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EBS 지식채널e 변호사 조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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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선 [son1148] 쪽지 캡슐

2011-02-19 ㅣ No.1426

 

 

 

 

 

 

 

''그 집 됨됨이를 알려면 그집 뒷간을 봐라'는 말이 있듯이,

내가 생각할 때는 그 사회에서 가장 버림받은 이들에 대해서

그 사회가 얼마나 애정과 관심을 기울이느냐가

그 사회의 수준, 말하자면

그 사회의 양심의 잣대라고 생각합니다.''

 

'' 언제까지 과거에만 매달려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하는 말은

과거를 빨리 청산 단절하고 새 출발을 하자는 말이 아니라

그저 과거를 잊어버리자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지난 일을 이제 와서 일일이 들추어 내어 따질 것이 무엇이 있느냐 하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기본적으로 가해자의 논리이다.

가해자가 이같은 일방적 논리를 고집하는 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진정한 화해란 불가능하다.

피해자로서는 지난 일을 있었던 그대로 들추어내어

분명히 따지고 넘어가야 할 절박한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것은

누구를 공격하거나 해치려고 하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참회를 위해서이다.

지나간 일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철저히 가려내고

그것을 통렬히 뉘우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앞으로 두번 다시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보장을

얻어낼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충분히 실천은 못하였으나  내가 준행하려고 하는 제일보는

피의자 또는 참고인, 가족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친절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다른것은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 해낼수 있다면 더이상 좋을수가 없겠다.

만약 친절하면 일이 안된다는것을 내가 마침내 승인하게 되는일이

만분의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것은 나에게 더할수 없는 심대한 패배가 될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면,

혹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해서는 안된다고 한다면,

인간성에 거는 우리의 모든 신뢰와 희망은 대체 어떻게 될것인가?"

 

 

조영래 (1947년 3월 26일 - 1990년 12월 12일) 인권변호사

 

 

조영래 변호사님은 1947년 대구출생으로 

경기고등학교 3학년 재학시절에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동한 이유로 정학당하고

서울대 법대 재학시절 삼성재벌의 사카린 밀수 규탄,6.8 부정선거규탄.

3선개헌 반대.교련반대 등 다양한 학생운동을 주도했습니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나 사법연수원에 들어가자 마자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

1년 6개월 복역하고 출소한뒤 바로 민청학련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6년동안 수배생활을 겪었습니다.

이 기간동안 전태일평전 집필했습니다 (부제: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1980년 서울의 봄과 동시에 복권되자  수배생활 내내 그의 곁을 지킨 이옥경과

늦은 결혼식을 올리고.9년만에 사법연수원에 재입원한 후 1982년 수료한후

 83년부터 본격적인 인권변호사의 길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법연수원 수료후 임관없이 곧바로 변호사활동을 시작했으며

1984년 망원동 수재사건의 집단소송 .

1986년 이경숙사건 (여성조기정년제 철폐사건),

1987년 박길래 사건 (상봉동 진폐증사건) . 장미숙 사건등

주로 학생관련사건, 노동자와 여성,공해, 빈민들에 대한 무료변론을 포함한 인권변호에 주력하였습니다.


홍성우 변호사는 그를 가리켜

'소극적이고 방어적이던 1세대 인권변호사 그룹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인권변호사 활동영역을 확대해 나간 운동가 출신 인권변호사의 적자' 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한국의 랄프 네이터’라고 불리우기도 하였습니다.

네이터는 미국의 탁월한 변호사로 처음에는 주로 소비자 보호운동을 전개하다가

점점 뜻있는 사람들과 단체를 만들어 공해문제, 도시환경문제, 핵문제, 약물피해문제 등

시민들의 공익에 미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노력한 법률가입니다.

 


 

 

 

 1984년 9월 서울의 대홍수 때 망원동 유수지의 배수갑문이 무너져 한강물이 역류해

일대 5천여 가구가 물에 잠겼습니다.

 조 변호사는 국가를 상대로 한 2400여 가구 수재민들의 소송을 맡아

3년의 법정투쟁 끝에 승소로 이끌었으며,

이것은  우리나라 사법사상 최초의 주민집단소송이라는

뜻있는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는 헌법의 기본권과 관련된 사건은 아주 작은 사건이라도

소홀히 넘기지 않고 철저하게 접근하였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미혼여성 이경숙 씨가 교통사고로 다리를 심하게 다치자

1심 재판부는 스물다섯살까지만 직장봉급으로 손해배상액을 계산하고

나머지 쉰다섯살까지는 일용잡급직 노임으로 산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미혼여성은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두는 관습에 따라 여성의 평균 혼인연령인

25세를 정년으로 본 판결이었습니다.

 

조 변호사는 이경숙 씨 본인도 마다하는 것을 설득하여

 2심 변론을 무료로 맡아 남녀 불평등의 판례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즉 항소심에서 ‘여성의 정년도 남성과 똑같이 55세’임을 확인받은

이경숙 사건은 우리 여성운동사의 한 획을 긋는 주요 판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권변호사 조영래의 진면목이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은

부천서 성고문사건 때였습니다.

 

 

 

 

"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되게된 이사람,

온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성만으로 알고있는 이름 없는 유명인사

이 처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였으며,

지금까지 당하고 있는가?

국가가, 사회가, 우리들이

그녀에게 무엇을 하였으며 지금도 하고 있는가?"


‘혁명을 위해 성적 수치심까지 도구화한다’는 정권과 관제 언론의 융단 폭격 앞에

그는 우선 고발장으로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데 앞장섰습니다.

국가란 그 구성원인 국민의 인간적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고 실현할 때에만

그 존재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습니다.


그는 경찰과 검찰, 사법부, 관제 언론이 한 순결한 여성에게 가한 온갖

비열한 박해의 부당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성(性)을 고문의 도구로 사용했던 공권력과 싸웠고,

성폭행을 당한 여성은 발설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사회통념과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부도덕한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을 세상에 널리 알리며

결과적으로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되는 역활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는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민변은 노동자 연대파업인 1986년 '구로동맹 파업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변호사들이 모인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와 법조계의 내부 변혁운동을 준비하던

'청년 변호사 협의회(청변)'의 합작으로 탄생한 단체입니다.

이 무렵 대한변협의 인권위원을 자원한 그는 이 사건의 모든 기록을 모아

변협 최초의 ‘인권보고서’에 담았습니다.

 대한변협의 사무실에도 안기부나 보안사 요원들이 상시로 출입하던 시절이라

그는 보고서조차 은밀히 쓰고 출간해야 했습니다

 

보고서가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자,

그는 보고서의 후기를 다시 썼습니다.

“우리의 인권보고서는 할 말을 잃었다.

다만 치떨리는 분노로 이렇게 외칠 따름이다. ‘박종철을 살려내라”

 

이렇게 서민과 사회적 약자, 민주화와 노동관련사건, 시국사건등 인권의 변호를 위해

늘 앞장섰던 조영래변호사는 90년 9월 폐암 진단을 받고

석달 뒤 4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 한때 우리는 모두 이상주의자였다.

열정과 이상 때문에 목청 돋우어 외쳤고 가슴을 치고 울었다.

걸핏하면 죽음을 생각했고, 시시로 세상의 종말을 들먹거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의 염원 중 극히 일부분만 이루어진다손 치더라도

역사는 엄연히 진보하는 것이 아닌가.

 

수없는 난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는 커다란 진보를 이루었고 앞으로

더욱 크게 진보할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 없이도 우리는  살아왔고, 많은 것을 이룰 수가 있었다.

 

오늘 우리가 먼저 떠난 그의 삶을 아련한 그리움 속에 되새길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믿음과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조영래평전 에필로그 中

 

 

 

 

 

'' 아빠가 어렸을 때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나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은 소망인지도 모르겠지만...''

 

 

 

글출처 : 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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