마음으로 신을 찾고 또 기도했다. 신과의 약속을 자주 어기기는 했지만 악의는 없었다.
때로는 그 궂은 일을 해서 번 궂은 돈닢을 맑은 일에 썼다. 자신보다 더 궁핍한 이웃사촌의 품아귀에, 훈훈한 인정의 씨앗을 떨구기도 했으니 그 얼마나 갸륵하고 고마운 일인가."

그렇게 말하고, 지상에서 행해지고 있는 두 사람의 장례식을 수도사의 눈 앞에 펼쳐 보였습니다.

디아소스의 장례식은 차라리 즐거운 잔치집처럼 화려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송곳 꽂을 틈도 없이 모여, 아픔에 젖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시신을 싣고 갈 영구차는 하얀 꽃무리떼에 둘러싸여, 그를 위해 수만 떨기 꽃송이가 목잘려 죽은 것을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웃음무리이기는 하되 피묻은 웃음무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매춘부의 시신은 헌 누더기에 싸인 채 마당 한 귀퉁이에 쓸쓸히 누워 있었습니다.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둥지틀고 살아온, 늙고 병든 한 여인의 울음소리는 처량함만 더했습니다. 찾아오는 발길 하나 없다 보니, 바쳐주는 꽃 하나 없었습니다. 그 고독한 하직을 찾아온 문상객은, 그 위의 하늘에서 둥글게 원무하는 솔개 한 마리 뿐이었습니다.

죽음의 사자 바이싸이는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그대 디아소스여, 잘 새겨 들어라.
하늘의 대접은 지상의 대접과는 영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신은 인간의 순수를 본다. 그것이 사랑과 증오의 기준이다, 심판의 기준이다.
지상은 인간의 가식을 진심인 양 믿고 대접하지만, 하늘은 인간의 순수함을 보고 대접한다.
매춘부의 매춘이 더럽다고 하지만 (1)종교의 매춘, (2)권력의 매춘, (3)지식의 매춘 행위는 비할 데 없이 더러운 매춘행위이다.”

말을 끝맺은 죽음의 사자 바이싸이는 디아소스를 한참 노려보듯 쏘아보다가, 순식간에 그를 무저갱 속으로 와락 밀어버렸습니다. 디아소스는 단말마의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끝없이 끝없이 추락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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