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5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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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지식채널e 잊혀진 대한민국 - 3. 한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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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선 [son1148] 쪽지 캡슐

2011-01-21 ㅣ No.1409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새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꼬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꼬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한하운 님의 " 전라도 길 "

 

 

 

 

  

[ 한센인 ]

 

한센인이란 나병이라고 불리우는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센병은 나균(Mycobacterium leprae)이 원인으로 사람에게 생기는

만성 질환으로 피부와 말초신경에 생긴 병소가 특징인데,

눈·고환·코와 인두 점막도 침범합니다.

 

나균은 말초신경을 파괴하여 감각을 잃게 하고 차츰 조직이 변성되며

결과적으로 사지(四肢)가 변형되고 파괴됩니다.

 

나병은 전염성이 높지는 않은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면역계가

그 병을 저항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소록도 갱생원이라는 곳에서 격리된 생활을 해왔는데 이는

일본의 ‘나예방법’을 모법으로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조선나예방령’에

의해 설치된 것입니다.

 

최근 일본 정부는 1907년 제정된 나병(한센병)예방법에 의해 강제 수용된

일본인 환자들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 2001년 5월 구마모토

지방법원에서 승소하자 특별법을 제정, 보상을 해주면서도 소록도 등이

이 법에 명시된 13개 시설에 해당되지 않는다면서

한국과 대만의 한센인에 대한 보상은 거부하였습니다.

 

 

 [ 소록도 ]

 

 

 

 

소록도는 전남 고흥의 녹동항에서 마주보이는 배로 5분거리의 작고 아름다운 섬이다.

  본래 사슴이 많이 산다고 하여 녹도(鹿島)였다고하는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녹도를 비하하기 위하여

작을소(小)를 붙여 소록도라 했다고 한다.

 

 

 

 

 

 

소록도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기원은

구한말 선교사들이 세운 시립나 요양원에서 시작되었다.

 

 

 

 

1916년 조선총독부가 소록도 자혜병원으로 정식으로 개원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한센병 환자를 강제수용하기위한 시설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4대 원장 수호는 자신의 동상을 건립히여 참배케하고

자신이 연설을 하기위한 연단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엄청난 큰 돌을

완도에서 몇년이 걸려 환자들을 시켜 옮기게하였고

강제노역과 가혹행위를 일삼다가 자신의 생일 행사에 참배하러

온 한센인 이춘상에의해 살해당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일제 때의 한센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감금실과 검시실이

문화재로 등록되어있으며, 역사적인 건물과 표지판 등이 많이 남아 있다.

 

 

 

 

 

 

 

[ 한센인들의 험난한 삶 ]

 

 

한센인 학살은 전형적인 사회 소수자에 대한 박해입니다

권력 유지를 위해 사회적으로 배척받는 한센인을 표적으로 삼은 학살이

되풀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센인에 대한 인권침해가 사회적·국가적 차원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 한센인 학살

 

 

“70년대 후반까지 정착촌이 아닌 마을에 들어가면 붙잡아서 소록도로 보냈다.

심지어 80년대 초에도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단종수술을 했다.”

  “정부는 한센협동회를 조직해 한센인을 지원했지만, 이들은 한센인들을

못살게 굴었다. 정부가 지원한 것은 선거 때 여당표가 필요해서였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나 국군이 마을을 점령하면 마을 사람들이 점령군에게

막걸리를 사주며 정착촌에 있는 한센인을 반대파로 몰아 학살하는

‘막걸리 학살’이 만연했다. 이 기간 동안 한센인들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혹은 좌익이라는 마을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학살당했다.

실태조사에서 밝혀진 ‘경남 함안의 물문리 학살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센인들은 1950년 7월 하순쯤 관동교 다리 밑에서 국방경비대, 경찰,

지방청년단 등에 의해 29명이 숨졌다고 증언했다.

“좌익”이라는 마을 사람의 제보 때문에 목숨을 잃었지만,

한센인 대부분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좌익사상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증언이 나왔다.

 

한센인 인권침해 3대 사건의 하나인 비토리섬 학살 사건의 경우,

1962년 섬을 개간하러 들어간 한센인 26명을 살해한 가해자 3명에 대해

법원은 징역1∼2년의 형을 선고했을 뿐이다

 

 

 

 

■ 60년대 주민에 의한 인권침해 국가가 눈감아

 

독재정권 시절에는 분열한 한센인들이 서로를 탄압하기도 했다.

일본이 한센인간 격리정책을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온 반면, 우리나라는

60년대부터 격리수용을 포기하며 사실상 이들을 방치했다.

 

한 곳에 사는 일반인과 한센인간에 분쟁이 생기면 한센인들 대부분은

소수자라는 점 때문에 당연히 챙겨야 할 권리마저 빼앗겼다.

5·16 이후 소록도에 남아 있던 한센인들이 한 오마도 간척사업 때도 그랬다.

 

한센인들은 개간된 땅을 불하받는 조건으로 일했지만, 인근 주민의 반대에

부딪혀 한 마지기의 땅도 받지 못했다.

이들에게 개간한 땅을 나눠주면 주변 지역의 사람들이 모두 떠나겠다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한센인에 대한 재산권 침해 등이 공권력에 의해 일어났지만,

오랫동안 격리된 탓에 이들에 대한 자료나 기록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센인들에 대한 인권침해 대부분이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것이고

한센인들을 차별한 주체가 일반 주민들이었던 경우에도 차별을 묵인한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권위

 

 

 

[ 일본에 대한 소송 ]

 

“맞아, 저기가 감금실이었어. 겨울에 저기 갇혔다가 죽은 사람들이 많았지.”

  1차 소송의 원고는 광복 후에도 계속 소록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었다.

반면 2차 소송의 원고는 광복 후 소록도를 떠나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아온 280여명이다.

  음지에 숨어살던 한센인들은 소송을 통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자체로 기쁘다고 한다.

  1차 소송으로 사회적 관심이 모아지면서 한센인들은 한층 자신감을 얻었다.

피하고 숨어만 지내던 이들이 자기 권리를 위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삼애농장에서 살고 있는 박모(81)씨가 대표적이다.

  23세에 손톱과 눈썹이 빠지면서 한센병 발병 사실을 알게 된 박씨는 경찰서

창고에 3일간 갇혀 있다 소록도로 갔다.

 광복이 되면서 고향인 경북 김천으로 돌아왔지만 이웃의 횡포에 다시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

 마을 외곽까지 쫓아와 다른 곳으로 가버리라며 천막에 불을 지르고

폭력을 가하던 동네사람들을 피해,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군수에게

청원해 국유지에 겨우 터를 잡았다.

 

하지만 ‘정상인’들의 마을에서 아이라도 한명 없어지면 마을에는 어김없이

경찰이 닥쳤다. 한센병 환자가 아이들을 잡아먹고 묻었다는 흉흉한 소문

때문이었다. 박씨는 “그때도 우리 마을엔 한센병을 겪은 병력자만 있었을 뿐

환자는 없었다.”면서 “말문이 막힌 우리에게 경찰은 ‘신고가 들어왔으니

수색 안 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 고마운 의사 선생님 ]

 

                 

 

 

얼마 전 한 의사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주 월요일이면 안산에 있는 성라자로 마을 부속 병원에서 한센인들의

진료와 수술을 해주시는 분.

  진무른 피부와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

그리고 손과 발을 고쳐주시는 선생님이셨습니다.

  피부과를 전공하셨으면서도 처음 한센인을 만났을 때 기억으로 일본에서

성형술을 8년이나 배우고 오셨답니다.

  처음에는 주위사람들이 돈벌려고 성형 공부하러 갔다며

수군거리며 욕을 해대곤 했답니다.

  그러나 이 선생님이 배운 성형은 재건성형, 즉 화상환자나 상처로

난 부위를 고치는 성형을 배우고 오셨답니다.

  그리고 20년, 그동안 이 선생님께서 고쳐준 한센인만 해도

 2,000여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물론 보수도 없고, 큰 권력이 주어지는 일도 아닙니다.

  왜 이런 일을 하시냐고 물으니 "나는 의사잖아"가 대답에 전부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 일을 하실 계획이라고 합니다.

  10년이 됐건, 20년이 됐건 힘이 부치지 않는 한은 끝까지 해보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지 이 말은 꼭 전해달라고 하십니다.

  한센인, 그들의 병은 천형(天刑)이라고까지 여겨지며 문둥이나

나환자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결코 천형(天刑)이 아닙니다.

  발병을 하더라도 5일간만 복약을 하면 전염성은 전혀 없어지고,

꾸준한 치료를 동반하면 100% 완쾌가 가능합니다.

 

이 선생님께서도 진료를 하시면서 아무것도 없는 맨손으로 상처부위를

이리 만져보시고 저리 만져보십니다.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이나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분은 손을 잡고

볼을 맞대고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에는 이런 분도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그냥 많은 의사 선생님 중 한 분이지만,

한센인들에게 이분은 천사이십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는 천사가 되어야겠습니다.

  이 선생님 한분으로도 세상의 한 부분이 이렇게 빛이 나는데,

우리 모두가 그렇다면 정말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 글출처: 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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