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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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한 사람의 탕자임을 깨닫게 될 때에 / 사순 제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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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식 [big-llight] 쪽지 캡슐

2017-03-17 ㅣ No.11079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 박물관에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그림이 있다. 거기에는 방탕 끝에 돌아온 작은아들이 아버지 품에 얼굴을 묻고 있다. 누더기 옷, 다 해진 신발, 상처 난 발바닥은 그가 집 떠나 많이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았는지 보여 준다. 그의 머리는 막 태어난 아이처럼 삭발인데, 이는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보여 준단다. 동생을 안고 있는 아버지모습에 큰아들은 어둡게만 처리되어 있다. 그 얼굴에는 시샘과 질투, 그리고 분노가 찼다. 아버지 행동이 못마땅한 것일 게다. 아들을 안은 아버지의 두 손은 서로 다르다. 왼손은 크고 강인하여 세상의 그 어떤 위험에서도 아들을 보호해 줄 아버지 손이다. 오른손은 작고 부드러워 아버지가 다 품지 못한 사랑을 섬세하게 품는 어머니 손이다. 집 나간 놈을 기다리다 늙어 버린 아버지 얼굴 모습이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은 안도감으로 자비롭고 평온하다. 그러나 한쪽 눈은 집 나간 아들이 그동안 얼마나 그리웠는지 눈물로 지샌 거의 실명 상태다. 그렇지만 눈가에는 분노가 아닌 사랑이 가득하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흔히 돌아온 탕자의 비유란다. 죄 지은 작은놈을 주인공으로 보는 게다. 그런데 또 어떤 이들은 큰아들 비유라고도. 이는 동생보다 줄곧 아버지 종으로, 아버지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은 큰 얘를 주인공으로 여긴단다. 허나 방탕함을 모르는 큰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가 하느님을 제대로 모른다는 메시지도 어쩜 더 중요할 수도. 그러나 누가 뭐래도 주인공은 자비로운 아버지일 게다. 두 아들이 주인공이 아닌, 그들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대하는 아버지라는 거다. 비록 작은애가 큰 죄 지었음에도 멀리서부터 알아보고 기꺼이 받아들였고, 또한 큰애가 화났을 적에 얘야,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며 자신과 그를 따로가 아닌 하나인 양 대하는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만이 가장 큰 메시지로 여겨지니까.


사실 우리도 때로는 작은 얘처럼, 때로는 큰아들마냥 산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집 나간 뒤로 하루도 그 얘를 잊지 못해 떠난 그 길을 끝없이 보았으리라. 멀리 간 아들향한 그리움은 눈물이 되어, 그 흘린 눈물로 눈은 짓눌렀으리라. 저 멀리 길모퉁이를 돌다온 몰골이 달라진 아들을 안고 기쁨에 겨워 춤추는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부족함과 잘못을 다 아시면서도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 죄인이 돌아오기를 마냥 기다리신다. 또한 우리의 자그마한 회개도 크게 기뻐하신다. 지금도 그분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다리신다. 반면에 부서지고 깨지고 잘못하고 죄를 짓고, 사순 시기마다 회개한다고 또 애를 쓰지만 매번 같은 죄를 반복하고, 후회하고 좌절한다. 이것이 우리 모습이다. 매번 똑같은 모습으로 당신을 찾는 우리를 기꺼이 맞아 주신다. 이 시기만이라도 그분을 꼭 기억하자. 그래서 고향의 오솔길처럼 포근한 아버지 하느님께 돌아가자. 그곳은 우리가 가야 할 영원한 고향이다.

 

재산을 분배받아 나간 작은아들이 타락생활 끝에 집에 오자,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따뜻이 맞아들인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 잔치까지 벌이는 것을 보고는 화를 막 낸다. 자신은 지금까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종처럼 일만 했다나. 그런 큰아들에게 아버지는 늘 사랑을 받으며 살아온 걸 일러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작은아들은 집나가 방황 끝에 비로소 아버지 집이 얼마나 좋은지를 안다. 반면 큰아들은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하면서도 그 값어치를 몰랐다. 몸은 아버지 집에 있었지만, 마음은 종살이하고 있었기에. 스스로를 얽어맨 몸이니까. 큰아들도 마음으로는 동생처럼 세속의 재미를 듬뿍 즐기고 싶었던 게다. 그는 겉으로만 보면 집 안에 머물면서 아버지 잘 섬기고 충실하게 일하는 효자였다.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작은아들과 다를 바가! 단지, 하나는 집 떠났다가 깨달음을 얻은 탕자이고, 다른 하나는 집 안에 있으면서도 깨우치지 못한 탕자라는 차이 뿐이니까. 우리 역시 몸은 주님 성전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밖에 나가 있을 때가 더 많다. 어쩌면 방황했던 작은아들보다, 안에서 방황만하는 우리에게서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게다.

 

이렇게 이 작은아들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으며, 동생을 용서 못해 받아들이지 못하는 속 좁은 큰아들 모습 또한 우리 모습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 죄악을 헤아리시기에, 여기에 자유로울 이는 아무도 없을 게다. 그분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늘 일으켜 세우신다. 그러기에 이제라도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을 바르게 안고 가야 하리라. 이것이 곧 사랑뿐인 그분 마음이기에. 되찾은 아들 비유에서 충실하게 살아온 큰아들보다, 아버지 품에 안겨 참회의 눈물 흘리는 작은아들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건 넘치는 그분 사랑이 그를 깨끗이 씻어 주기 때문일 게다. 누가 뭐래도 이 사순 시기는 참된 회개로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 자비를 구해야 할 또 한 사람의 탕자임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하느님의 그 한없는 사랑을 올바로 이해하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http://blog.daum.net/big-l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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