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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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고 길게 믿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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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 [communion] 쪽지 캡슐

2002-10-14 ㅣ No.40603

얼마 전 친구가 결혼을 했습니다.

그다지 ’잘 하는 결혼이다’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던 결혼이었죠.

 

친구의 남편은 개신교 집안입니다.

물론 제 친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구요.

결혼이라는 것이 어디..

조건 1.2.3.. 이렇게 번호를 매겨 맞춤식으로 내 맘에 꼭 맞는 사람으로만 고를 수 있는 것이던가요..

그러니 어지간한 차이는 인정을 해야하겠지요.

 

하지만..

종교의 차이라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고 어려운 문제더군요.

 

친구의 시어머니가 되는 분은..

독실한 구교집안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수도자까지 배출한 집안이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젊었을 적에 이 시어머니는 개종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 계기는 정확히 모르지만요..

그러니 그 시어머니는 내심 자신만만해 하십니다.

나도 개종을 했으니 너도 결국은 개신교 품으로 들어오게 될 거다..

 

처음에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양쪽 집안 모두 떨떠름해 했지만..

그래도 좋은 마음으로 약속했답니다.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자고.

각자가 믿는 바대로 살자고..

 

근데 청첩장을 돌리고 결혼이 초읽기에 들어갈 무렵..

그 금석맹약은 물거품이 되고..

조금씩 말썽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친구가 관면혼배를 친구의 남편에게 요구했을 때 한바탕.

친구가 신혼집에 성모님 고상을 모셔놨을 때 한바탕.

결혼식을 개신교 교회에서 해야 한다고 했을 때 한바탕.

 

결국 친구는 일반 예식장에서 식을 올렸습니다.

목사님을 주례로 모시구요.

그나마 양쪽이 조금씩 양보한 결과였지요.

그토록 성당에서 결혼하고 싶어했던 친구였던지라..

전 많이 속상했습니다.

 

근데 식이 한창 진행될 때의 일이었습니다.

성혼서약을 신랑 신부가 읽는 차례였지요.

신랑은 꼬박 꼬박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이라고 읽었는데..

제 친구는 그걸 모두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이라고 읽었답니다.

 

신부측 하객들은 상당수가 가톨릭 신자였던지라..

그 장면을 보면서 마음이 애잔해짐을 느꼈지요.

저도 참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친구의 비장한(?) 결심도 결심이지만..

앞으로 펼쳐질 친구의 험난한 신앙생활이 눈에 보이는 듯해서였습니다.

 

근데 그 순간..

신랑측 가족들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답니다.

역시 신랑측 가족들의 하객들은 같은 교회 출신의 개신교도들이 상당수였거든요.

아마 ’며느리 때문에 신도들 앞에서 이게 무슨 망신이냐..’ 이렇게 생각하는 듯 했습니다.

 

결혼식에서 돌아온 다음 날.

저는 저희 지도신부님과 저녁을 함께 할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그 이야기를 신부님께 떠벌떠벌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신부님께서 그러시더군요.

- "에이그.. 그 친구가 미련한 거였네..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전 순간 조금 놀랐습니다.

- "어~~ 신부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해요?"

- "야.. 종교 문제가 어디 타협이 되냐? 상대방이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데 굳이 그러는 건 한판 붙어보자라는 소리 밖에 안 되지."

- "아무리 그래도.. 왜 하필 우리만 숙이고 들어가야 하냐구요. 그 쪽도 똑같이 양보해야죠."

- "형 노릇하기가 쉬운 줄 알아? 그럼, 그런 소소한 일들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가톨릭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진저리를 치게 만드는 게.. 그게 신앙이냐?"

 

신부님의 말씀은 그랬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복음전파에 있으므로..

가톨릭 신자는 단지 ’신앙’이라는 말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표양이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삶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이라고 발음하느냐, 하나님이라고 발음하느냐..

성모님 고상을 치워야 하느냐, 벽에 단 십자가를 내려야 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셨죠.

 

게다가 더우기 우려하시는 부분은..

그렇게 강하게 자신의 종교를 고집하는 사람이 의외로 개종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강하면 꺾인다.. 라는 말이 있어서일까요..

 

그러면서 결국! 기어코! 저를 걸고 넘어지시더군요.

- "너처럼.. 얇고 길게 믿는 애들이 오히려 오래 가더라.."

??? %#$*^&(%$^$*#~#&%*~

 

우씨.. 정말 열받더군요.

그래서 신부님께 말씀드렸죠.

- "신부님 말씀대로요. 얇~고 길~게 끝까지 가톨릭에 버티고 있을 거예요. 순교의 상황이 닥쳐도 어떻게든 살아 남아서 벽에 무슨칠 할 때까지 가톨릭 신자로 살아야지."  

- "그래그래. 넌 아마 그럴 수 있을 거야"

 

결국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한바탕 웃고 끝났지만..

전 돌아오면서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예를 많이 봅니다.

속으로 정말 밥맛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가톨릭 신자임을 알았을 때의 그 당혹감.

그럴 때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곤 하죠.

’차라리 믿지나 말지.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더니..’

 

저는 소위 이단이라 일컫는 교단에서 가톨릭을 선교대상 1순위라고 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토록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은 별로 안 해봤습니다.

그만큼 덜 공격적이고 포용할 수 있는 너그러움을 우리 신자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소리이기도 할테니까요.

 

개종을 하느냐, 마느냐.. 의 문제는..

교리를 얼마나 알고 성서구절에 대해 얼마나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현학적인 어휘를 구사해가며 신학을 논할 수 있는가..

상대방과 말싸움을 할 때마다 얼마나 통쾌하게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가..

이런 것들에 달려 있다고는 생각 안 합니다.

 

신앙이란..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일테니까요.

물론 모르는 것보단 아는 것이 좋긴 하겠지만요.

 

신앙을 재는 "자"가 있을까요?

그 "자"가 있더라도..

"혀"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요?

"머리"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겠지요?

 

아마 ’영혼’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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