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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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17 -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복음 묵상 - 김준한 빈첸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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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현 [kjh2525] 쪽지 캡슐

2017-06-17 ㅣ No.112658




2017
06 17 () 가해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복음 묵상



코린토 25,14-21
마태오복음 5,33-37


김준한 빈첸시오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10주간 토요일입니다. 오늘은 한 주간을 끝내는 주말이고 또 내일은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첫날인 주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매일 저녁 기도를 바치면서 하루를 반성하지만, 오늘 주말인 토요일은 지난 한 주간을 정리하면서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반성했으면 합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참 많은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 중에는 교회가 공식적인 기도문을 만들어 드리는 기도, 특별히 가톨릭 기도서에 나오는 기도들, 또 우리가 제일 사랑하는 묵주기도 등 많은 기도방식의 도움을 받아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한 번씩 신자들의 모임을 가지고 시작과 마침에 자유기도를 드리라고 하면 잘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하도 정해진 기도문에 따라 기도를 하던 버릇이 들어놔서 스스로 묵상하며 기도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체조배를 드려도 무언가 끊임없이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시는 분들도 가끔 있는 듯도 합니다. 그저 자신의 생활을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또 주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먼저 저 자신의 지난날을 반성해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말씀에 비추어 맹세하지 마라는 말씀, ‘할 것은 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라는 말씀을 얼마나 잘 지켰는지 되돌아봅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맹세나 약속을 했다가 낭패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물론 그 맹세나 약속은 그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의욕이 앞서서 정말 무언가를 하고 싶은 욕심이 앞서서 맹세를 하였습니다. 또 때로는 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맹세를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솔직히 나 자신조차도 장담할 수 없으면서 분위기상 그렇게 하겠다고 형식적으로 맹세 아닌 맹세를 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맹세와 약속은 좀 서로 틀린 점이 있지만 약속의 경우에도 제가 지금까지 했던 맹세의 경우와 별로 다르지 않은 형식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아니요를 그렇게 확연하게 구분하신 이유는 더 이상 핑계대지 마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맹세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거의 대부분 나의 말이 오해 받는 상황일 것입니다. 내 말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말의 진실성을 드러내기 위해 간구하는 마지막 수단이 바로 맹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누군가를 설득하고자 할 때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맹세의 순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왠지 비장하고 진지하고 자신의 온 존재를 던지는 듯한 이 맹세는 참으로 힘이 있고 또 매력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저 할 것은 라고 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맥이 빠지는 말씀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의 이 말씀이 결국 진실되라는 말씀으로 느껴집니다. 누구의 오해를 받든 안 받든, 혹은 나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무언가 자꾸 말을 만들어내고 변명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자기 자신을 방어하지 말고 무장해제하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라는 초대의 말씀만 같습니다. 마치 예수님 당신께서 두 팔을 벌려 온 몸을 드러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맡기는 것이 바로 할 것은 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 하는 말씀의 숨은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맹세한다는 것은 오해 받기 싫은 욕심, 자신의 잘못된 점을 드러내기 싫은 자존심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제일 먼저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운 부분을 가린 것처럼 맹세한다는 것은 나의 죄를 가리고 싶은 원초적인 욕망인지도 모릅니다. 그 어떤 잘못이 나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나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고 나는 절대 잘못한 것이 없다는 자기변명이 때로는 맹세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죄를 짓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이미 지은 죄를 숨기는 것이 더 나쁘다고요. 만약 저녁 무렵 산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찾으셨을 때 그들이 하느님 앞에 달려와 그들의 죄를 먼저 아뢰고 용서를 청했다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아니요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라고 할 때도 있을 것이고 아니요라고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솔직하라는 것입니다. 잘 한 것이면 라고 대답할 것이고, 내 자신이 잘못한 것에는 아니요라고 대답하는 것이 맞습니다. 다만 자기 자신을 숨기지 않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한 주간을 반성하면서 이처럼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보고 주님 앞에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김준한 빈첸시오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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