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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깊은 예수님의 시선 - 윤경재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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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whatayun] 쪽지 캡슐

2017-02-27 ㅣ No.110378

 

한없이 깊은 예수님의 시선

 

- 윤경재 요셉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17~27)

 

 

 

오늘은 많은 분이 좋아하는 천상병 시인의 시 소릉조를 감상할까 합니다. 평생을 가난과 질병 속에서 살면서도 삶을 원망하지 않고 순수함과 어린이 같은 천진함을 잃지 않았던 그는 이름대로 천상(天上) 시인이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여러 번 다녀왔던 그의 모습에서 기인의 풍모를 느낀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순진무구한 시심은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 마음을 정화시켜줍니다. 담배 값과 막걸리 한 잔 마실 돈만 주머니에 있어도 온 세상을 다 가졌다라고 여겼던 그의 가난은 결코 진부한 넋두리와 한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소릉(少陵)은 중국 당나라 때 시성으로 추앙받는 두보의 호입니다. 두보는 평생 관직과 인연이 없었으며 가난한 유랑객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안록산의 란 소용돌이에 휩쓸려 호되게 고생했습니니다. 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인생 후반기에 그는 폐병과 중풍에 걸려 모진 고생을 합니다. 자신 겪어야 했던 삶의 모순과 백성들의 고난을 시로 풀어내며 살았습니다. ‘소릉조는 두보의 가락으로 노래한다는 뜻입니다. 천상병 시인은 두보처럼 삶의 고난을 감내하고 시로 승화시키는 모습을 닮고 싶었던 것입니다.

 

<소릉조> - 천상병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산소에 있고

 

외톨박이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노니, ,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

 

수중에 얼마나 가진 게 없었으면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라고 읊겠습니까? 그러나 이 말속에서 슬픔의 흔적보다는 해학과 여유가 느껴집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어쩌면 저승에도 못 갈 수 있다는 가난한 자의 행복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말속에서 눈물겹도록 따뜻하고 비장한 종교심이 느껴집니다. 모든 것에서 초월하고자 하는 그의 본심이 우러나옵니다.

 

마지막 구절 생각하노니, ,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여기서 또 한 번 반전이 일어납니다. 가난과 고난뿐인 것 같은 삶 속에서도 그래도 살아가는 맛이 있다는 호기심과 감사함이 배어나옵니다. 생의 깊은 비밀이 두텁게 이불처럼 간난한 자의 외로움을 감싸주고 있다는 긍정심이 담겼습니다. 설움, 답답함, 괴로움, 외로움, 쓸쓸함이 바람에 출렁이는 인생의 잔물결이라면 열 길 깊은 물속은 고요하게 흐르는 진실의 통로가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이 여전히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고백이며 그 깊은 경외심 앞에 엎드려 머리 숙이는 천상병 시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은 하늘나라가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라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증언하는 듯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천의 마지막 연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구절에 머물면 우리는 한없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 없게 됩니다. 이는 고난의 삶을 감싸 안으며 어루만진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경지입니다. 천상병 시인보다 모든 면에서 풍족하게 아니 넘치도록 많은 것을 소유했으면서도 아주 작은 불편마저도 참아내지 못하며 불평불만을 쏟아내었던 내 자신이 작아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이 온통 먹구름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고 숨 쉴 여유조차 부리지 못하는 송곳 같은 내가, 어찌하면 이 세상에 소풍을 다니러 온 것이라 운운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천상병 시인은 두보처럼 다작을 남기지는 못했으나 그 순수함과 천진성만은 두보를 뛰어넘었다고 생각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행위의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존중하며 따르고 삽니다. 그의 말과 행동에서 인생의 어떤 맛을 추구하고 사는 지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자기 삶이 올바른 줄로만 알고 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원칙이 보편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선을 행한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남에게는 불편과 해로움을 끼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선물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만 뿌리고 사는 꼴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은 선함을 자기 삶의 원칙을 삼았습니다. 그것도 완벽한 선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는 점이 눈에 띠기 시작했습니다. 잘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게 되었고 상종해서는 안 된다고 담을 쌓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랜만에 자기의 선함을 알아줄 만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수 같은 선한 사람이라면 왠지 자신을 인정해주고 부족한 면을 지적하여 보다 완벽해지도록 이끌어 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증인으로 내세워 자신의 우월함을 만천하에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의 병통이 어디에 있는지 금세 파악하셨습니다. 그는 완벽하게 선해지고 싶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바로 이 점이 잘못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완벽하게 선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 한 분만 선하십니다. 만약 인간이 그런 완벽함을 추구한다면 자칫 독선에 빠질 위험이 커집니다. 자기만 옳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이웃을 외면하는 죄에 물들기 십상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행동을 엄격주의 또는 근본주의라고 부릅니다. 안셀름 그륀 신부는 엄격주의자들의 행동은 어려서 받은 영적 상처가 주원인이라고 진단합니다. 아이가 어려서 인격을 무시당하고 웃음거리로 전락한 아픈 체험이 상처가 되어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의 감정을 메마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우리는 어릴 적에 벌 받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처벌한다.”고 말합니다. 비단 구체적 체벌과 모욕뿐만 아니라 따뜻한 사랑을 주지 않고 외면하거나 방치하는 것도 어린아이에게는 벌로 인식됩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쌀쌀맞게 구는 행동도 결국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아픈 체험이 각인된 아이는 성인으로 자라도 더 이상 벌을 받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가두어 놓고 엄격하게 대한다고 합니다. 더 이상 벌 주는 사람이 없는데도 스스로 처벌하는 것입니다.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 안에 어릴 적 상처가 후더침처럼 배어나옵니다. 눈이 깊으신 예수께서는 그에게 부모한테 받지 못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라고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예리하게 받아 적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구원받을 마지막 기회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고 구체적으로 부른 사람은 드문 편입니다. 그 부르심에 바로 응답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들입니다. 그를 새로운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초대였습니다. 그러나 초대 받은 대부분 사람은 그 초대에 응하지 못했습니다. 갖은 핑계를 대며 거절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초대는 언제나 우리에게 비움집착이라는 두 갈래 길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라는 최후의 통첩과 같은 절실함이 담겨 있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6,24)

 

하느님을 향하는 길은 비움이며 재물로 향하는 길은 집착입니다. 비움은 에고를 덜어내고 이웃에게 선물이 되는 삶입니다. 집착은 자신만이 옳다고 고집 부리며 온 세상에 자신이 쓰다가 버린 쓰레기를 투척하는 행위입니다. 온 세상을 오염시키고 악취로 물들게 하는 짓거리입니다. 결국 자신과 이웃 모두를 병들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며 사랑을 보내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두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 길은 외면한다고 해서 선택의 순간이 미뤄지지 않습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내가 도달하는 길은 더 향기로 가득찰 것이며, 선택이 지체되거나 잘 못되면 악취만 풍겨 나올 것입니다. 주체성을 지닌 인격체로 당당하게 나서서 두 길 중 하나를 선택하고 걸어야 할 것입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은 이 세상을 소풍 나왔다고 여기며 아름다운 경치와 사랑하는 이웃에게 둘러싸여 지낼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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